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인성 과부의 자식을 살리심 (눅 07:11-17)

첨부 1


1. 나인성의 슬픈 날 나인성 문 밖에 장례식 행렬이 지나갑니다. 상여군의 만가 소리와 함께 그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고 묵묵히 북망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광경입니다.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은 사람은 외아들이었고, 그 어미는 과부였으며, 그 외아들은 젊은 청년으로서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100세 천수를 다하고 죽어도 인간의 죽음은 슬픔을 주는데, 꽃봉오리가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갔으니 사회와 국가에 슬픔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과부는 이제 독자가 죽었으니 앞으로 누굴 믿고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목놓아 통곡하는 과부 어머니의 울음은 산천을 울렸습니다. 죽은 아들을 상여에 실어 떠메고 나인성 문 밖을 나와 공동묘지로 향해 가는 이 과부는 서러움에 흐느끼며 염치도, 체면도,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여채를 부여잡고 끌려 가면서 자식의 죽음 앞에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이 광경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부드러우며 사랑스러운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어버린 과부의 심정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심령이 죄로 말미암아 마비되고 송장이 되어 저 북망산을 향하여 가고 있음을 생각하여 울어보자는 말입니다. 이 안타까운 몸부림과 울부짖음을 통하여서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울지 말라”고 하시는 위로를 들을 줄로 믿습니다. 상여는 멈추었습니다. 북망산으로 가는 “죽어버린” 송장을 향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다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이 과부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요, 또는 나인성의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원합니다. 이 나인성 과부의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며, 온 교회의 기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닥이 났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살아 있어야 할 것이 죽었단 말입니다. 싸늘해진 지 이미 오래이고, 이제는 싸늘의 과징을 넘어서서 손도 댈 수 없이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썩고 구역질나는 송장 냄새가 납니다. 인간의 힘을 쓰기에는 이미 때가 지났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들은 그 울타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울타리 밖에서 까지 마구 썩은 냄새가 풍기어 오가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으니 무슨 방법으로 그 썩은 송장의 냄새를 처리한다는 말입니까? 오늘의 한국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이 모두 그러합니다. 이 슬픈 초상의 판국에서 잠간 발을 멈추고 누가 죽었는가를 생각하며 자신들의 할 일에 주의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초상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상주나 조객들의 우는 모습입니다. 정말 가슴이 끓어 오르듯이 슬피우는 사람도 볼 수 있으나 형식적으로 우는 자도 많습니다. 대개 딸이 없는 집은 울음소리가 작고, 딸이 있는 집은 곡소리가 너무도 처량해서 초상집 같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초상이 나면 품삯을 주고 사람을 사다가 울게 합니다. 직업적으로 초상집만 찾아 다니면서 울어주고 일당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울게 되어 울음소리가 큽니다. 이런 울음이 무슨 소용있는 울음이겠습니까? 오늘의 실정을 보면 형식적인, 마음 없는 일꾼의 울음이 교회나 사회 정치계에 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찬송을 부르고, 생명이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집회도 아무 뜻 없이 지나가 버립니다. 그냥 모였다가 흩어지고 왁자지껄하기만 하는 부흥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식적으로 우는 경우가 아닙니까? 이번 기회야말로 참 울음이 터져나오는 나인성 과부의 애통하는 울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우리는 나인성 과부처럼 내 육신, 내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지옥의 길로, 북망산의 공동묘지로 가고 있지나 않은지를 생각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슬퍼하며 뒹굴어 봅시다. 우리에게 가슴을 치는 회개와 아픔이 있을 때 주님은 비로소 걸음을 멈추시고 가까이 오시사 슬피우는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며, 위로하여 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울지 말라” 하실 것이며, 그 다음에는 생명의 말씀을 들려 주실 것입니다. 회개하는 우리에게 부드럽고 생명있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올 줄로 믿습니다.

2. 어떻게 청년을 살렸습니까? 지금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주님께서 죽은 청년을 살리는 장면에 주의하십시다. 오늘날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많은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육자도, 타자도, 관리도 다 외칩니다. 이구동성으로 외칩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살렸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죽은 사람 한 사람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외치는 소리는 조상하는 위문객들의 애도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수양이나 도덕이나 윤리 등은 모두 결국은 죽은 청년을 위해 관의 뚜껑을 만드는 수고 뿐이었습니다. 소년 감화원, 소년원, 교도소, 모든 법들은 죽은 송장을 치우기 위해 상여를 준비하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청년아, 일어나라”고 외쳐도 헛수고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사하고 도대체 우리 인간이 언제 조그만 벌레 한 마리라도 만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살려 본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나무 잎사귀 한 장이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만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인간의 인지가 극도로 발달해도 죽은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죽은 나인성 과부의 독자 청년을 살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본연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 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촉하기 전에는 결코 죽은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청년을 위해 이린 나오라고 외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접촉하지 아니하면 결코 생명이 다시 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청년을 살리는 길은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새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접근하도록 매어 놓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외치시는 “청년아, 일어나라”는 음성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3. 살아난 자의 역할 15절에 죽었던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누워서 썩은 무기력한 송장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살았으면 움직여야 합니다.「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할 말이 없는 자 같이, 할 말을 못하는 자 같이 비참한 삶은 없습니다. 16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간증이 나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죽음이 나인성을 온통 슬픔의 도시로 만들었으나, 죽었던 그 청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능력있는 새 사람으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인성을 기과 승리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다시 살아나서 온 성도와 온 교회에 기쁨을 줄 수 있는 축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내가 살면 내 영이 살고, 전체가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영이 죽고, 전체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나인성 청년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여러분들께도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청년기는 인생의 시발점이지 결코 종착점이 아닙니다. 청년은 인생의 비완성품이지 완성품이 결코 아닙니다. 나폴레옹은 젊은 청소년 시절에 세계 제일, 천하 제일을 목표로 부단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카리온, 프랜시스 자비엘도 청년 때 자기가 반드시 세계 일동의 학자가 되어 보겠다고 노력했습니다. 에디슨은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의 노력으로 된다”고 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청년은 귀합니다. 청년이 죽자 나인성 과부의 어머니는 슬퍼하였습니다. 나인성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청년의 죽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인아 울지 말라”, “청년아,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어 모두 깨어 일어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