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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요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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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본문의 말씀은 금 년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시길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이 문제가 제일되는 문제인줄 압니다. 하 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외칠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것이며 소망도 없는 우리입니다. 세상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소망 중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외에 모든 것은 제 2차적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 3:16의 본문은 우리 믿는 자는 다 알고 외우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성경 66권 중 가장 핵심적인 요절이 되는 말씀입니다. 또한 기독교의 특색을 가장 잘 설명하여 줍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누구든지, 믿음, 영생의 일곱 개의 뜻은 깊은 어휘가 있습니다. 모두 무게있는 귀중한 말씀들입니다. 먼저 그 중 몇 개의 중요한 어휘를 생각하고 본문 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코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 하나님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란 권세있는 이름은 놀라운 이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성경 몇 곳을 보게 되면 행 17:28에는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 했고, 딤전 1:17에는 “만세의 왕 오직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며, 롬 11:36에는 “만물이 그에게서 나왔고 그에 의해 있고 그에게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만물이 존재의 기반이며, 만물의 기원이며, 만물을 유지하게 하고, 충만케 하고, 모든 존재의 근거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름이 성서에 여러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생각하기로 하고 하나님의 이름의 뜻만을 이 시간 생각코자 합니다. 하나님을 칭하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엘:옛날 고대 셈족들의 언어로 부른 하나님. 정복한 자, 명령자라는 뜻 엘로힘:강한 자, 강력한 자라는 뜻 엘샤다이:전능하신 이라는 뜻 엘 엘욘: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뜻 야웨 쳐바옷:권세자라는 뜻 야웨: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여호와 아돈:호격을 붙여서 아도니라고도 하는데 주라는 의미를 지님. 이것 이 신약에서는 큐리어스라고 쓰였음. 멜렉:만왕의 왕이라는 뜻 ......등 여러 명칭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 나님이란 이름들을 우리는 하나님이라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신 분이며,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으로 쓰여집니다. 이스라엘 의 유일하시고 지존하신 여러 이름과 통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 은 한국인의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복음 중 가장 큰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심판을 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 이름 그대로 전능하시고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권세자이자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 인종을 초월해서, 역사를 초월해서 그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나라에 따라 그 표현과 언어가 좀 다릅니다. 히브리 말로는 “아하 바하, 헤세드”이고, 헬라어로는 “에로스, 스톨게, 필리아, 아가페” 등이고, 불란서어로는 “아모레”이며, 독일어로는 “리베”라고 하고, 미·영에서는 “러브”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사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면 구약에서는 아하 바아와 헤세드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아하 바아”와 “아하 바하 헤세드”, “헤세드” 등의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아하 바하:인간의 감미로운 정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은 사사기 16장에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 할 때, 또 아가서 2장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하는 남녀 간의 사랑에서, 또한 아모스 5장의 “인간이 선을 사랑하고”라고 할 때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2) 헤세드: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인자,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 있습니다. 대상 16:41에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라”고 할 때에 사용된 단어로 대하 20:21, 사 54:8, 57:1 등에서 하나님의 인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아하 바하 헤세드:호세아 이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랑을 아 하 바하 헤세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하 바하 헤세드=아하 바하(인정 체취의 애)와 헤세드(하나님의 자비, 인자, 은혜)의 결합어로 인간의 체취가 있는 정과 하나님의 은혜를 합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칠십인역 성서에 하나님의 사랑을 아하 바하 헤세드의 “하”에 악센트를 넣어 아가파아 헤세드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 헬라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헤세드를 빼고 아가파아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에 와서 아가파아를 아가페라고 기록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신약에서 출현되는 사랑이란 단어는 헬라어에서 그 근원을 볼 수 있는 데 사랑이란 어휘에는 「에로스」-남녀 간의 정적인 체취의 사랑, 「필로 스」-친구 간의 우정의 정신적인 사랑, 「스톨게」-부모의 사랑, 아낌없 이 주는 인간 최고의 희생적 사랑, 「아가페」-하나님의 무한하신 거룩한 사랑, 이렇게 네 개로 원어에서 구분합니다.

(3)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저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국경을 초월하여, 인종을 초월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 나 황인종이나 교파를 초월하여 무식, 박식 관계없이, 계급, 남녀노소 관계 없이, 능력에 관계없이, 온 인류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 으리라는 복음의 대선언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하나님이 독생 자를 위해 보낼 만큼 사랑하는 자, 바로 그 사람을 말합니다. 즉 요 15:16의 “우리가 하나님을 택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말 씀에 기초를 두어 하나님이 택한 자를 말합니다.

(4)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즉 신앙의 문제입니다. 믿음이라는 원어 「피스테온」은 신실하다, 진실하다, 믿음직하다, 인정할 수 있다, 시인한 다, 알고 있다 등의 뜻을 가진 뜻깊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동 사 피스테오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을, 이 사실 을 인정하고, 깨닫고, 시인하고, 진실된 사실로 믿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처럼 율법의 행함도 구원에는 부족하고, 바리새파나 엣세네파처럼 금욕주의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데 미치지 못하고, 불교처럼 명상과 자각에도 주님의 구속의 사랑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믿음과 행함을 상대적인 구원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건물에도 천주교는 종탑을 두 개 높게 세웁니다. 믿음과 행위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신교는 개힉자들이 높이 부르짖던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교 건축양식도 종탑을 하나는 낮게, 하나는 높게 함도 오직 믿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예수에게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 하는 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는 길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2. 끝으로 본문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리만큼 믿는자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 리가 아는 사랑 가운데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 자식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도 독자를 이 우주보다. 세상보다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믿는 자를 위한 사랑은 독생자를 사랑하는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 독생자를 버리시고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셨을 정도의 깊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외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외아들을 버리 시면서도 애석히 여기지 않을 정도로 믿는 자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양자를 사랑하시되 독자를 희생시키기까지의 사랑으로 양 자인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한 마디로 생각해 버릴수도 없는 사랑입니다. 무한대한 하나님이 죄악에 빠진 우리를 무한대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나도 이 더러운 죄인으로서, 양자로서 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의로 여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 “흠이 없는 사랑”, “티가 없는 사랑”, “백옥과 같은 사랑”, “수정과 같은 사랑”, “의로운 사랑”, “참 사랑”, “변함 없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등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만 입이 있어도 다 표현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우리가 연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롬 5:8),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되었을 때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롬 5:10). 이처럼 하나님의 믿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은 아무리 하늘이 높다 해도, 땅이 낮다 해도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다 표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요 3:16의 본문은 한 자, 한 자 한 구절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무게가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한 자, 한 자 한 구절에 우주의 깊은 음파가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아리 소리가 있는 사랑입니다. 요 3:16은 1-15절까지의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이어서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중생의 대화의 계속으로 보아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15절까지로 그치고 본문은 사도 요한이 저자의 주해의 설교 중에 강조한 요한의 말씀이냐 하는 견해로 여러 학자들이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의 경우에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계속이라고 보고 사도 요한의 주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강조합니다. 본문이 사도 요한의 말씀인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은 그 자체로 매우 귀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내 몸을 다 불사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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