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민과 신앙 (롬 07:24)

첨부 1


24절에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 이 사망의 몸에서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유명한 탄식을 합니다. 인간 문화의 탑이 아무리 하늘을 찌르고 그 위용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문화는 결국은 밤이요 불안과 공포는 그 도수가 점점 더 높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인간들은 아들의 등록금을 못 대어서나 아버지 봉양을 제대로 못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존재의 암흑 속에 처하여 있음으로 불안과 공포에 싸여 떨고 울부짖고 있는 것이 아니rpt습니까?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말까지 유럽 북구 민족인 주우트족, 앵글로족 색슨족들이 오늘 영국의 동남부 지방을 점령하여 켄트, 서섹스, 웨섹스, 에섹스, 앵글리아, 노덤브리아, 머시아 등의 7왕국( Septarch)을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이 새로이 건설된 민족국가에 복음이 전파될 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들이 전하여 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를 말한다면 켄트 왕국의 왕녀가 노덤브리아 왕국의 에드윈 왕에게 출가할 때에 파울리누스라는 선교사가 따라가서 선교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교를 전하게 되자 그것이 자연히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윈 왕은 하루는 그 나라 가운데서 연로한 현인들을 모아서 이교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자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는 저녁 겨울밤입니다. 밖에서는 찬바람이 살을 에이듯이 붑니다. 그 밤에 한 마리 참새가 그회의 진안에 들어왔습니다. 따뜻한 방의 밝은 회의장에 잠시 머물다가 홀연히 다른 창문을 통해 어두운 밤에 나가버렸습니다. 이 때 한 노인이 일어나서 왕에게 말했습니다. “이 회의석상에 한 마리 참새가 어두운 밖에서 문을 통해 이곳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가 다른 창문을 향해 나간 것은 깊은 하나님의 뜻이 계신 줄 압니다. 인생도 꼭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이 세상에 오기 전에는 어떤 세상에 살았으며 사후 어떤 세계로 가는 것인가 모르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만약 이 새 종교가 이런 것에 대하여 확실히 말하여 준다면 이를 따라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을 때 왕과 모였던 모든 현인들은 즉시 파울리누스의 전도를 듣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로 일체 가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선교 사화를 들어볼 때 예나 이제나 다한 가지로 하나님을 등진 세상은 어두운 세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세상은 공허하며 흑암이 대지를 덮고 있는 어두움의 세상입니다. 불안과 공포의 공기에 사로잡혀 떨 수밖에 없는 캄캄한 밤인 것입니다. 현대 세계는 빛이 없는 세계로 고민하고 신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소, 빈부, 문명인, 야만인, 귀천의 구별 없이 다 고민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욱 본문의 고민은 영과 육의 갈등에서 오는 고민, 선과 악의 갈등에서 오는 고민, 하나님의 뜻과 세상 뜻의 갈등에서 오는 종교적 고민입니다. 이 고민은 대처여하에 따라 유익하게로 되고 손해도 되며, 행복도 되고, 불행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 고민을 저급한 감정으로 불평과 불만 그리고 조급한 발악으로 대처한다면 불행으로 마칠 것이며, 모든 일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을 절대 믿는 신앙으로 대처할 때 그 고민은 도리어 우리를 유익케 하며 행복케 합니다. 이 고민은

1. 죄에서 벗어나 선해지려는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세상을 선하게 지으셨고 또 사람을 선한 세상에 살수 있도록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가 에덴동산에 침입하여 사람으로 악을 행하게 하여 사람뿐 아니라 만물이 죄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사람의 골수까지 깎는 듯 아픔을 줍니다. 죄는 중압성이 있어서 인간 심령에 압력을 주어 질식케 하여 중압감으로 말미암아 고민에서 신음케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함으로 어떤 환경이나 어떤 조건에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고민 위에 고민을 낳게 합니다. 죄는 무수한 고민을 낳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죄에서 벗어나려는 고민과 노력 끝에 예수 그리스도로 그 길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체험하고 바울은 기의개가를 올렸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종달새가 새장 속에 갇혀 신음하다가 새장을 벗어나 하늘 높이 날아서 자유의 삶과 자유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받은 사람은 죄의 쓰라림과 중압감, 고민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기쁨의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무능을 벗어나 유능해지려는 고민이었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무능을 바울은 절규한 것입니다. 인간은 때때로 무소불능한 것같이 자기를 과시할 때가 있으나 육체적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죄균에 넘어지는 약자이며 정신적으로 환경과 이해에 따라 변질되는 약자입니다. 그리하여 물리쳐야 할 악이 성행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인간들의 불의와 죄악을 정복하는데 무능으로 악이 성하여 실패와 비극을 가져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악을 물리치려고 하되 자기의 무능을 고민하면서 악을 정복하여 죄를 대속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 입으로서만 악의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공자도 사미능(四未能) 즉, 사부(事父), 사군(事君), 사형(事兄)선시우(先施友)의 무능을 고민한 바 있습니다. 즉, 부친을 섬기고 왕을 섬기고 형을 섬기고 친구에게 먼저 베푸는 일에미치지 못함이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라도 수다한 성현들이 이 문제로 고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도 날로 악이 성하여 지옥을 이루어가며 선은 쇠하여 어두워 가는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력으로서는 구원의 무능을 고민하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아 감사하였습니다. 그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죄함이 사라졌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약 사무엘상을 보면 기운과 용맹을 과시하던 골리앗 대장도 만군의 여호와의 힘을 믿는 다윗 앞에서는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힘만 과시하는 자는 실패의 가능성이 많을 뿐더러 위험하나 자기의 무능을 고민하면서 전능자를 의지하는 자는 유능하여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우리는 어느 힘을 의지합니까?

3. 현실에서 보다 향상하려는 고민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하여 향상하려는 고민과 노력이 없는 자는 마치 예루살렘에서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의심 불신 낙심으로 내려가는 자입니다. 현실의 육신열락과 부귀권세에 만족하여 보다나은 삶을 향해 앞으로 전진, 향상하려는 고민과 노력이 없는 자는 장망성과 같은 세상에서 머뭇거리다가 망한 롯의 처와 같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지위, 권리, 부귀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영원한 세계로 향해 향상하고자 전심전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지금 인간의 물질문명과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하여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현대 물질문명, 기계문명만의 향상은 극히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진선미와 인격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향하는 거룩한 향상이 있어야 그것을 정상적인 발전관 향상이라 할 수 있고 그래야 복지세계도 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신앙은 독수리가 날개치며 하늘을 올라가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향상하려는 고민의 바람을 타고서 위로 향하여 신앙인격이 향상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순간에서 영원, 불완전에서 완전, 공간에서 무한의 세계에 도달하게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육적인 고민은 자신을 파괴하여 금생과 내생에서 슬피 우는 비참한 생의고민을 가져오나 하나님의 뜻에 속한 영적 고민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나 선의 삶이 되어 이 세상은 물론이고 다음 세대까지 향상하여 이 세상에서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위한 고민에서 영원히 빛나는 영광의 생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