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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받아야 할 신앙 (롬 04: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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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지만 믿는 이들의 조상이라고도 합니다. 조상이란 육체의 근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규범의 근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모든 민족들은 그들의 체구가 자기들의 조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언어며 풍습이며 종교며 모든 문화가 그들 조상의 것을 이어가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조상이란 그 후손의 본보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는 말에는 아브라함이 우리 본보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실로 인류 역사에 길이 빛나는 등대와 같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세 가지로 간추려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찌기 하란에 우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에 가면 큰 축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기에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첫째, 목적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둘째, 축복의 내용이 너무 거창하여 실현성이 희박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1)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고

(2)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실 것이요

(3) 열국에 대하여 복의 근원에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때까지 혈육 없는 그가 언제 아이를 많이 낳으며 큰 민족을 이루고, 권력에 취미조차 없는 그가 언제 큰 권좌에 앉아 부귀를 누리며 그 이름이 창대해지겠습니까? 너무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약속이어서 감히 바라볼 수 조차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용감히 하란을 떠났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사실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란다면 무엇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고 나가야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이 위대하고 본받고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 믿을 수 없는 중에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년 후 득남하리라는 희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반갑기야 이를데 없었지마는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있었습니다. 노령으로 인하여 그는 마른 나무와 같았고 그 아내 사라 나이도 89세의 노인으로 이미 태문이 닫혀 버린지 오래였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명년 이때 사라 몸에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했던 말을 옆방에서 듣고 사라가 웃었다고 했습니다. 기뻐서 입니까? 부끄러워서 입니까? 믿을 수가 없어서 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중에서 믿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이런 신앙을 본문 19, 20절에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에게서 예수님의 얘기를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믿으려 하지 않았으며, 도마는 다른 제자들로 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자기가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았으며, 니체는 목사인 자기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도 허황한 얘기라고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것만 믿는다면 그것이 무슨 신앙이겠습니까 ? 오늘 일부의 청년들 중에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성경에서 이것 저것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믿어지는 것이야 믿고 말고가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중에서 믿어야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을 수 없는 중에서 믿어야 신앙입니다.

3. 할 수 없는 일을 함 아브라함의 신앙은 헛되지 않아 1년 후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습니다. 웃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이름처럼 그 집안의 기쁨이요 소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귀히 여기고 기뻐한 것은 100세에 만득한 아들이라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이 아들로 말미암아 자기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인 일입니까? 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번제란 제물을 불태워 드리는 제사인데 하나님은 이삭을 양처럼 불태워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첫째, 사람을 번제로 드린다는 일은 비인도적이니 할 수 없는 일이며 둘째, 아비가 자식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인륜에 벗어나는 일이며 셋째, 약속으로 받은 외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파괴하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삭을 잡아 번제 드린다면 모르겠거니와 아비가 자식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행하였습니다. 실로 아브라함은 만대에 만민의 신앙의 조상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위대하기 이를데 없는 신앙입니다. 히 9:19에 보면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쟁각한다”고 했습니다. 돈키호테는 근거 없이 행동했기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돈키호테와 다릅니다. 그는 확실한 근거에 입각해서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을 겨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도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라는 주님의 탄식을 복음서에서 종종 듣습니다. 믿음이 적다는 말은 1) 하나님을 이 세상보다 더 작게 생각하는 믿음 2)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보다 훨씬 작게 생각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면 나는 아브라함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서 믿고 할 수 없는 중에서 행할 수 있는 믿음 있는 성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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