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도의 교제 (롬 01:11-12)

첨부 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어찌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에서 너희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그는 “너희를 보기를 심히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다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간단없는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그것은 로마가 그의 그리운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요 거기에 사랑하는 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도 아니요 거기에 큰 행운이나 가까운 친구가 기다려서도 아닙니다. 그는 로마에 대해서 나그네이며 로마는 외국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로마는 이미 그리스도를 거절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생명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해할 수 없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써 “너희들”을 보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여기서 너희는 로마의 이름 높고, 지위 높은 왕후 재상이나 상류 지사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무명의 기독교인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와 누나,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떠한 가문에 속하고 어떠한 교양이 있고 어떤 인간성, 인격, 및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한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로마 전인구에 비하면 한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실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즉 “성도의 무리”입니다. 바울은 아직 보지도 못하고 육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적은 무명의 성도들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위대성 때문이 아니라 로마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섰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들 성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며, 바울은 이 사실에 감격했던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네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이것이 “너희들을 보기를 심히 원하는” 이유였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감사와 감격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강제 동원이나 의무는 아닙니다. 교회는 나와 너, 너와 내가 만나는 곳, 모이는 곳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누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스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가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도가 모이는 것은 신학이나 사상을 토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무엇을 얻으려 함이 아니라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령한 은사의 감격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은 신령한 은사의 감격을 같이 나누는 것뿐입니다. 거기는 주의 종, 귀천, 상하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는 권위와 복종, 심판과 저주가 없습니다. 만일 서로 충고한다고 하면, 주 안에서 두려워하는 종의 마음으로 “우리의 주가 있다”고 할 것이며, 피차 형제의 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주 안에서 가지는 종들의 사귐입니다. 대예배, 전도회, 청년회, 찬양회, 좌담회, 가정방문, 토론 등이 성도의 교제를 이룹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 찬양 예배, 삼일 기도회 모임에서 하는 것은 신령한 은사를 서로 같이 나누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주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그 은총과 업적에 대하여 그것을 공중 앞에서 기도, 간증, 행동, 설교, 찬양, 고백 등을 통해 그 은사외 감격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서로 신앙을 고백하고 주를 찬미하고 증거함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교제의 목적은 “오직 서로 믿음 안에서 피차 안위함을 얻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교제입니다. 그 교제의 거룩한 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교제, 거룩한 사랑은 없습니다. 거룩한 교제는 의인의 교제가 아니고 용서받은 죄인들이 믿음 안에서 서로 주께 고백하는 종의 교제입니다. 그 교제는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주님이 교제의 주인이 되고 명령자, 요구자, 심판자가 됩니다. 거룩한 교제는 주님께 위탁하는 교제입니다. 즉 믿음 안에서는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의 교제를 너무 걱정하고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맡길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의 궁극적 목적은 서로 안위함을 얻고자 합니다. 교제는 다만 침묵이 아니라 서로 말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제목이 있고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이 영적 동물 또는 인격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과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은 사랑의 표현이며 인격의 전달입니다. 우리가 하는 대화와 거기에서 오는 이해의 교통은 삶의 가치와 문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행복된 친구나 부부의 조건은 무엇보다도 대화의 제목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의 제목이 같다는 것은 그들의 관심이 같다는 것입니다. 서로 같은 관심을 가지고 삶을 사는 것은 가장 큰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교제 (특히 부부 사이의 )는 서로 관심이 다르고 같지 아니한 경우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신앙 안에서 서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과 하는 대화, 즉 하나님의 말씀엔 대한 인간이 “예”라고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성도의 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대화, 즉 신앙 안에서 들은 것 (말씀의 행동)을 서로 고백하고 중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들이 교회의 예배, 기도회, 전도회, 청년회 등 모든 모임에서 할 얘기의 제목과 관심은 정치적 얘기나 사업 얘기나 사회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크며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내가 어떻게 새 사람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소망을 가졌으며 허무를 이기고 명원한 생명의 기쁨을 가지고 삶을 이겨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령한 은사의 감격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신자는 모든 세상의 문제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과 염려, 회의와 불안의 세계에서 삽니다. 만일 그가 잠시라도 “말씀을 듣는 행동”과 “입으로 증거 하는 고백의 행동” 에서 떠나면, 즉 그 홀로 있게 되면, 그는 회의, 절망, 불안 등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성도가 이러한 교제의 행동을 떠날 때, 그의 신앙은 지속되지 못합니다. 신앙은 철두철미 개인적인 동시에 철두철미 사회적 현상입니다. 우리가 회의하는 나 자신의 세계에서 모든 회의를 쫓아내고 믿음을 견고케 하고 믿음의 확실성에 있으려고 하며, 고통, 불안, 절망, 염려, 속에서 위안과 격려를 가지고 순간순간 세상을 이겨 나가려고 한다면, 항상 서로 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증거 하는 이 믿음의 대화에서 살지 아니하면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의 세계가 곧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떠나서 ·즉, 성도의 교제를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길이 없으면 신앙은 있을 수도,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실로 성도들의 교통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즉 하나님의 나라가 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