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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의 표준 (롬 0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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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그 본질을 나타내게 된 것은 신약의 서신, 특별히 그 중에서도 바울의 서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로마서가 바울의 대표작인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롬 13:11-14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고뇌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어, 기독교 역사에, 아니 인류 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이미 우리가 생각한 롬 1:16-17에 나오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참뜻을 깨달음으로써 프로테스탄트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의 사상은 우리 기독교에 흐르고 있는 사상인 것입니다 이 로마서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심령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고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생각되는데 하나는 교리 편으로 1장-11장까지요, 또 하나는 실천 편으로 12 장에서 16 장까지입니다. 이 교리편도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다루고, 그 다음에는 이와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후자에서 의인의 교리가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는 성결의 교리와 영화의 교리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입니다. 죄는 이방인도 범했고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도 범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색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십니다.” 그러나 “오직 당을 짓고 진리를 쫓지 아니하고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와분으로 하십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심판의 표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특색은 공정성에 있습니다. 그의 심판은 편벽되거나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시비, 선악을 가려 벌하고 상줄 자는 상주십니다. 심판도 받지 않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예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부당한 판결을 받아 애매하게 고생하는 예도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일 푼의 착오 없이, 한 치의 여지없이 완전무결 공명정대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주어서 먼저 자기 자신의 심판을 받게 합니다. 짐승은 아무리 고등동물이라고 할지라도 양심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본능대로 삽니다. 배가 고플 때 먹을 것을 배가 부르도록 먹고, 자고 싶을 때 마음껏 자면 됩니다. 본능의 충동대로 살면 그만입니다. 짐승이 마음이 괴로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아무리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하고 집이 평안차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 해도 그 마음의 법인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는 마음의 평화가 있을 순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양심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고 하였는데 하고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두려운 생각이 나서 무화과나무 밑에 숨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랬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경우만은 아닙니다. 모든 범죄 한 사람은 다 하나님을 무서워합니다. 죄를 범하면 세상 법에 따라서 처벌을 받기 전에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책망합니다. 괴롭힙니다. 불안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은 잘 압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지만은 그 마음에는 평화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심의 심판 때문입니다. 어떤 신자는 하나님 앞에 으례히 상 받을 생각만 하지 심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형제를 정죄하고 흔자 예수 잘 믿는 척합니다. 불신자보다 더 악한 죄를 짓는 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죄를 알고도 죄를 짓습니다. 법을 알고 법을 어깁니다. 아브라함도, 범죄 했고 다윗도 범죄 한다며, 자기의 범죄를 합법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지 않는다. 이 죄는 용서해 주신다. 괜찮다” 고 하며 마음 놓고 범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요, 반역입니다. 도적질하는 죄보다 시기하는 죄가 더 중합니다. 간음하는 죄보다 모함하는 죄가 더 중합니다. 살인죄보다 교만 죄가 하나님 앞에 더 큰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책망했습니다. 이방인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정죄 비판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시행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의 대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도 심판받을 대상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게 된 것, 남보다 먼저 믿는 것, 교회 직분 맡은 것, 그것으로 심판관이나 된 것처럼 행세해서는 안 됩니다. 잘했다. 못했다. 맞다. 틀렸다,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의 표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이 행한 대로 그대로 심판할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원리요, 원칙입니다.

(2) 심판은 개별적입니다.

(3) 심판은 유대인이라고 우대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라고 가혹한 심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라고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이라고 특별 재판에 회부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유무, 상급의 유무, 형벌의 다과에 대한 판정이 하나님의 입에서 떨어지기까지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합니다. 동일한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심판은 행한 대로 주어집니다. 일기장을 넘기듯이 영사필름이 돌아가듯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방인 불신자가 양심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해서 예수 믿지 않고 자기 양심대로만 살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선행의 표준에 도달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율법대로 살 수도 없고 양심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율법은 기준이요, 양심은 표준일 뿐입니다. 만인류는 일단 하나님 앞에 유죄선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제의 길을 주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

(2)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 세상에서 긍휼을 베푼 자는 구제됩니다. 마 5:7 에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 2:13에서는 “긍휼히 여기지 않은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긍휼의 덕을 쌓아야 합니다. 자기는 아예 심판대 앞에 서지 않을 자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심판주로 군림하는 자세로 되어도 안 되며 무죄판결 받은 자처럼 내서도 안 됩니다. 어제의 과오와 실수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재림하tu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 모두 긍휼 있는 심판대에 나아가 “너는 무죄하다,” “너는 의롭다” 함을 받아 영광스런 어린양의 흔인 잔치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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