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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에서의 바울 (행 21: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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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 되어진 일들입니다. 바울의 수난 기사가 사도행전의 사분의 일이나 릅니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 마지막 수난 주간의 기사가 복음서의 약 사분의 일을 차지한 것과 비슷합니다.

1. 전도여행의 실적보고(17-181절) 예수님 당시에도 전도를 보내었던 칠십 문도들이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보고하기를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하였고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은 필연적 사실인즉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의 이름이 하늘에 기곡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야고보와 모든 장로들이 있는 곳에서 먼저 문안하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이방 가운데서 복음전도의 승리의 기록들을 낱낱이 다 고할 때에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 교회가 연보한 구제금도 전달했습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행12:17) 이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보고 내용은

(1) 유럽에 복음을 전파하는 중 회개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2) 빌립보와 고린도와 데살로니가와 에베소 등지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설립한 사실이며

(3) 예루살렘 본 교회를 위하여 많은 연보를 수금한 일과

(4)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한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감명필이 느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행적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고 사람 앞에 덕이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역사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엑 부끄러움이 없을 줄 압니다. 맹자 선생도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늘을 향하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 구부려 사람을 향하여 부끄러움이 없음이 가장 큰 낙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2. 바울을 의심하는 유대인들(20-23절) 이방 전도 보고와 구제금 전달로서 바울의 이방 전도가 하나님의 뜻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신자 중에는 바울의 이방 전도를 의심하는 사람이 수만명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크리스찬이지만 모세율법을 지키며 성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중에 과격한 자는 바울의 복음주의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바울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척하고 자식들에게 할례도 주지 말고 유대 사람의 풍습대로 살지도 말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을 전하였지만 유대인의 의식을 굳이 반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행 16:3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으며” 그러나 바울의 근본태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으니 할례는 각자의 신앙 자유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것을 유대인들은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3. 동행자들에게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바울이 율법을 굳이 반대했다는 것은 헛소문인줄 알지만 성전과 율법에 열심있는 유대인들이 어떤 일을 꾸밀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에 몇 가지를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나실인의 맹세를 한 네 사람을 데리고 와서 함께 성결예식을 행하고 그 비용을 바울이 담당하며 그들의 머리를 깎도록 하면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율법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23-24절). 장로들의 제안은 두 가지였습니다.

(1) 맹세한 네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는 것이요

(2) 그들의 비용을 대신 내는 것입니다. 결례의 기간은 삼십 일로서 그 시작과 끝이 머리를 깎고 그 기간에는 금욕적 생활을 하였습니다. 기간이 차면 예물을 바치는데 민6:13-20에 따라 번제물로는 일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는 일년 된 어린 암양, 화목제로 수양 하나와 그 외에 무교병을 바쳤으며 그 비용은 적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결례를 행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선배 감독 야고보의 부탁이요, 예루살렘 교회의 소원이므로 사도 바울은 이 제안에 찬성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 날 네 사람을 데리고 결례를 행한 후 성전에 들어왔고 결례 마치는 날짜를 제사장에게 보고했습니다. 결례 마치는 날 제사장은 예식 집행할 때 머리를 깎아 제단의 불에 던집니다(민6:13). 바울은 곧 모든 제안대로 실행하였으니 자신을 위함이 아니요, 이미 전한 복음이 훼방 받지 않기 위해 했던 것입니다. 장로들의 제안은 부당한 요구요, 여기에 바울이 타협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존 칼빈은 바울이 너무 쉽게 야고보의 타협책을 수락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이것을 찬성하며 “믿는 이방 사람에게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란을 삼가야 한다고 결의한 것을 써 보냈으니 그 밖의 의식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행자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고(16:3) 그는 겐 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아 서원한 일(18:18)도 있었습니다. 고전 9:20-21에서는 “나는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고 유대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유대인같이 행하여 유대인을 얻기 위해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같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계없다 하더라도 허용할 것과 허용치 못할 것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하는 줄 압니다. 사도 바울처럼 신앙에 위반하지 않는 한 포용력을 가지고 전체에 순응한 것도 교회 발전에 유익을 가져오므로 교회는 포용성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반면에 포용을 했다 하나 사도 바울은 결국 율법주의자에 의해 체포되었으니 포용이라고 다 신임할 수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고지를 먹음으로 누구를 실족케 한다면 고기라도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 구원의 신앙이 철저하지 못하면 바람에 불리는 갈대와 같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닙니다. 삼갈 것은 삼가고 주 안에서 진실한 신앙으로 믿음의 약한 자를 도와주며 넘어지는 자를 일으켜 주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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