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슬픔과 환상의 인물 에스겔 (겔 48:1-35)

첨부 1


35절에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삼마’라는 말은 “여호와 계시도다”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여기 계시도다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큰 책 중의 하나인 에스겔서의 마지막 말이며 성경의 가장 위대한 인 물 중의 하나인 에스겔 선지자의 최후에 남긴 말입니다. 영광의 환상, 전쟁 과 살육의 예언, 이상한 상징과 비상한 드라마 또한 굉 한 웅변 등으로 얽혀져 있는 이상하고도 신기스러운 이 에스겔서는 맨 끝에 이르러 “여호와 여기 계시다”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이 책에는 팔레스틴만큼 큰 도성의 환상과 예루살렘만큼 큰 하나님의 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도성과 성전에 대하여 여호와 여기 계시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왕국의 말기에 예언한 사람이고 에스겔은 벌써 포로가 되어 잡혀가 있는 유대인들에 게 예언한 사람이었습니다.

1. 에스겔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동정심 예루살렘에서 잡혀간 포로들은 바벨론에서 유프라테스강 상류로 일백여 마일이니 떨어져 있는 그발강 언덕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에스겔 자신도 자기 동족과 함께 올라가서 포로 생활로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심판의 응보의 준엄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 같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많고 동정심 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동족들과 함께 거하였던 것입니다. 연민성과 동정심은 가장 고상한 생활에서 흘러내려오는 감화의 강물이 흐르게 하는 샘물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로 택함 받아 애굽의 궁전의 안일 영화 다 누리게 되었으나, 하루는 한 애굽인이 자기 동족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았을 때 불쌍히 여기는 생각이 나서 애굽인을 쳐서 히브리인을 구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하신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옛 로마 격언 에 “네가 나를 울게 하려면 너 먼저 울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디베료 그라커스가 스페인으로부터 로마로 가는 길에 에투르리아 평야를 지나가다가 밭에서 고역하고 있는 노예들의 참상을 보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평민과 노동 계급이 받는 고통을 목격한 그는 드디어 가장 위대한 사회개혁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따르는 주님처럼 마음이 부드럽고 유순하여 언제나 연민의 정을 가지고 불쌍한 이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기게 해주십사 하고 성령께 간구합시다. 에스겔 은 그의 동족들과 함께 거하였으며 여호와께 종으로 부르심 받은 자입니다.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에스겔 에스겔이 백성들 앞에서 예언을 시작하기 전에 예언이 적혀있는 두루마리를 여호와께로부터 받아 먹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환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상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을 상징하는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에스겔도 예레미야와 같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과 뜻에 순종한 증거는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에 그가 취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홀리거나 하지 말 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에스겔의 눈물도 홀리지 못할 슬픔은 장차 예루살렘에 임할 재난이 이루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이 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이 재난은 어찌나 비통한 것인지 눈물을 홀리거나 울어서도 표 현 할 수 없는 재난이었던 것입니다. 에스겔의 눈의 기쁨이 되는 아내는 과연 죽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명령대로 “내 아내가 죽기 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대로 행하매”라고 에스겔은 말한 것입니다. 그는 해가 질 때부터 그 다음날 새벽 해가 뜰 때까지 곧 온 밤동안에 일어난 일 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마음에 격동을 일으키어 헛된 호소도 해보고 정신 나간 사람모양으로 어둔 밤에 손을 벌려 허위적거리기도 하였으련만 에스겔은 그러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묵묵히 서 있었으니 곧 “아침에 내가 받은 명대로 행하매” 하고 말할 수 있는 태도 그대로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적인 슬픔은 공적인 봉사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고상한 실례를 보게 됩니다. 에스겔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국가에 대한 일이 그 개인 의 일보다 중대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개인적인 슬픔 은 그의 동족과 국가의 슬픔에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의 승리는 인간의 기쁨이나 슬픔보다 더 중대하여 인간의 욕망이나 의무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인식함으로써 얻은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였습니다. 곧 주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였던 것입니다.

3.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 에스겔은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의 환상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 는 그발 강가에서 번쩍이는 불로 둘러싸인 폭풍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폭 풍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네 얼굴이 각각 사람, 사자, 소 또 는 독수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네 생물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데 네 개의 큰 바퀴가 함께 있어 생물이 움직임에 따라서 이 바퀴들도 움직였습니다. 바퀴들은 이처럼 생물을 따라 움직이되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크고 무서운 둘레에는 빙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히 박혀 있었습니다. 생 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고 그 궁창 위에 남보석 같은 보좌가 있는데 보좌에 앉으신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인 사람의 모양이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환상은 언제나 여호와의 존엄하심과 영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 활동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류와 국가들을 통치하심을 나타냅니다. 바퀴의 둘레에는 눈이 가득히 달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과 모든 행하시는 일이 절대로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심을 나타냅니다. 세상의 역사를 언뜻 생각하면 단지 서로 충돌되고 왁자지껄 하는 것뿐으로써 그저 목적 없이 이런 일 저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며 그 일을 지휘하는 분이 있다든지 무슨 지향하는 바가 있다든지 또는 어떠한 큰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하여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전쟁과 침략 이 되풀이 하는 것이며 나라들이 일어났다가는 망하고 망했다가는 다시 일어나는 것뿐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지배하신다는 진리에 비추어 볼 때에는 세상 일이 단지 떠들썩하고 혼란된 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바퀴와 같이 쉴 사이 없이 돌 고 번쩍이는 것과 같이 세상일이란 실상을 지혜로운 목적의 눈으로 가득 이 차있는 것이며 네 생물과 네 바퀴가 어떤 때는 뒤로 또 어떤 때는 양쪽으로 또 어떤 때는 앞으로 곧장 도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의 수레는 언제 나 그 큰 목적을 위하여 위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환상 곧 역 사와 섭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도 능력과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공중과 육지와 바다와 또는 바다 속에서 일어나는 전쟁 중에서도 전쟁으로 인하여 약한 국가들이 침략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왕좌에 계셔서 하늘의 군대와 땅위 의 모든 백성 속에서 역사하시며 또한 아무리 여러 가지 착잡하고 괴로운 일이 세상에서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의 수레는 변함없이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 둘레에는 무지개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비의 무지개는 모든 역사 적사건을 둘러싸서 결국에 가서는 구속받은 사회가 이루어질터인데 이 사회야말로 여호와가 여기 계시다 할 수 있는 곳입니다.

