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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민망하신 마음 (마 15: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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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주님께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망이라는 원어의 뜻은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어떤 경우에 그렇게 창자가 끊어지듯 아프셨겠습니까? 1 . 무리들의 기근에 대하여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본문 32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파하는 무리를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듯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동시에 배고픈 그들을 뼈저리게 불쌍히 여 기셨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도 배고픈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국내에도 많고, 국제 적으로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민망히 여기는 마음도 없고 도와줄 능력도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6.25때 미국 교우들의 정성된 구호품을 받았습니다. 그 구호품으로 전쟁당한 우리들이 기근을 면하였고 교회가 재건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이런 일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민망히 여기시는 그 심정의 표현인 것입니다. 빌 2:5에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배고픈 자를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이 심히 그립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 배고픈 자를 대할 때 그 심정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해 하셨습니다. 기차를 타는데 어떤 거지가 차내에서 차례차례로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며 구걸하면서 옵니다. 나는 주머니에 그에게 줄 수 있는 부스러기 돈이 있는가 보았더니 없었습니다. 빈 호주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와서 손을 벌릴 때 나는 측은하고 미안한 생각에 가지고 있던 시내버스표 다섯 장 있는 것을 주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만족하다는 듯이 받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정성을 다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주님! 배고파하는 자에게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2. 불행한 불구자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 소경 둘이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경을 보신 주님은 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주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때는 문둥병 환자가 예수께 나와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아뢰었습니다. 주님은 이 문둥이를 민망히 여기사 그 손을 내밀어 더러운 살에 손을 대시며 “네가 깨끗하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시매 그 문둥이들이 곧 깨끗하여 졌습니다. 주님의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본받은 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다미엔 목사로서 안수를 받고 1873년 문둥이 수용소인 몰도카이 섬에 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그도 1884년 문둥병에 감염되어 문둥병자가 되었으며 문둥병에 걸려서도 문둥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다 188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일생 문둥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그들을 위해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다른 누구보다도 클 것입니다. 주여! 주님께서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나에게도 주옵소서.

3. 슬픔을 당하는 자를 민망히 여겼습니다(세상 사람이 당하는 죽 음의 슬픔) 어느 날 예수님께서 나인 성이라는 성에 들어갔습니다. 때마침 한 상여가 나오는데 과부의 외아들 상여라는 것입니다. 과부는 아들을 잃고 슬피 울며 따라 갑니다. 예수님은 불쌍하다는 말 한 마디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외아들을 잃은 그 어머니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 그 관에 손을 대었습니다. 상여 맨 자들이 멈추었습니다. 예수께서 서슴치 않고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그 청년이 일어나 앉고 서며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하였습니다(눅 7장). 슬퍼하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압니다. 남의 슬픔을 내 슬픔같이 민망히 여기는 자라야 절망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4. 배신한 반역자로 인하여 민망해 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였습니다. 원수들에게 은 삼십냥을 받고 예수를 팔아버린 반역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음모를 알고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며 탄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역자 가룟 유다까지도 사랑하시고 측은히 여겨서 민망해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보기 싫은 사람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위에서도 우리를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거룩하신 사랑의 마음이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크리스찬의 특징은 친구나 사랑하고 처자나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민망히 여기는 사랑에 있습니다.

5.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민중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주님 당시에 유대 나라 백성들은 정치적으로 독립과 자유를 잃고, 종교적으로 부패와 타락이 극심하여 목자 없는 양떼와 같았습니다. 털을 깎으며 젖을 짜는 목자는 있으되 신선한 꼴을 주며 밝은 시냇가로 인도하는 목자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무리들을 보시며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그 시대를 향하여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멸망할 예루살렘을 향하여 슬픈 눈물을 흘리셨으며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한 범죄 한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 고 돌려보냈습니다. 가정주부들이 댄스홀에 은밀히 다니고, 정욕에 빠지는 상류 계급의 가정들, 무지개 같은 권력을 두고 다투는 지식인, 깡패, 부랑자들, 행운을 점치는 무당 찾고 점쟁이를 찾는 무리들에게 주어진 인생의 바른 길이 어딥니까? 기로에 서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의 사회도 목자 없는 양떼와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올바로 가르치고 행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많은 이단자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으니 순진한 교인은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몰라 산으로, 들로 헤매이고 있습니다. 역시 목자 없는 양 떼들입니다. 진정으로 오늘날 교인들을 민망히 여기며 사랑할 줄 아는 목회자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양 떼에게 바른 꼴을 먹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참된 목자를 만나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삯꾼 독자가 아닌 참 목자를 만나 영육 간에 강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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