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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모습 (롬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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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로마에 있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로마에 있던 교인들뿐만 아니고 고린도에 있던 교인들도 모두 성도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에서도 모든 교인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성도의 뜻이 무엇이며 성도가 되는 참 모습이 어떠한 것입니까? 여기 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거룩한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거룩한 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그 당시의 모든 믿는 사람들을 “거룩한 무리” 흑은 “성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무리가 거룩하게 변화했다는 말입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성도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당파를 일으켰으며 그들 중에는 7계를 범한 자도 있고 송사를 한 자도 있고 여러 가지 죄를 범한자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들 중에는 죄 많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성도라고 불렀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집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집을 이룬 돌이나 벽돌이 거룩한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른 집과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집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그 목적에 의지해서 사용하는 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성전이라 부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만민 중에서 우리를 따로 선택하여 거룩한 무리로 구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라고 불리웁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시고 그의 목적대로 우리를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믿는 무리를 성도라고 부릅니다‥‥천주교에서는 좀 다른 뜻에서 사용합니다. 즉 천주교에서는 옛부터 특수하게 국한해서 성도 또한 성자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신약의 사도들을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예로는 성 베드로, 성 바울, 성 마가 등을 들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교회사상의 유명한 교부들이나 유명한 순교자들을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예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폴리카르프스 둥을 들 수있습니다. 또한 교회사에서 보면 성품이나 생활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을 교황청에 심사하여 성자라는 칭호를 줍니다. 성 프랜시스, 캐더린 등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도는 그런 특수한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온전히 구원을 받은 사람은 다 성도, 성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앉은 모든 사람은 다 성도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Saind 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성도라고 부르는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이 귀한 성도의 이름을 받았으니 이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예수께서는 모든 오고 가는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 17:17). 또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권면이 나습니다. “거룩함을 쫓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어떤 경관이 거지 마을에 들어가 어떤 일을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만난 거지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제 이름은 金百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금 백억이 거지 마을에 사나” 했다 합니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그가 돈 잘 벌고 잘 살거라고 그런 좋은 이름을 지어 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지 마을에서 오두막집에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도라는 귀한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그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 세속도 라는 이름을 가지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길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천년에의 교회 역사를 통해서 성자, 성도의 생활이 무엇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성자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굴어서 자기 몸을 괴롭게 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의 깨끗함을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산 물고기는 큰 바닷물에서 살지만 짠물에 배지는 않습니다. 참 성도는 더러운 세속 속에서 살지만 더러운 물이 그 마음에 배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 5:3)고 말했습니다. 성도의 첫째 특징은 성결함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성결하고 그 입이 성결하고 그 뜻이 성결하고 그 행실이 성결하고 더러운 세상에 살지만 그 생활을 깨끗이 하는데 있습니다. 둘째 특징은 화평입니다. 화평을 구하는 생활은 성도에게서 현저히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성도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며, 어떠하든지 악을 선으로 이기려 합니다. 분한 마음이라도 그 마음을 참고 원한을 마음 가운데 오래 품지 않고 칠십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 주는 그 화평의 마음이 곧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슈바이쩌 박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본래 자라난 교회에 어떤 잘 믿는 교인이 한 분 계신데 이 분은 아주 귀가 먹어서 설교는 전혀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예배당에는 꼭 출석합니다. 한 번은 그에게 “당신은 설교를 한 마디도 듣지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예배당에 나오십니까?” 라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처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데 내가 비록 설교는 듣지 못하지만 성도들이 모이는 데 같이 가서 성도와 교제를 하여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마땅히 성도로써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신자는 성도의 교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성자들의 생활의 세째 특징은 무사(無私)한 봉사입니다. 즉 “내”가없는 봉사입니다. 말없는 봉사입니다. 왜 프랜시스를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병자를 도와 주고 문둥이를 치료해주며, 이기심이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문둥이만 사는 모로코 섬에 가서 일생을 바친 다미엔을 왜 성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봉사가 귀하지만 “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봉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향기로운 기름에 죽은 파리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르는 봉사, 내가 없는 봉사, 이것이 성도의 모습의 특별한 특징인 줄 압니다. 산간의 백합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아름답게 피고 그 향기는 온 골짜기에 채웁니다. 성도의 생활이 그러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든지 안보든지 아름답게 피고 그 향기를 온 골짜기에 채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든지 안 보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봉사하는 것이 성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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