4. 미래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 에스겔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환상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장차 우리 인류에게 내리어질 축 복의 환상도 보았습니다. 이 환상은 큰 도성과 성전의 형상을 나타났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전 분수에서 샘물이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전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천사가 물을 재본즉 발목밖에 차지 않았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잰 다음에 에스겔이 물을 건너려니까 물이 무릎에 찼습니다. 천사가 다시 물을 잰뒤에 에스겔이 건너려니까 물이 허리에 오르더니 그 다음에 다시 재고 건너려한즉 물이 깊어져서 헤엄을 쳐야만 건널 수 있을만한 강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가장 줄기를 따라서 올라가면서 본 즉 강 양쪽으로 푸른 나무들이 많이 서 있는데 그 그늘들이 시원스럽게 보였습니다. 강이 흐르는 곳에는 어디나 각가지 동물과 식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청한 나무들이 서있는 강가를 따라 강이 흘러가는 동쪽으로 얼마를 가려니까 거기에는 어둡고 깊은 곳이 있고 저쪽으로는 잔잔한 강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은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곧 내류에 있는 바닷물 중에 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해 곧 진한 소금 바다이며 대양보다도 수준이 일천 척이나 낮고 물이 빠져 나가는 곳도 없으며 마치 역청과 같은 물이라 아무 생물도 그 곳에서 자라날 수 없는 그러한 바다일지라도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의 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상에 말한 것은 에스겔이 본 환상입니다. 에스겔이 기록한 강이 실제 의 강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전에 근원을 두고 차츰차츰 그 물이 불어 나중에는 온 세상의 축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참 종교의 능력과 은혜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대해서는 이 신비스러운 장은 그리스도 교회의 근원 발 전, 축복 및 영광 등을 비유한 것이며 또한 이 세상에 생명수를 부어주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교회는 하늘나라에 근원을 두고 있는 강입니다. 곧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복되신 영광의 복음“입니다. 이 믿음은 누가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혜로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는 것이며 오직 때가 차매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 게 보이신 것 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으로 본 신비스러운 강은 그 넓이와 길이가 점점 확대 되어 처음에는 발목에 차던 것이 나중에는 헤엄을 쳐서야 건너갈 수 있을 만큼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강이든지 그 근 원에서 멀어질수록 그 넓이와 그 깊이가 확대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강은 그 근원에서 나오는 물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그 넓이와 깊이가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그 지류들이 합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본 강은 그 근원인 성전의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태주는 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가장 발전하여 이 세상 을 정복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인간적인 계획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 라 그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경륜과 희생적 사랑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 빛을 주었습니다. 그 빛은 아무의 힘도 빌리지 않습니다. 오직 근원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어떠한 시대이고 종족이고 또는 개인이고 간에 이 빛에 보태어 준 것은 없습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유능하고 위대한 분이었다고 하지만 그도 그리스도교의 진리의 능력과 내용에 조금이라도 보태준 것은 없습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의 환상은 그리스도교의 근원과 발전을 보여주는 한 비유가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복과 또한 장차 베풀어질 축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막을 가로질러서 푸른 풀이 덮인 둑을 따라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복음이 이 세상에 전파될 때에는 사막과 같은 거친 것도 변화시켜 푸르게 만들고 사해와 같은 못쓸 바다도 생물이 번식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은 사막을 푸르게 만들고 사해를 고치었습니다. 이와 같이 쿠리의 믿음은 사람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것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물이 이 세상에 채워질 때는 모든 거친 사막과 같은 곳이 변하여 장미꽃이 핀 듯한 아름다운 동산으로 꾸며지고 시기와 여러 가지 죄로 채워진 사해와 같은 인간의 심령이 고침을 받고 전쟁과 시 달림과 분쟁이 다 없어질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보고 나서 “여호와 여기 계시다”는 말로 예언의 말씀을 맺습니다. 이 환상 은 바울이 그 감명 깊은 환상을 보았을 때 세상의 끝날을 보고 듣던 그것과 같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 곧 최후의 원수인 사망까지도 발 아래 두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넘겨받아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며 또한 모든 것 안에 계실 끝날의 환상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강, 곧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만민을 위한 것이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기다려야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생명을 고치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마치 사막처럼 아무것이나 아름다운 것이 없는 우리 생활에 능력의 틀을 대어 새롭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자라날 수 있게 할 수 있으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해의 모든 독소와 같은 악을 고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을 생산 시킬 수 있으니 곧 그의 생활이나, 생각이나 행동이 “여호와 여기계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나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