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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한 갈대 (마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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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강변에는 지금도 넓은 지역에 걸쳐 갈대밭이 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 목동들이 부는 피리가 이 갈대로 만들어졌고 갈대상자니 종이니 여러 가지 필수품들이 이 갈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 말씀한 갈대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 42장에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약에 말씀한 상한 갈대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비극 중에서 하나의 새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출애굽의 사건이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이 사건은 모세라는 인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요 중세기를 암흑 속에서 새 아침으로 이끌어 온 종교개혁도 마틴 루터라는 한 인물로 시작되었고, 16세기 영국의 타락한 사회에서 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그 사회가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된 것은 요한 웨슬리의 복음적 신앙운동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는 것은 상한 갈대처럼 약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도 그것을 꺾어 못 살게 만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약자를 도와주고 돌보는 것을 악이라 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길을 떠나 가다가 나이 많거나 병들어 자기 보행도 잘 못하는 사람을 보거든 그를 도와주려고 하지 말고 그를 밀어 넘어뜨려 이런 약자와 병자를 하루 속히 사회에서 없어지게 하라. 그래야만 우리가 사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상은 상한 갈대를 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란 어떤 특정한 사람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나약한 인생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내가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뜻입니다. 오늘날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한 가지 이유로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값을 너무 낮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이다, 사람의 지혜와 힘은 제한되었다. 사람은 만물의 때와 같은 존재이다’ 등의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값을 깎고 있음에 대하여 현대인은 지극히 싫어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말하기를 “사람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으니 만물 중에서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교사 펄벅 여사는 한국교회를 가리켜 한국교회는 살아있는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종교적 입장에서, 파스칼은 철학적으로, 펄벅은 사회적 입장에서 사람을 갈대에 비유한 의미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1. 갈대는 연약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갈대는 히브리어로 “쿠어나”라고 하는데 이는 “창”을 뜻합니다. 갈대로 창이나 화살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갈대는 곧게 자라서 4미터에 이르고 가정에서는 자로도 사용합니다. 갈대는 습지에서 자라며 요단강변에 많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변에서 많은 무리를 세례 주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나는 갈대냐?”고 하였습니다. 갈대란 약한 무리를 가리키는데 특별히 상한 갈대는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조금만 과로하면 피곤합니다. 질병, 노쇠합니다. 올림픽에서 손 기정이 세운 마라톤의 신기록을 깬 인간기관차 아베베는 새로운 신기록을 세운 후 얼마 안 되어 황금같이 귀한 그 다리가 마비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인간 중에 정신적으로 강한 자가 있다하나 이것도 상대적인 말이지, 절대적인 말은 아닙니다. 네로 폭군도 의지가 강한 것 같으나 실상은 의지가 약해 우울증이 심했다고 합니다. 네로는 그것을 해소키 위해 죄인을 불태워 사람의 기름을 땀에 횃불로 사용하는 등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자비한 폭군으로 변했습니다. 소크라테스, 키에르케고르 등 많은 철학자들이 모두 인간은 약한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매우 약해 범죄 하기 쉽습니다. 다윗 같은 성군도 범죄 하였고, 베드로 같은 수제자도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어거스틴과 칼빈도 말하기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입니다. 그러나 이 상하고 약한 갈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꺽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자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베드로를 제일 먼저 찾아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나약함 속에 그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할 대로 상한 어거스틴을 불러 회복시켜 오늘의 기독교 사상을 지배하는 위대한 신학자로 만든 것입니다. 진리의 붓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빈궁과 실패와 병과 슬픔과 죄에 상한 인간들을 불러서 죄를 사해주시고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에 귀한 일꾼을 삼는 것이 우리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2. 갈대의 긍정적인 면입니다 주님께서는 상한 잡초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상한 갈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대는 크게 자라납니다. 속이 비었습니다. 갈대는 약한 바람에도 쉽게 흔들려 연약하기 그지없는 식물입니다. 그러나 갈대는 약한 존재지만 무엇인가 희망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대 같은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고후 4:8-10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6:8-10에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며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를 교회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피의 거름위에 선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 기독교 역사는 수난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는 상했어도 갈대입니다.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는 갈대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의 원리를 발견하고 박학들이 모인 곳에서 한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나치스의 독재에서 독일인을 구원한 곳이 어디인가? 먼저 대학 교수에게 기대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독일의 지성인들은 쉽게 나치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다음에 신문기자들에게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독일 신문은 붓을 들어 나치스 만세를 불렸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항거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그곳은 평소에 무시당했던 교회였다. 교회만은 항거하며 수백 명의 목사가 감옥으로 가면서도 교회만은 진리와 자유를 사수했다. 나는 처음에 교회를 경멸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없는 존경으로 교회를 바라본다”고 외쳤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교회에 대하여 느낀 결론이었습니다.

3.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 교회,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시 51:17에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하였습니다. 상한 갈대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전적 무능을 느껴 아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용서를 비는 심령인 것입니다. 이런 상한심령을 주님은 꺾지 아니하시고 내어 버리지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원래 그 얼굴에 수염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선거유세를 할 때 어떤 소녀가 와서 하는 말이 “아저씨 같은 분의 얼굴은 수염을 기르면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과 관심을 얻을 수 있는 특색 있는 인자한 얼굴입니다. 그러므로 아저씨가 얼굴에 수염을 기르면 저는 아저씨께 투표해 드리겠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그 소녀의 말을 유심히 듣고 그 소녀의 청대로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소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는 링컨의 성실한 자세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카알라일의 분수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분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은 보통 분자를 높이고자 한다. 그러나 분모를 낮추는 것이 합당하다. 1도 0으로 나누면 무한이 된다.” 우리는 상한 갈대에서 우리 편의 바른 자세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서 주님을 향할 때,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과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상한 갈대를 언제나 꺾지 않으시고 환영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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