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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자 (히 0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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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신자들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을 필요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저자는 먼저 신앙의 철저치 못한 것을 지적하고 새로운 권면을 주면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들도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야겠습니다.

1. 보다 나은 면 9절에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서 이렇게 부르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지금까지는 엄격한 언사로 말했었지만 이제 사랑의 언사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사랑은 퍽 개인적인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11절에 “우리가 간절히 권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 상대방을 다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사랑하고 있는 개개인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 33:17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고 하였고, 사 45:3에서는 “하나님께서 고레스왕에게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개인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성구들입니다. 성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개인의 이름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가 큰 것에 놀랄 것입니다. 성서에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고 구약의 역대상하에 또한 왕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으며 창세기에는 아담의 후예들의 족보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도 역시 개인적인 관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젊은 과거시절에는 이런 것들을 빼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었으나 그러나 개인의 이름이 성서에 반영되어 있는 이유를 깨닫고 더 감화가 컸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란 단순한 물체, 추상적 존재, 동물학적 분류나 사상도 아니며 또한 맑스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는 대중의 한 작은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엄격한 말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람 개개인의 영혼을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시고자 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12절을 통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많은 선배들은 악전고투해서 모든 것을 이겨냈고 또 힘든 인생의 항해를 해서 무사히 영생의 포구로 돌아가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저자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의 표준을 누구에게 둘 것인가 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창 12:1-2에 “너희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였고 창 12:7에서는 “내가 이 땅을 아브라함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약속했으며 창 13:14의 “롯과 분리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발로 밟은 땅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한 약속, 그리고 창 15:1의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리라” 한 약속, 창 17:8의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가나안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고 한 약속, 창 17:15의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이라”고 한 약속을 아브라함은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믿고 실천에 옮기어 그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고 하나께서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믿어서 그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신앙과 축복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만일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들 앞에 있는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평화의 사람입니다. 롯과 분리할 때에도 기업지의 우선권을 롯에게 줍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로 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로 하리라 한 것은 아브라함의 축복받을 마음이요 축복받을 신앙입니다. 요단 들의 소돔과 고모라는 당시에 옥야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으나 아브라함이 발로 밟은 가나안은 거치른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는 거치른 땅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좋은 옥토로써 평화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기업으로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좋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면 거치른 땅이 변하여 옥토가 되고 하나님이 저주하시면 옥토가 거치른 땅으로 변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젖과 꿀이 흐르는 소돔성도 사해로 변하는 것이니 축복의 길은 어디 있습니까? 곧 주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 할 때에도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잡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사로 그 행위를 중지시키고 준비했던 짐승으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고 다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바라보고 나간 아브라함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우리의 약속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약속하여 주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하늘의 영원한 기업이 약속되어 있고 그것은 두 가지 사실로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참고 견딤으로 하나님께 약속된 축복을 받은 사실입니다. 아브라함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모든 정서가 우리와 같고 모든 감정이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과 좀 다른 것이 있다면 믿고 소망 중에 모든 환난과 고난을 참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고난을 참고 기다림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비결은 하나님을 믿고 그 소망 중에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화육하여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모두가 다 죄인의 생명을 위해서요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이니 우리는 그 말씀과 약속하신 바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하늘에 오르사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다시 와서 우리 성도를 영접하여 갈 것을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이것을 믿고 참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느니라”하신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립니다. 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진실로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요 소망이시니 농부가 늦은 비와 이른 비를 기다림과 같이 때를 찾아 주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니 곧 영원한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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