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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자 (롬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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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날 극도로 긴장된 대립과 악화된 반목의 중심지에 살고 있습니다. 두개의 세계가 맞부딪히고 두개의 당파가 격돌하고 두개의 주의와 사상이 대결하고 두개의 전위대가 결투하는 바로 이런 시대 이런 위치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대립은 국제문제나 정치문제나 사상문제에서만 아니라 우리들의 존재내부 마음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상대적인 세계로 선과 악의 대립은 영속적인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또한 우리는 나중에는 이 투쟁이 선의 승리로 결과 될 것이라는 점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개의 세계에서 어느 것이 선이냐 하는 문제는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선의 관념이 보호하여지는 것을 보고 니체는 힘이 큰 것이 선이요, 선은 승리하는 편의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칼 마르크스와히를러는 이 주장을 실천에 옮겨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급투쟁의 의식적 도발은 상대에게 치명적 타격과 아울러 자기 자체의 완전 파멸을 결과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의의 이름으로 들었던 보검도 곧이어 도살자의 칼이 되어버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1662년 청교도들을 싣고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향한 메이 플라우어 호가 미국에 상륙하자마자 곧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을 싣고 노예장사를 하는 배로 변하고 맙니다. 큐바의 32세 혁명 영응 카스트로가 “최후의 한 사람 원수까지 다 죽이기로, 이제 자비를 보이지 않기로 했다”고 한 말처럼 이 땅 사람은 적개심만 남았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살벌한 긴장 속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화목, 대립된 긴장과 반목의 근본적 어떤 정치적인 적절한 조절이나 조건적인 화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화목의 길을 바로 찾지 못하면 화목의 비결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그의 심판을 받지 못하고 자기의 참된 정체를 바로 찾지 못하면 동시에 자기 이웃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놓고 스스로의 삶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서 참된 화평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연약했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을 모두 인간이 악하다고 보시지 않으시고 인간이 연약해서 그렇다고 보신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은 누구를 의지하려 하며 의지 못하게 될 때 원망하게 됩니다. 나아가서는 원수로 삼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이 없는 자 자기의 주장이 부족하고 자신이 떳떳하지 못할 때 싸우려 합니다. 인간이 연약하여 공연히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를 저주하는 자리에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웃을 원수로 치부하고 우리의 형제와반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죄 됨을 숨기려고. 싸움을 거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죄악의 규탄을 피하려고 진리의 빛에 찾아 들어오지 않고 더 무서운 죄악의 소굴로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죄의 법을 만들어 가지고 진리의 법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포에 떠는 가인에게 네가 떳떳한 일을 하였으면 어디로 간다고 한들 누가 네 원수가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숲 속에 숨어 있는 아담에게 네가 떳떳하게 행했으면 왜 숲 속에 숨었느냐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멀리 떠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범죄 때문에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또 이웃까지도 원수를 만들어 반목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죄가 없이 떳떳하게 사는 자에겐 원수가 없습니다. 죄 없는 마음에는 모든 것이 화평하게 보입니다. 죄가 없는 마음에는 무서움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의 연약과 자기의 죄악에 기인된 스스로의 분노는 마침내 대상을 원수로 만들고야 만다는 사실을 본문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부족하고 경우가 막히고 죄를 범하였으면, 나중에는 완력과 폭력으로 정의와 진리를 대항하여 싸움을 건다는 것입니다. 이를 갈고 악을 쓰고 눈에 불을 켜서 스스로 끓어 번지는 이 모습,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악마의 형상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재정 러시아의 멸망을 앞두고 그 전제정치의 강압에 짓밟히는 서민 대중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적개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런 불화의 원인을 극복하고 화평과 화목을 이루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즉,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즉 조건도 시비도 경우도 따지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모든 범죄를 다 덮어 놓으시면서 스스로 그 범죄 값을 짊어지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의 사랑으로 화평의 보장을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혹의 살육의 역사를 보고 있고 거의 진리와 정의라는 이름 밑에 참상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정말 적극적인 극단의 세력에 긴장한 이때 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평화의 도가 우리의 이 사회에 설교되고 우리 스스로 화평의 사도가 되어 원수 된 자 속에서 화해자의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돌멩이에 돌멩이를 던지면 피차 부서지고 이지러집니다. 그러나 돌멩이를 물속에 던지면 물은 던진 그 돌멩이까지 받아들여 표면에는 아름다운 파문을 만들면서 안으로는 자기를 공격하러 들어온 돌멩이로 용적만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바다를 공격하여 승리한 장사가 없고 복수심에 불탄 영웅이 멸망하지 아니한 역사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바다 위에 던지운 한 돌멩이 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사랑 속에서 그의 사랑의 용적을 크게 하고 그의 사랑의 불변하는 일방적 행동으로써 반석 같은 화평의 확증을 삼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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