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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의 하나님 (고후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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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로부터 7절까지에 위로라는 말이 10회나 쓰여 있으니 본문은 실로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로는 고해의 인생을 걷는 인간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친구나 가족의 위로가 없지 아니하나 그것도 때로는 도리어 슬픔과 근심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혹자는 술에서 위로를 구하여 술로 망하는 자가 있고, 혹자는 예술에서 위로를 찾으냐 근본적으로 위로가 되지를 않습니다. 참 위로란 피조 세계에서는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난한 전도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본문에 위로의 십대 문자를 기록하였나니 참 위로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전 4:1에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고 했습니다. 또한 시 69:20에서는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고 피조 세계에서는 참 위로자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참 위로자, 곧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후 1:3에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니 우리에게 얼마나 희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1. 위로 받을 자 하나님은 어떤 자를 위로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바로 죄에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에게 아버지의 위로가 풍족하였듯이, 또한 성전에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가슴치며 애통하는 세리에게 의의 위로가 만족 하였듯이 하나님은 애통하는 파에게 위로함을 주십니다. 주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애통하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던 여인에게 “네 죄를 사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위로하였으니 이는 죄인에게 임하는 참 위로가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예수께 나아오는 자는 속죄의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본문 4-5절에 환란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사실 위로는 평안한 자보다 환란 중에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샘물 곁에 사는 자는 샘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메마른 사막에 사는 사람은 남달리 샘물의 필요성을 느끼듯이 환란 중에 있는 자가 남달리 하나님의 위로가 더욱 필요함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환란 중에 받은 위로의 경험을 고후 7:4에서 “우리의 모든 환란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환란은 보통 환란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따라서 그의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만큼 심한 환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제서는 이 무서운 환란 가운데서도 바울에게 위로를 주셨던 것입니다.

2. 위로의 방법

(1) 시 23:4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양이 갈 길을 못 찾아 방황할 때 목자는 지팡이로 바른 길을 인도하며, 앙이 구덩이에 빠질 때에 목자는 구부러진 지팡이로 건져 내는 것입니다. 또한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도 순종치 않아 엉뚱한 길로 갈 때 목자는 막대기로 양을 때리는 것이요, 만일 사자나 곰, 이리가 쫓아오면 그 지팡이로 내쫓는 것입니다. 이 처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는 나의 안위요 위로입니다.

(2) 롬 15:4에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영국의 재상 글래드스턴이 임종할 때에 빌 3:21의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이 한 말씀에 위로받아 안심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찌 글래드스턴만 이 말씀에 위로를 받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이 성경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3) 행 9:31에 “성령의 위로로 복음이 전파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곧 신자의 위로입니다. 주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은 외롭지 않을 수 없었으나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저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했습니다. 신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엎디어 기도하고 일어날 때에는 보혜사 성령께서 위로를 주십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순교할 때에 그 얼굴이 천사같이 된 것은 성령의 위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 66:11에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 하였으니 얼마나 평안하겠습니까? 밖에 나가서 서러움을 겪는 어린이도 어머니 품에 안기어 젖을 빨며 위로를 받을 때는 모든 서러움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로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 위로의 효력 고후 1:6에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은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하였으니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는 힘을 줍니다. 살전 3:2-3에서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위로를 해야 합니다. 목사는 형제를 위로하고 형제는 목사를 위로함이 가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목사와 신자가 서로 위로함이 가합니다. 바울의 말씀이 “나는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하였으니 오늘의 목사는 과연 만물의 찌끼같이 천하지 않습니까? 20세기 문명 시대에 제일 천한 자가 기독교인이 아닙니까? 이런 세대에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접대하지 아니하면 누가 접대해 주겠습니까? 손을 잡고 서로 도와 함께 엎디어 갈구함이 가하거늘 서로 물고 찢으니 이 어찌 애석치 않겠습니까? 형제여! 나의 사랑하는 형제여! 과거는 어찌 되었는지 이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 중에 피차 서로 위로하기를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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