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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에게 니느웨 파송 소명 (욘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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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에 대해서는 각종 여러 가지 이설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거북이와 토끼의 예화가 있듯이 어떤 진리를 보이기 위한 예화라는 자도 있는가 하면 또 실제 역사라고 강조하는 자도 있습니다. 우선 예화라고 하는 자의 주장을 들어 보면 요나를 삼킬만한 큰 물고기라면 고래를 들겠는데 고래의 목구멍은 정어리 오징어 정도 삼킬 수 있는 세소한 목구멍인데 어찌 사람을 삼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며 사람을 삼킬 수 있는 고기는 상어인데 어찌 따뜻한 지중해에 헤엄쳐 다녔을 리 없고 다시스에서 니느웨로 갈려면 오늘의 수에즈 운하가 없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서 가는데 어찌 3일 만에 상어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며 열대온대를 지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고 또 사람이 상어 배속에서 3일 3야 있으면서 고기 소화즙에 어찌 녹아 소화가 아니 되었겠느냐는 설들입니다. 그리고 니느웨 시에 역사상 요나서에 기록된 이 얘기는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역사적인 기적사의 하나로 믿고 있습니다. 요나는 왕하 14:25에 있는 요나라는 선지자와 동일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요나서와 왕하 14장에 기록된 요나의 아버지 이름(아밋대)이 같고 본서가 요나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서는 그 제재(題材)들이 역사적 또는 지리적 형편과 부합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유대 문헌 중 Tobit경도 본서의 요나의 말씀이 요나의 것이라 했고, 마카비서에서도 요나에 관계된 인물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요나의 사적을 역사적 사실로 아시고 관설하셨습니다(마 12:39-40, 16:4). 요나서가 기록된 시기는 늦게 잡아서 유대인들이 앗수르에 포로 되었던 때의 작품 또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후 시대의 작품이라고 전해집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지라 요나라는 말의 뜻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는 말씀은 요나가 외치는 말씀은 요나의 주관적 사상이 아니고 외래의 계시임을 밝혀줍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예언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요나의 이름 비둘기라는 뜻은 평화의 소식을 전한다는 뜻에서 요나 선지자와 그 백성에게 적당한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둘기 같이 슬피 울어야 합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아밋대입니다. 즉 나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진리의 아들이 되어야 하겠기에 그 이름도 좋은 뜻을 지녔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사람의 말은 바람에 불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이며 실제입니다. 요나는 이전부터 여호와의 말씀을 잘 알았고 그의 음성과 낯선 자의 음성을 잘 구별하였습니다. 이제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2.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니느웨는 고대 앗시리아 제국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였으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어서의 최고 최대의 도시로, 세계 최대의 고대 도시의 하나로, 앗수르 최후의 동방수도였습니다. 앗시리아어로 Ninua인데 BC 612년에 바벨론에게 함락되고 그 후 아주 폐허되고 현재 이라크 북부 티그리스강좌안 모슬대안에 유적을 남기고 있을 뿐입니다. 니느웨는 서양의 설형문자 발생지인 동시 BC 3,000년 전에 인류 문화발상지이기도 찬 곳입니다. 인류 최초의 법전이 나온 함므라비 법전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성읍의 역사로는 기원전 8세기에 사르곤 2세의 아들 산헤립에 의해 앗시리아의 수도가 되고, 그 후 제국의 최성기를 통하여 수도의 자리에 왕궁이 세워졌으며 그곳이 왕의 상주지가 되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니느웨는 황폐하여 황야같이 거칠어져 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습 2:13-15). 실지로 니느웨성 파멸은 철저하게 19세기 이르기까지 니느웨 성터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니느웨 폐허는 1842년 프랑스인 보따메에 의해 발굴 되었고, 영국인 레이야드에 의해 계속 되었습니다. 폐허는 코셀강에 의해 남북들로 갈라져 있고 북의 폐구는 쿠윤지크라 불리 우고 산헤립의 궁전과 앗슈르바니발의 궁전 및 많은 수의 점토판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발견되었습니다. 남의 폐구는 네비우누스라 불리워지고 전설에 요나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산헤립의 또 하나의 궁전이 있는데 에살론의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앗슈르바니팔의 도서관 발굴을 계속하는 중 랏삼에 의해 1853년 발견되었는데 이 도서관에서는 구약연구에 큰 빛을 던진 유명 한 바벨론 창조신화와 홍수신화의 점토판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임하여 니느웨 가서 “쳐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쳐서 외침”은 그 도시의 죄악을 공격함이니 그리해야 이 죄인들의 양심이 찔려서 회개하겠기 때문에 그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함은 그 죄악이 관용한 정도에 가까운 것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죄악이 많은 이방도시라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려고 선지자를 그곳에 보내셨습니다. 니느웨는 큰 도시로 둘레가 48마일 되는 큰 성읍이었고 권세나 영토 부에 있어서 큰 도시였으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가 결여되고 죄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은 놀랍고 엄청나고 강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고도로 높이 올라 극도의 높이에 올랐습니다. 악이 넘치고 찼습니다. 요나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 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치러 오시며 미리 선전을 포고하고 경보를 울리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크게 외치려 소리를 아끼지 말라” 요나는 한쪽 구석에서 그의 메세지를 중얼거려서도 안 되고 니느웨 거리에서 공포해야 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선지자를 통해 저 악한 성읍을 쳐서 하는 말을 들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빨리 가라, 용기와 결의를 가지고, 신속히 일어나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착수해야 합니다.

3.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 다시스는 베니게어로 “용광로”라는 말입니다. 서의 가장 끝의 땅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시스는 금속의 개발 가공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여기에 교역하는 큰 상선들이 취항했는데 취항 중 파선케 하는 동풍의 위력은 하나님의 진노의 세찬 형용으로 믿어 왔습니다. 선지자의 웅대한 미래상은 이 서구의 가장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이 파급되리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사 66:19). 다시스는 일반적으로 스페인의 남부 지브랄탈 가까운 타르데수즈로 동정(同定)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스와 교역한 연대는 솔로몬 왕이 페니키아 왕 히람의 협력을 얻어 선대를 조직하고 취항한 때부터 입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입니다. 여호와 낯을 피한다는 것은 생명을 버리고 땅 끝까지 도망갔다는 뜻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고 도피한 것은 일반 인생들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기 싫어하는 성질을 대표적으로 나타냅니다. 이런 성질은 요나처럼 낮아지며 멀어지며 환난을 당한 후에 시정되는 일이 많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서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려 드렸습니다. 그는 심부름을 가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몇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1) 인간은 자기의 신변만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인생인줄 압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충성할 것이 아니요 우리보다 먼저 순교 당했던 순교자들과 같이 하나님만을 중심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인간은 자기 권위만 세우고자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니느웨성에 갔습니다(4장). 니느웨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내릴 재앙을 거두었습니다. 이 때 요나는 하나님에게 항거하기를 40일 후면 니느웨는 죄로 말미암아 망하리라 외치게 하고서는 이제 와서는 그대로 하지 아니하면 내가 말한 것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면목이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하였던 것입니다. 회개하여 니느웨 사람들이 다시 살게 되었다는 기쁨보다 자기의 말대로 권위가 서지 아니하면 싫어했습니다. 권위만 세우는 하나님의 종들이 있는 곳은 다툼만 일어납니다. 요나서를 보는 가운데서 자기본위만을 중심으로 살던 우리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더 사랑하는 우리 자신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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