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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찬미 (눅 01: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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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왜 마리아로 하여금 약혼자도 알지 못하게 한채 성자를 잉태하게 하셨을까? 또는 인간성을 무시하고 인도에 어긋나는 듯한 방법을 왜 사용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시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최대의 빈곤과 굴욕의 곤고를 당하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의 말로 표현하자면,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물을 분배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 뛰어들어 그들의 친구가 되어 고통을 같이 당하면서 그들의 내면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동시에 전체의 지위를 향상시킨다고 하는 방법입니다. 마리아의 성령잉태 또한 그 출발부터가 구주 예수께서 당하시는 굴욕을 대신 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법률적 위험, 세상적 굴욕을 각오해야 했던 것입니다.

1. 엘리사벳의 축복(39-45절) 엘리사벳은 45절에서 “주의 약속이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소리쳐 마리아를 진심으로 찬양하였습니다. 마리아에게는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이 허락된 것입니다. 이에 관련하여서 눅 11:27에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고 한 여인이 마리아를 부러워했습니다. 41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천사로부터 수태 통고를 받은 후 마리아는 산에서 수양 중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던 것입니다.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얼마 동안 조용한 곳에서 고요한 시간을 갖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문안을 듣는 순간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태아가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뻐할 이유가 되겠습니까? 마리아의 방문이 반가와서 입니까? 그의 문안 소리에 놀라서입니까? 아닙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메시야의 방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설교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청중으로 하여금 기뻐서 뛰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는 설교자가 먼저 주님을 모셨을 때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빈 말만 가지고는 청중에게 아무런 은혜도 줄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잉태한 설교자는 설교를 자신의 독백으로만 끝나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었다고 해서 온 세상의 태아가 다 기뻐 뛰는 것은 아닙니다. 유독 엘리사벳의 태아만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세례 요한이요, 하나님 앞에 먼저 보냄을 받은 사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청중도 그리스도가 보내신 설교가가 설교를 한다고 해도 세례 요한이 내 안에 있어야 그 설교가 기쁨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주님께서 설교하신다고 해도 청중 속에 세례 요한이 잉태되지 아니했다면 지루함과 시간 낭비만 가져오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받으려는 자는 있으나 옳게 전해주는 자가 없거나, 주려는 자는 있으나 바로 받는 자가 없는 것은 둘다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마리아의 찬송 (46-56절) 46-47절에서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하며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삼상 2:1에서도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에서 “내 마음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란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송도 한나의 찬송과 비슷하지만 그 마음은 훨씬 깊습니다. “내 마음이 구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48걸에서는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도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송과 감사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그녀가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녀를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그녀 외에도 많은 부녀자가 있었고, 궁전에는 화려한 미녀도 많이 있었고, 성서에 정통한 자와 랍비의 가정에서 자란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목수의 아내이며, 지위도 없고, 재능과 학식도 그리 깊지 못한 그녀를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입니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하는 점입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겸손에 있습니다. 후세 미술가들이 마리아의 아름다운 상을 조각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은 실은 마리아의 아름다움은 외형이 아닌 내적 미, 즉 정숙하고 겸손하고 유화한 영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1-53절에서는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신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그 영광을 자기가 받고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주의 사자가 쳐서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또한 역대하 26장에서 웃시야 왕은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하는 일인 분향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람된 일이어서 아사랴 제사장이 충고를 하자 웃시아 왕은 진노하여 그 즉시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5장에서도 바벨론 왕 벨사살은 교만하여 예루살렘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시다가 벽에 글자가 나타나서「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선고를 받아 그날 밤에 벨사살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시 18:27에서는 “주께서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잠 15:25에서도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고 하였고, “주린 자들을 배불리시고”라 하였으니 마리아는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다 성취시켜 주심을 찬미하며 하나님의 신실성을 찬미한 것입니다. 56절에서 보듯이 “석 달쯤 함께 있다가”라고 했으므로 엘리사벳이 잉태한지 9개월에서 해산 시기까지 같이 있다가 마리아는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갔고, 마리아가 떠난 후 엘리사벳은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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