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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몬의 장모 (막 0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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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들렸다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침을 받았다는 기사는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 차이를 비교해 보면,

(1)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방법을 살펴보면 마태복음은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갔다고 했고 마가복음은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니 병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2) 장모가 병에서 나은 후의 수종드는 장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은 “그가 병 나은 후 일어서서 예수께 수종들더라”고 했고 마가, 누가복음에는 “저희에게 수종들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장모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열병이 떠났다는 것이며, 고침 받은 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수종들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종류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4복음서에 보면 그는 능하신 의사로서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혈루증, 소경, 문둥이,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폐병, 귀신들린 자 등 각종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그 어디든지 사람들로써 그 장소가 메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살펴보면 길을 가셔도 사람들이 서로 밟힐 만큼 많았고 어느 집에 가더라도 용신할 틈이 없어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지붕을 뚫고 사람을 달라 내리는 비상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식사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에게 시달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으로는 그도 30세까지 목수 일을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산 기도를 통해서 권능을 받았다고도 보여 지지 않습니다. 의술을 배우고 의학을 배웠다고 보여 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슨 병이냐 고치셨고 사실 그의 옷자락을 만지기도 해도 병은 나음을 얻었다고 할 만큼 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의 병 고치심은 산 기도하여 은혜를 받아서 병 고치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고통을 심상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초인간적인 사랑이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병고침은 의학적인 행위가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일치된 그 행동이 곧 병자를 고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논할 바 아니지만 그 사랑이 우리와 연관되었고 그 사랑의 결과가 사람의 편에서는 기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병 고치시는 능력은 무한대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지닌 사랑(엡 3:19)에서 온 것입니다. 육체의 병으로 신음하는 인간을 향한 그의 지극한 사랑이 항상 그 괴로워하는 인간의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마 9장에 보면 한 백부장이 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 했을 때 예수님은 몹시 괴로워하는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대답하기를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 약속에는 괴로워하는 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하심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을 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일도 그러한 구체적인 사랑의 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의도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열병 때문에 순간순간 괴로워 못 견디어 신음하는 그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들어줄까 하는 자비와 긍휼의 행동 그것이 예수의 사랑이었고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곧 열병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앓아누워 있는 딱한 사정도 보시고 고통에 대한 관심과 주목 때문에 행한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관심이 없는 곳에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집안 뜰의 한 포기 화초도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계속될 때 그것이 자랄 대로 자라고 아름다워집니다. 집에서 기르는 한 마리 개도 주인의 관심 여하에 사랑스런 한 식구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행동은 관심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이 관심은 한 인간의 고통을 그 속에까지 들여다보신 사랑의 관심이었습니다. 괴로워하는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관심만 갖고 그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고통 중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 여자의 손을 만져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인정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행동 하나는 사람이 손을 만지며 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손을 맞붙잡고 얘기할 친구가 있고,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불행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마산 폐병 요양소에 위문 차 가볼 기회가 있어 일주일을 거기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보니 폐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은 그 병의 악질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가 창백하고 파리한 손을, 또 전염병균이 묻어 있는 그 손을 붙잡고 정을 가진 사람이 없어 고독 때문에 죽어 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손을 만져주는 사람이 있고 손을 맞붙잡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의 손을 만졌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손을 만지는 그 행동에서 한 걸음 더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잡아 일으켰습니다. 손을 만져줌으로써 병자는 고독에서 위로를 받고 그 인정에 넘쳐 흐뭇해졌고 정말 대신에 소망을 가지게 되고 고통 대신에 감사와 감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잡아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그 이상 더 그 병마에서 시몬의 장모를 맡겨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자리는 예수님의 손이 아니면 해결할 길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괴로워하는 인간성이 전적으로 예수님 손 안에 사로잡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킴으로 지금까지 괴로워한 인간은 그 괴로움에서 해방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삶을 감격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전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사랑의 감격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는 자신 없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신학 또한 가장 근본적인 중요 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손으로 잡아 일으켜 세워 주셨다는 감격이 체험된 후의 학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 앞에 부름 받아 직분 받은 사실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활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사랑에 대한 감격이 앞서고 그것이 동기가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아니하고는 못 견디는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사랑에 대한 감격이 없을 때 우리의 봉사는 남을 섬기기보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명령함에 흥미와 자랑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과 봉사의 순수성과 진실성은 그가 감격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이 감격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에 동참하고 그 괴로워하는 사람의 손을 만져주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선택받은 자들의 사명은 열병에 누워 신음하는 육체들과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사랑을 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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