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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육의 사자와 인치는 사자 (겔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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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정황에 대한 환상을 보는 가운데 아주 그 도성이 전멸당해 없어져 버리는 무서운 광경을 봅니다. 그는 대개 멸망을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신의 예정으로 정의하는데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역사적, 묵시학적 형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성서문학의 특징입니다. 이런 형식의 표현은 후에 아주 흔한 것이 되었는데 스가랴서나 다니엘서 또 외경에 속하는 책들, 그리고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이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성을 관찰하는 자들이 각기 손에 살인 무기를 들고 등장합니다(1절). 살인 무기를 든 여섯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들이 쓰는 먹그릇을 가진 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밀사들인데 본래는 하나님의 일곱 천사들인듯 하며 이들은 후에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 문서 가운데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 존재들입니다. 여기 가는 베옷을 입은 자는 제사장 같은 옷차림인데 심판날에 피할 수 있도록 표시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인물인 것 같습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을 주는 이 일곱 사람이 들어와서 놋쇠로 만든 제단 곁에 서 있게 됩니다. 에스겔에게 때로 이르시되 그 분이 큰소리로 귀에 들려 주신 말씀입니다. 성읍을 관찰하는 자는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재촉하며 범한 죄로 하나님께서 70,000인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매우 마음이 상하여 이 범죄는 제가 한 바이라 삼하 24:17에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삼하 24:16에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에 거두라”고 했습니다. 출 12:33에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이 역할을 한 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육하는 기계가 무엇인지 애굽에서 무엇으로 치셨는지 친 것만은 사실입니다. 왕하 19:35 말씀에 앗수르 군대 185,000을 죽인 그 무기도 모릅니다. 여기 복수로 말한 것을 보니 여럿임이 분명합니다. 2절 말씀에 여섯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있다 하였으니 그러면 일곱인 듯, 그가 가브리엘, 운운하기도 합니다. 합하여 일곱은 일곱 천사일듯 하다고 봅니다. 이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라고 여기에 말하면서 베옷을 입은 것은 제사장을 상징해서 입니다. 또 서기관은 먹 그릇을 잡았는데 서기관의 필기 용구일 것입니다. 흑 천사도 가는 베옷을 입은 일이 있습니다(단 10:5). 놋 제단은 솔로몬 시대의 것(왕상 8:64)과 같은 듯합니다. 여섯은 살륙의 일을 보는데 한 사람, 세마포 입은 사람은 먹 그릇을 가졌으니 무엇을 기록할 것입니까? 제단 곁에 섰다합은 혹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서 제물이라도 바치면서 속죄를 요청함일까. 제단 곁에 제사장급의 사람이 섰다 함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벨론은 고대 중동을 재패한 강대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에 멸망을 당하고 그들이 포로로 잡아온 젊은이 몇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의 궁중 안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유프라데 강의 지류 그발강 가에서 포로민으로서 처량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같은 영특한 인물을 바벨론 궁에 보내는 한편, 실의에 찬 민중들을 위해서는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스겔입니다. 그는 제사장이요, 예언자요, 정치가였습니다. 에스겔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께로 받은 계시와 환상이었습니다. 계시는 그가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선지자라는 증거요, 실의에 찬 백성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위로의 지팡이었고 제단 없는 제사장으로서 제사장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증표였습니다. 에스겔이 제 1차로 계시를 받은 것은 자기 조국의 왕 여호와긴이 사로잡힌지 제 5년 4월 5일이었습니다. 제 2차로 계시를 받은 것이 오늘 본문 9:1에 기록된대로 제 6년 6월 5일이었습니다. 제 1차 계시와 제 2차 계시 사이에는 1년 2개월의 간격이 있습니다. 1년 2개월은 월력에 따라 계산해 보면 354+59=413일이 됩니다. 에스겔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언하는 에스겔로 하여금 좌로 누워 390을 우로를 40일 동안 고난의 떡과 고난의 잔을 마시게 한 적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유대 족속과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하여 누워있는 날이 390+40=430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제 2차로 계시를 받은 것은 그가 아직 유대의 죄악을 인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누운 채 고난의 쓴잔을 감수하고 있는 중에 또 다른 계시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이 처음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백성들 앞에 나타났을 때 백성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무슨 헛소리냐? 예루살렘? 지나간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말라 우리는 포로민, 올 데도 갈 데도 없는 망국민,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것 외엔 우리에겐 소망이라고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이 모로 누운지 1년 2개월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그를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도 그의 진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말과 충고를 한 사람 두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 6년 6월 5일에 에스겔은 자기 집에 앉았고 백성의 장로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고 에스겔 앞에 모였습니다. 그 때 다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인한 계시가 나타났습니다. 에스겔 앞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차마 두 눈뜨고 볼 수 없는 타락과 불륜의 소굴이었습니다.

