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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회 정의를 외친 아모스 (암 05: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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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당시의 시대 적 형 펀을 보면 이스라엘은 마지막 번영을 누리 던 때였습니다. 이웃나라 앗수르와의 계속되던 알력도 끝났고 외적의 침입도당분간 없어지고 국제간의 무역을 통한 이 익을 얻어 겉보기에는 국가가 안정된 것 같았습니다. 정치와 아울러 종교도 생명을 찾은 듯 절기를 지키고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리는 풍요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불모의 광야에서 야인으로 양을 치고 뽕을 기르던 목자 아모스는 대부분의 이스라엘사람들처럼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외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문제보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적 바탕을 상실한 표면적 쾌락주의에 장차 벌어질 비극의 씨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화와 안전 속에 혼란과 부패를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겼던 어느 날 아모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왔습니다. 처음 환상은 이른 봄 목자들이 새 풀을 기다리고 있는 때에 메뚜기가 덮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전토를 황폐시킬 징조인가 하는 급박한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환상으로 아모스의 고막을 울리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와 심판의 경고였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알리기 위해 선지자로 일어났습니다. 암 3:8에 “하나님이 부르시니 어찌 예언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왕을 모반한다는 모략을 들으면서도 그 백성을 사랑하기에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사회 공의의 사실을 공격한 것입니다.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공의로워야할 판결이 뇌물에 의해 흐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신 한 켤레에 말살되는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말해줍니다. 인간이 생명이나 인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보다는 내 명예, 내 재산이 훨씬 소중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경제균형의 상실입니다. 공의의 상실은 빈부의 격차를 심하게 만들게 됩니다. 가난한 자의 아내까지 매매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특별히 아모스의 분노는 허영에 들떠 있는 바산의 암소들에게 신랄했습니다. 바산은 갈릴리 동쪽에 있는 비옥한 지방을 말하는데, 이것은 특권계급의 부인들을 책망하는 말입니다. 암소처림 살진 특권충의 부인들은 남편들을 졸라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게 하고 부정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부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저주는 곧 이들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저주가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파놓은 비극의 함정 일 것입니다. 이런 상술한 귀결점은 음란입니다. 그러므로 암 2:7에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와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바알 종교의 성소 매음의 습관을 가르친 것입니다. 바알은 생식과 풍산의 신으로 알려졌기에 소위 거룩한 성교가 감행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편만 된 것입니다. 부패의 결과는 음란이고, 음란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종교의 이름으로 감행되는 신자들의 방종의 생활을 지적하면서 책망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부정과 부패, 압제자들의 악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이를 행하고 하나님 성전에 바치는 제물과 십일조는 자기들의 부정을 용서받고자 하는 뇌물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요하고 가증한 방종의 생활이 계속되기를 믿는 우상종교로 전락된 것을 아모스 선지자는 탄식한 것입니다. 아모스는 유대 왕 웃시야 왕과 이스라엘의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시대에 활약하였기에 당시 나라 사정은 번영하고 경제가 부흥 발전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내적 생활은 부패했고 왕실의 귀족과 일반 백성이 한 가지로 타락했습니다. 아모스는 왕실의 귀족과 상인과 일반 백성에게 책망했습니다. 암 5:10-13에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고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고 가난한 자를 발고 밀의 부당한 세금을 걷어 먹으며 뇌물을 먹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판결한다. 그러므로 이때가 악한 때”라고 했습니다. 암 8:5-6에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고 하였습니다. 암 8:10에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며 애통하듯 하게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모스는 사치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는 남편들과 술 취하기를 즐겨하는 여인들을 향하여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암 4:2에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고 책망했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책망했습니다. 사회정의 퇴폐는 동시에 종교적인 타락을 동반했습니다. 형식적 종교의식이 사회도덕의 부패를 초래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가 그 중심적 생명을 상실했을 때 형식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길갈의 성소는 아침마다 회생이 드려지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드렸습니다(암 4:4). 그러나 그 속에는 공의를 행함이 없고 종교적 의식은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 나가서 전당잡은 의복을 단 옆에 깔고 그 위에 누워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시는 등 성소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향락을 즐겼습니다(암 2:8). 이런 자들을 향해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암 5:21-24에 “내가 절기를 미워하며 너희 성회를 가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니라”고 외쳤습니다. 잠 14:34에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한 나라의 영광은 국토가 넓고 군대가 강하여 경제적으로 부요한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라에 의가 실현되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의 번영이 있다고 해도 인간이 소외되고 공의가 무시당하는 곳에 나라의 영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과 아모스가 불의한 세계를 향하여 목숨을 걸고 정의를 외친 까닭은 의가 없는 나라는 망한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불의 속에서 패망할 수밖에 없는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 구원시키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란 앞일을 말하는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불렀습니다. 소리란 말씀의 울림을 뜻하는데 말씀은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락하는 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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