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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최후의 일곱 마디 말씀 (눅 23: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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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사역하실 때 하셨던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과 의미를 던져줍니다. 그분의 말씀은 바로 그분의 인격이었고 삶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사역 중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그러나 정말 근본의 인격과 삶을 잘 알려 주는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채로 우리에게 던져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하신 말씀은 기껏해야 일곱 가지 정도였지만(이것을 우리는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그분이 사역하실 때 하신 수 많은 말씀에 못지 않습니다. 비록 일곱 가지의 말씀이지만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하셨던 수많은 말씀이 여기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이것은 기도입니다. 대속의 기도인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침을 뱉고 조롱하는 인간을 향해 하신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집약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권세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 높은 보좌를 포기하고 이 땅에 오시게 할만큼 어떤 공로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끊임없는 불순종과 타락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오직 그분 자신의 사랑의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즉 “우리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오신 것입니다.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안다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감격하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감격의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주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것인 동시에 개별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도 지금 십자가에 못박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관심두지 않는 바로 열의 강도를 향해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은 우리의 그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크고 화려하고 훌륭한 것을 보기 좋아하지만 그분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을 보시길 좋아합니다. 그분의 관심은 작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관심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강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관심두지 않는 작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여기 지금의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3. 여인이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주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자식을 잃고 몸부림치며 괴로와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 어머니를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일찌기 남편을 잃고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던 어머니였습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아들을 눈 앞에서 잃어야만 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보고 주님은 위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요 19:27에 기록되었듯이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불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부모를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이 말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버리셨나이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아니, 자신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주님은 고통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 중에는 고난을 그냥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경솔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경솔히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완전한 죽음이라 함은 영육간의 죽음입니다. 육적인 죽음을 위해서 설치된 것이지만, 주님은 이 십자가에서 영적인 죽음도 당하셨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육적인 고통에 비교도 안되는 큰 고통을 수반합니다. 주님이 받으신 이 엄청난 고난은 결국 주님으로 하여금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고백을 하게끔 이끌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고통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영과 육의 죽음을 주님께서는 자진해서 받으셨던 것입니다.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이것은 음식을 잡수시지 못하고 물을 마시지 못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고통을 마다 않고 인간을 위해 죽으셨건만 우리 인간은 계속하여 죄를 짓고 있음을 보시고 영적인 갈등을 느껴 “내가 목 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사람들을 향해 목마르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갈증을 풀어 드려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해서 주님의 갈증을 풀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6. 다 이루었다(요 19:30) 주님의 모든 사업을 이제 다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간은 주님이 완성하신 사업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죄 때문에 계속되는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단번에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눅 23:46) 이제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승리를 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평안을 느낍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소망을 봅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 돌에 맞아 죽었을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치고 이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할 때에는 스데반의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고백은 성도의 할 일을 라 이루었다는 표징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하나님이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하여 “나의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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