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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용할 양식 (마 0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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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위한 세 가지 기도 끝에 사람을 위한 세 가지 기도의 제목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마 6:33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의 원리는 모든 구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철칙적인 순서라고 하겠습니다. 앞의 세 가지는 객관적인 기도였으나 다음에 나오는 세 가지 기도는 모두 “우리에게”라는 목적어가 따르는 기도입니다. 마 6:11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이 기도는 영적 양식 즉 신앙 유지를 위한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냐 또는 육적 양식이냐는데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는 것입니다. 제롬 같은 학자도 라틴어 볼켈 성서에 초물질적 양식이라고 번역하였고 11세기 70인역 사본에서는 “떡을 위하여 하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옵고”라고 하여 양자를 조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캘빈의 해석과 같이 이것을 “육신의 떡”으로 단정하고 싶습니다. 양식이라는 원어는 분명히 떡으로 되어 있습니다. 빵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과 서양인들은 매일 주식으로 빵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밥을 먹습니다. 여기 주님의 기도는 영의 양식, 주님은 생명의 떡이기에 매일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육신의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현실적인 뜻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옛날 헬라에 노스틱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신은 약하다”라는 철학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물질이라고 천대하며 고행을 교회에서 받아들여 금욕주의 사상이 교회의 신앙생활로 인정되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 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육신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요한복음 1장에 말씀하셨습니다. 그 육신의 몸으로 십자가에 고난 받으사 만민의 죄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지만 영혼의 영생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또한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리도 우리의 영육을 포함한 인격 전체가 구원을 얻을 날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육신을 이렇게 귀중히 여기신다고 하면 육신이 살아가는데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은 사람이 노력하면 얻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나 이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분들입니다. 제 2차적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 1차적 원인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햇빛, 비, 땅, 채소, 동물을 하나님께서 다 주시었고 곡식이 자랄 수 있게 하시고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육신의 필요한 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본문에 “오늘날”이라고 했습니다. 미래를 위한 양식인가 하는 의문을 없애기 위해 본문은 이를 지적하여 오늘날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기도는 오늘의 필요를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마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하신 예수께서는 떡의 필요성을 인정하신 것이며 신앙을 주시려고 병 자체를 고쳐주신(요 20:30-31) 사실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육의 양식을 귀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잠 30:8-9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일용할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라”고 구약의 지혜자도 양식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오늘의 기도는 매일 매일의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양식을 주십니다. 매년마다 해마다 새 곡식으로 추수토록 하십니다. 한꺼번에 10년 먹을 양식을 추수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남지도 않고 부족함도 없도록 양식을 주십니다. 매일 그 날 먹을 수 있을 만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입니다. 날마다의 만나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에게 간구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새 날을 주시고 새 양식을 주시고 매일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히 변치 않으십니다. 변치 않으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먼저 오늘의 양식을 위하여 구해야 합니다.

3. 일용할 양식이란 꼭 필요한 양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산해진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의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의복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도에 넘치며, 분에 넘치는 욕심을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저 일용할 양식을 구할 것입니다.

4. “우리에게” 주소서 “나에게 주소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소서”입니다. 개인 기도가 아닙니다. 사회적 기도입니다. 전 인류 속에 내가 속해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한 가족만의 번영이 아니라 전 국민이 잘 살아야겠고 한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다 잘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경은 전적으로 경제에 관한 책은 아닙니다만 경제에 관한 교훈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6장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만 아는 자는 부정한 사람이고 부익부, 빈익빈의 형편에 놓여 있는 오늘날, 저소득의 사람들에게도 많은 이익이 돌아가도록 역점을 두어야할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결코 자선이 아닙니다.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식물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분배가 잘못되어 굶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무엇을 달라 하면 언제나 주어라. 그 사람이 남의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 것을 달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5. 이 기도는 의무가 수반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공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시지만 씨뿌리고 거두어 들이는 추수의 수고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주고 땅을 주고 비를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우리에게 머리, 눈, 손, 발, 젊은 힘, 오곡백과를 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가꾸고 추수하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운반하는, 수고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입만 벌리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밥을 입까지 넣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수저를 들고 입에 넣고 밥을 씹는 수고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열심히 일하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며 내 민족이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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