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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핍박받는 자의 복 (마 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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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은 산상보훈의 여덟번째 말씀으로 팔복 중 마지막인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팔복 중 처음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였는데 팔복 중 마지막 복도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축복입니다. 농부가 봄에 들에 나가 씨를 뿌린 후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들이듯이 믿음의 제 일보에 뿌렸던 천국을 마지막 인생을 결산할 때 역시 천국으로 축복을 거둔다는 의미입니다.

1.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의 성경적 의의 구약시대의 복이란 늘 육체적인 복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상태와 세상 육신적 성쇠상태는 항상 정비례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종교가 건전하고 솔로몬 성전에서의 제사를 성결되고 규례있게 드렸을 때 국가는 평안하고 민생은 안정되었으며 사방의 열국은 이스라엘 앞에 순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상태가 부패할 때 사회는 혼란하고 인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사방에서 적의 침범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육신적으로 핍박받는 것이 최대의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영적 상태와 육적 상태가 항상 반비례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는 육신적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학벌, 로마 시민권 소지자, 제사장의 배경, 산헤드린의 회원 등 육적 모든 자랑의 조건을 구비하여 세상에서의 생활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뵌 후부터는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리고(빌 3:8), 매를 맞고 복음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어 주리고 헐벗고 이스라엘 동족과 이방인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최고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축복은 주를 위하여 육의 핍박을 받는 것으로 주를 위해 받는 환난은 하늘나라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2.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 초대교회 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박해라면 AD 64-313의 네로 황제 때부터 미라노칙령 때까지 약 250년간입니다. 핍박을 받았던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로마인의 생활과 너무나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의 형상을 만드는 노동이나 작업에 그리스도인은 일체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이교도들이 지내는 제사에도 일체 참석치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도 종교가 다를 경우 성도들은 신앙문제에 대해 일체 양보가 없었습니다. 집에 믿는 자부가 시집오면 그 가정은 불화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와 모략, 중상도 있었습니다. 로마인은 우상을 새겨 보이는 신을 믿었으나 기독교 신관은 하나님을 신령과 영적인 존재로 우상처럼 형상을 만들지 않았기에 로마인들 눈에는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들처럼 보여진 것입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 하나만 있어도 그 가정은 불화하여 갈등이 일어나 파괴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마치 불처럼 로마 전 지역에 부흥 전도되니 로마 귀족들은 큰 걱정이 되었습니다. 교인들의 전도 열심에 감화받고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는 시민 노예들이 하루에 수만명씩 생겨나 그 수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기독교가 박해를 당하자 그들은 땅 속에 카타콤이라는 집회를 열어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날마다 성찬식을 베풀어 성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임을 확인하고 서로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 주고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이 로마 귀족들로 하여금 모략, 중상하여 캄캄한 땅 속에서 사람을 잡아먹고 그 살과 피를 먹는 무리라고 음모, 발설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의 황제에 대한 예배 거부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동은 유프라데에서 서는 영국까지, 북으로는 독일에서 남은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 판도권이었습니다. 이 방대한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 수난으로 황제를 신격화하여 정신적 지주로 삼으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에 순응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불복할 수밖에 없고 반역자로 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당한 핍박은 개인이나 가족이나 사회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참으로 처참하였습니다. 심한 고문과 불에 달군 쇠로 지짐을 당하고, 눈을 빼고 사지를 찔렸으며 사자밥이 되게 하고 화형, 십자가 형으로 죽이기도 하고 기름가마 속에 넣어 튀겨죽이기도 했으며, 가죽을 벗기고, 맷돌로 누르기도 하고, 얼음 속에 넣어 동사시키는 등등 참으로 그 처형은 입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했습니다. 그런 핍박의 결과로 세워진 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부패, 타락하여졌습니다. 종교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드높아지자 신교도들을 불란서에서 100,000명, 화란에서 18600명을 사형시켰고 영국에서는 277명의 신자를 화형시켰습니다. 한국의 대원군도 천주교인 삼만명을 학살했습니다. 태형을 가하기도 하고 두 다리를 묶어 굵은 통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어 비틀어 매고 목을 베어 죽이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그들 모두 고통 속에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지다”라고 한 말이 있는 것처럼 역대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고난을 영광의 관으로 혼연히 받은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과 핍박을 반드시 과거의 순교자의 시대에 국한하거나 육적인 고난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현재에도 있고 심적으로도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오히려 의를 위한 고통에 견디는 심적인 준비부터가 육적 고통을 견디는 기분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사실로 여기 강조되어 있는 것은 핍박을 받는 동기입니다. 아무런 고통이라 하여 모두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과실로 인하여 받는 핍박은 그 과실에 대한 보응으로 받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만이 복이 있다고 하였고 또한 “나를 위하여”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의를 위한다 함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말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여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당한 자로는 역대로 위대하였던 선지자와 사도로서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세례 요한, 스데반, 베드로, 바울 등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오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신약의 사도들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옥과 매와 죽음을 감수하였던 것입니다.

3.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의의 편에 서서 의를 위해 의로운 길을 걸으며 의를 위하는데 어찌하여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많이 합니다.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4:12-13,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를 시련하리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엔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핍박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핍박을 받으셨고 그는 고난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왜 아벨이 죽음을 당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셉, 다니엘 모두 외롭고 고결하게 밝은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환난을 받은 것입니다.

4.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을 기뻐하고 줄거워하라 11절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왜입니까?

(1) 위대한 선지자들의 후계자가 된 증거이므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 12절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이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가 사회에 어떤 해를 끼친 일도 없고 도덕적으로 결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결하고 청렴한 생활과 거룩한 신앙생활, 의로운 생활을 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면서까지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습니다. 하나님나라 건설이라면 고난과 능욕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을 당해도, 쓰라린 상처를 입어도 순교자의 반열에 든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1) 주님의 격려와 위로가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충성을 나타낼 기회가 됩니다. 3)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즐거움을 얻습니다. 4) 비록 작은 역할이지만 나도 주의 고난에 참여했다는 감격을 얻습니다. 5) 주님의 말씀과 같이 옛 예언자나 성자나 순교자가 걸어간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된 증거로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베드로는 순교할 때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스데반은 순교시 돌에 맞아 죽어갔으나 하나님 우편에 자기를 위해 서 계시는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유명한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은 황제 앞에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하여 기둥에 묶여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때 관원은 “한번만 주를 모른다고 하시면 사함받고 집에 돌아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으나 폴리갑은 “내가 86년간이나 그리스도를 섬겼지만 주님은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주를 배신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여 순교당했습니다. 핍박받는 자는 분명히 알찌니 고독하지 않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중상모략을 당하고, 버림을 받아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는 전혀 고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곁에 보다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핍박받을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3)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복은 천국복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천국복음으로 끝나는 과정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주님의 설교가 얼마나 천국적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의 걸음이 바르지 못한 것처럼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그 생활이 허무하고 방탕합니다. 그러나 천국을 소유한자의 생활은 분명하고 건실하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빛 가운데 사는 생활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즐거운 삶이요 세상에서 성공한 부요한 삶 속에서도 사명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롬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했습니다. 계 2:10,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복되도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이여 천국은 그대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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