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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안의 친교 (고전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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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말씀을 했습니다. 헌금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관심이 많은 문제였습니다(갈 2:10, 고후 8:9, 롬 15:25, 행 24:17). 고대 세계에서는 형제애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헬라에서는 매라노이라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랑이 불행에 빠지거나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모여 그를 도와주기 위해 돈을 지출하며 무이자로 융자해 주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는 있는 자에게서 돈을 거두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가진 직분이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가 성공한 유대인들은 심부름꾼을 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을 위해 헌금과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금을 전해주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관대함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교도에 뒤지기를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한 헌금에는 몇 가지 의의가 있었습니다.

(1) 교회의 일치를 보여주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2) 기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을 가르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3) 사랑이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금이었습니다.

(4) 교제를 의미했습니다.

(5) 구제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1. 교회 간의 친교

(1) 신령한 은혜로 서로 보답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신령한 것을 공급받았고 예루살렘 교회가 여러 가지 물질의 궁핍을 당했을 때 도와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 줄 압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큰 흉년이 들어 큰 어려움을 당했는데 바울은 교회가 교회를 서로 돕는 성도의 친교와 사랑을 나눌 좋은 기회로 본 것입니다. 행 11장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의 기근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아가보에 의해서 알려진 바입니다. 이같은 마게도냐의 아가야 교회의 구제헌금은 로마지방 교회에도 자극을 주어 역시 헌금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재난은 교회 간에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은혜를 받기만 하던 이방 교회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 간에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형제의 기막힌 사정을 보고도 이를 도울 마음이 없고 말과 혀로만 사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주일성수와 십일조

(1) 주일성수 초대 교회에서는 벌써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새로운 안식일로 정하고 모이며 떡을 떼며 (행 20:7) 헌금했던 것입니다(행 16:2).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부활하신 날, 승천하신 날, 재림하는 날입니다. 주의 날에 재림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성수해야 합니다.

(2) 십일조 십일조는 하나님께 자신의 수입 중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니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월급받는 자는 받은 다음 주일에 십일조를 드림이 마땅합니다. 개인 사업하는 분은 십일조를 매주 드림이 마땅합니다.

(3) 감사헌금 우리는 매주 감사한 일을 생각하면서 감사헌금 한다면 평생 감사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헌금을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헌금이 곧 은혜받는 길입니다. 만일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하지 않으면 그 이상의 수입이 저지될 것입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면 바치는 것을 통하여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께 드려야 할 것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5-7절)

(1) 사도 바울의 계획 그는 자기의 여행계획을 상세히 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의 친교를 암시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지나가고 고린도에 머물며 하나님께서 고린도에 보내주기를 바란다는 등등의 표현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하고 못을 박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란 말은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의 뜻 약 4:13에 경영은 사람이 하나 역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함이 마땅하고 교만하거나 허탄한 자랑일랑 말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행 12장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던 무리들이 로데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또 지나쳐서 문풍지만 울어도 입신, 불이 떨어진다 야단입니다. 우리는 입을 너무 크게 벌려 작은 은혜를 씹지도 않고 삼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당히 입을 벌려야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주의 뜻을 모르고 야단해도 탈이고 주의 뜻이라고 우겨도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상당기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식을 구태여 논한다면 세 가지가 조화되어야 합니다. 1) 성경에 부합된 뜻 2) 환경에 조화되어 꼭 적합할 때 3) 성령의 내적 증거 이상의 어느 것 하나라도 결여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4. 박해에 대한 사도 바울의 태도

(1) 박해를 이미 각오한 바울이었습니다. 행 14:22에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박해받을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골 1:24에서는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고 강조했습니다. 롬 8:17-18에서도 바울은 장차 누릴 영광은 현세에서의 고난의 댓가라고 말하였습니다.

(2) 계속된 박해-벌써 박해와 순교를 각오했던 바울이기에 도처에서 일어나는 박해를 감당할 각오를 가졌던 것입니다. 죽음의 각오가 된 바울을 당할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그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었습니다(히 11:38).

(3)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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