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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함을 지킬 것 (마 0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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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 개들이라고 비유하신 것은 바리새인이라고 봅니다.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은 종교적 또는 혈통적 우월감 때문에 모든 이방인들을 개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 모양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유대인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지은 것은 장차 유대인이 모든 이방인을 노예로 부릴 때 유대인의 마음에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말하는 개는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 거룩하지 않은 유대인 즉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빌 3:2에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벧후 2:22에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들어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는 말이 사실 그들에게 들어 맞았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나 교회의 존엄성과 같은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고 교회는 사람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거룩함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진리나 하늘나라에 속한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개가 아무리 현명하다 해도 거룩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돼지가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돼지 목에 진주가 어울리겠습니까? 세상에는 아무리 사랑으로 보아도 개나 돼지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헤롯이 희롱삼아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자 했을 때 예수님은 거기에 일절 불응하셨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은 침묵으로 대하셨습니다. 이 태도가 바로 이 교훈의 실천이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미리 예언하시면서 몇 가지 주의를 주며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막 13:21-22에 “그 때에…… 거짓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적을 행한다고 모두가 참 선지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색은 마 24:5에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즉 모든 영광을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돌리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유다서 1:8 말씀에 꿈꾸는 자들로서 교회의 권위를 업신여깁니다. 육체를 더럽힙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방합니다. 진리는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우리가 필요할 때 꺼내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여러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은전 30냥에 스승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보관하지 못하고 개들에게 넘겨주고 돼지의 발에 밟히도록 내던진 그들의 말로는 처참했습니다. 옛날 일본에 다데 마사무네라고 하는 무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주 귀한 찻잔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든 도자기는 당시 한국에서 넘어오기 때문에 일본은 도자기가 보배처럼 귀했습니다. 어느날 이 무사는 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습니다. 전신이 오싹 했습니다. 그러나 순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백만의 군대를 눈 앞에 대할지라도 두려움을 모르는 내가 하찮은 찻잔 때문에 놀래서야 말이 되나 하고 그는 찻잔을 돌 위에 던져서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허황된 진리에 미혹되어 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찻잔에 얽매여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찻잔을 깨어버린 무사의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진리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내가 세상의 하찮은 것들을 귀하게 여긴데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이기적 자아, 이것을 저 멀리 던져 산산조각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리되신 예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롬 8:5-6에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육신과 영혼의 싸움판일뿐 아니라 성령과 악령의 싸움판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성령의 생각을 집어 넣으려고 하고 악령은 악령의 생각을 집어 넣으려고 다툼을 합니다. 비록 중생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일지라도 밖으로부터 악령이 침투하려고 계속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혼의 생각, 마귀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 이것 중 어느 편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적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도 우리의 의지적인 허락이 없이는 들어올 수 없고 악령도 우리가 의지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 3:20에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하셨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도 들어오실 수 있고 마귀도 들어올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생각을 받아 들이면 들어오는 것이요, 우리가 마음과 생각의 문을 닫고 있으면 못들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생각을 단호히 물리칠 것은 물리치고 받아들일 것은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이 때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무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여 마귀의 생각을 물리치고 거룩한 것을 지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아니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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