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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과 은총 (롬 09: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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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대는 종교와 신앙의 시대가 아니고 과학과 이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존재한 것이 아니고 인간 두뇌의 공산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신론적 유물주의자들만이 아닙니다. 종교가 신학자들 중에서도 신의 죽음의 신학을 논하고 신의 부재를 내걸고 신의 무용을 절규하는 이런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학만능을 자랑하고 이성자율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천하고 인간이 무어라고 지껄여도 우주만상을 창조 지배하고 역사 전체를 홀로 주관한시는 하나님은 아무런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약 1:17) 영원 자존자이신지라(롬 3:14).인간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으시며 인간의 두뇌로 이해될 수도 없고 또 인간의 자식의 손으로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분인 것입니다. 그는 오직 믿음의 대상임으로 어떠한 인생의 지식으로 헤아릴 수 있는 논란의 대상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와 심오한 것은 측량할 수도 탐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롬 11:33).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으로 잘 이해되는 자, 속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자, 우리와 동격동양(同格同樣)의 존재여서 인간의 윤리적 전제와 근거에 의해서만 증명되고 변호를 받게 되는 존재라면 우리가 그로 만족하여 그를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까? 인간의 증명과 변호고 말미암아 겨우 그 존재를 나타내는 신이 참이겠습니까? “너희는 내가 더욱 같은 자인 줄 아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일러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외에 하나님 이외에의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변론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가 하시는 일이 아무리 불가해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절대적인 존재와 그의 전지전능, 그리고 그의 온전한 사랑만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고 나가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최선의 길임들 알게 됩니다. 본문에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는 이해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구약 말 1:2-3에 있는 말씀으로 본문은 그 인용구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같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데 특별히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야곱과 에서 두 사람을 순전히 인간적인 면에서만 비교해 보면 에서가 야곱보다는 훨씬 훌륭한 사람입니다. 성격으로 보면 야곱은 간사하고 거짓말 잘하고 지금 말로 말하면 일종의 사기꾼입니다. 형이 배고파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죽 한 그릇 주고 장자의 기업을 빼앗던 일이나 이삭이 말년에 에서에게 축복해 주려고 에서를 보고 산에 가서 짐승을 잡아 별미를 만들어 오면 먹고 축복해 주겠다고 하였을 때 에서가 산에 간 틈에 나이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외삼촌 집에서 20년간 머슴으로 있으며 간사한 사기적인 방법으로두 딸과 재산과 심지어 우상까지 빼앗은 것이 다 이를 증명해 줍니다. 가정적으로 벌지라도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각각 다릅니다. 그리하여 열한째 아들 요셉을 그 형들이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까지 일어났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가정환경으로 보나 개인성격으로 보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이어 믿음의 후예가 될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야곱에 비해서 진실하고 관용성 있는 충직한 사람입니다 그 동생 야곱이 자기에게 얼마나 못할 일을 했습니까? 야곱은 에서에게 있어서 그의 장자의 기업을 빼앗고 자기가 받을 축복까지 빼앗은, 말하자면 원수입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 올 때 마중 나가 그와 입을 맞추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적으로 봐도 진실하고 충직한 이런 에서를 미워하시고 간사하고 거짓말 잘하고 사기꾼 같은 야곱을 사랑하신 무엇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야곱이 에서보다 부족한 것이 있지만은 에서보다 나은 것이 꼭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입니다. 에서는 인간성은 좋지만은 신앙적으로는 부족합니다. 배가 좀 고프다고 해서 장자의 기업을 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인간성은 부족하지만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었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명을 내걸고 결사적으로 매어 달리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날이 밝아오니 천사가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대퇴골이 위골되면서도 놓지 않고 매어 달려 축복을 받고 말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격의 결함이나 말의 실수나 과거의 죄를 보신다면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들 외에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고귀한 성품이나 도덕 율법을 요구하시 아니하시고 야곱과 같이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에서와 같이 훌륭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신앙이 없으면 그것만 가지고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선택과 망각에도 온전히 자유이십니다. 신앙자를 택하시고 불 신앙자를 버리심도 자유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온전히 자유로운 의지에 대하여 인간의 경험적인 진리나 논리적인 근거를 하나님 앞에 내놓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 편에서 볼 때 모순이고 불합리 투성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속함을 얻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유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온전히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참으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본 원인은 우리의 의도와 원망이나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완전한 자유 그리고 그의 뜻 안에 있는 은혜 앞에 인간의 어떠한 논리와 항변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권한은 하나님의 자유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포도원 농부 비유(마 20:1-16)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각각 다른 시간에 부름을 받은 품꾼들에게 같은 삯을 주되 제일 나중 온 자로부터 주라고 한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원망을 품은 자에게 주인은 슬기롭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했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나중 온 이 사람들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 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3-15) 하심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에 있어 이스라엘에게는 앞길을 인도하는 광명이 되고 애굽에게는 앞길을 막는 암흑이 된 것과 같습니다(출 14:20). 또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한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됨이라” (고후 2:15-16)고 했습니다. 여기에 버림 받은 자의 저주가 있고 택함을 받은 자의 은총과 긍휼이 있습니다. 이 긍휼은 인간의 의지에 의한 요구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자유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어떤 이유라도 이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고 또한 하나님 편에선 이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누가 그렇지 않다 하였으며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에게 불의가 있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영원히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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