(1) 에스겔이 본 것은 하나님의 성전 제단북문어귀에 선 투기의 우상이었습니다.

(2) 둘째 장면은 성전 문안에 지은 신당 사면에 그려진 벽화였습니다. 각색 곤충과 더러운 짐승의 형상과 우상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신당 앞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칠십인 장로들이 향을 피우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피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에스겔에게 들려왔습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자기 우상의 방에서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것을 보라. 저들은 생각하기를 여호와는 우리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3) 에스겔이 본 것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담무스는 바벨론에서 들어온 농사의 신, 곡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은 여호와의 손에 이끌려 여호와의 전 안뜰로 들어갔습니다.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 그러니까 바로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뜰안에서 이십오인이 성전을 등지고 얼굴을 동으로 향한 채 태양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것도 성전 안에서 신 아닌 것을 신처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고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제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이라면 격렬한 분노를 느끼십니다. 우상은 무지의 죄요, 불순종의 죄입니다. 성전 북문 어귀에 세워진 투기의 우상이란 바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증오하시는 우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주와 신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마음에 계십니다. 에스겔이 본 예루살렘은 하나님은 멀리 떠나가시고 우상으로 가득찬 도성을 보았습니다. 우상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애굽의 신들을 단과 벧엘에 끌어들였고 솔로몬 왕이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왕궁 안을 불러들였습니다. 우상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성전 안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은 유대 왕 므낫세였습니다. 므낫세는 우상 종교를 복구시킨 왕입니다. 므낫세는 산당을 다시 짓고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한 단을 쌓았습니다. 아세라 목상을 몸소 만들어 성전 뜰에 세웠습니다. 더욱 더 가증한 것은 성전안에 미동의 집을 짓고 여인들로 하여금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게 했습니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은 므낫세로 인해 우상의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아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원인이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우상과 잡신으로 메운 죄라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증거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장면이 환상으로 에스겔에게 보여졌습니다. “성읍을 관활하는 자들은 사람을 살육하는 기계를 가지고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달려오는데 손에는 사람을 살육하는 기계가 들려 있었습니다. 막 살육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서기관의 먹그릇을 차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러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두루 다니며 우상으로 인한 가증한 일로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밖에 나머지 살육의 기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베옷을 입고 먹그릇을 찬 사람이 지나가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늙은 자나 젊은 자나 처녀 아이 할 것 없이 다쳐서 없이 하라 아낄 것도 없고 불쌍히 여길 것도 없다 단 이마에 표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렇게 해서 망했고 예루살렘에 살아남은 사람은 이렇게 해서 살아남았습니다. 살아서 바벨론에서 포로 되어온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던 동족들이 어떻게 살육을 당했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일 자를 죽이시고 살릴 자를 살립니다. 죽이는데는 죽일 이유가 있고 살리는데는 살릴 이유가 있습니다. 이마에 인 맞은 자만 살려 둡니다. 우상의 가증한 일로 인해서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만 사망을 면할 수 있는 인을 쳐줍니다. 우상과 사신 복술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집내실에 자리잡는 것입니다. 먼저는 신자의 마음을 공허하게 합니다. 신자의 마음에 자기의 형상을 그립니다. 그 다음에 권세잡은 권력가의 힘을 빌어 공공연하게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들을 매수하여 경배를 자기에게 드리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영원히 떠나가고 성전이 섰던 예루살렘은 우상의 미운 물건이 지금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우리가 우리의 집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지 못하면 이상한 것들이 성전안에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성전에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늙은 자란 나이 많은 자, 인생 나그네길을 다 마친 자, 장로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자, 지도자들에게 먼저 심판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말 것은 심판이 있기 전에 이마에 표를 하는 구원의 역사가 있고 심판은 그 뒤를 따릅니다. 이마의 표는 하나님의 명예를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집에 성결을 위해 눈물과 탄식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경건한 성도들에게만 이 표를 줍니다. 계시록 7장에 이마에 인맞은 14만 4천 명이야말로 어린 양 보좌 앞에서 영원히 찬송과 경배를 드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사람에게 명예가 귀중한 것처럼 하나님의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으로 가득찰 때 하나님은 성전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인맞은 자에게는 복받는 곳이요 인맞지 못한 자에게는 심판받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인을 맞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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