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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법궤 (히 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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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는 구약 교회의 핵심이요 예수의 성체의 그림자요 또한 예수교회의 표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법궤를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 왔습니다. 구약 성경을 잘 상고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제를 소중히 여기고 잘 받들어 올 때에는 개인이 평안하고 가정이 행복하고 나라가 부흥 발전되었습니다만 반대로 함부로 취급할 때에 개인이 어려움을 당하고 가정이 불행을 초래하고 나라가 원수의 침입을 받아 패망했던 것을 역사를 통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법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우리가 몸담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구원을 받으며 찬송을 하는 이 교회를 상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1. 법궤의 역사 히 4:16에 “속죄소가 있어 하나님이 임재하신 은혜의 보좌가 되심이니”라 했습니다. 땅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교회입니다. 법궤의 속죄소에서 대제사장의 속죄제를 받으시던 하나님은 교회에 임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제를 받으시니 교회는 속죄소요 법궤입니다. 출 25:32에 “하나님이 법궤 위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고 네게 이르노니”라고 하셨으니 법궤는 하나님을 교제하는 곳이요, 하나님이 말씀을 전달하시는 처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도 성령이 교통하는 법궤요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는 시온소입니다.

(1) 법궤의 안치 장소 법궤는 불교의 전당과 같이 깊은 산속, 따뜻한 양지쪽, 바람소리, 새 소리, 흘러가는 물소리만 들리는 그러한 한적한 곳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은둔주의, 도피주의, 금욕주의가 되어서 그렇지만 기독교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법궤는 바람이 불고 모래알이 날리고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그 황막한 광야에다가 성막을 쳐놓고 그 속에다 모십니다. 때로는 성막 장소를 옮기면서 촌락, 읍 등의 복판에다가 장막을 쳐놓고 법궤를 두기도 합니다. 그 장막 속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그 휘장 속에 있는 깊은 지성소에다 법궤를 안치해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독교는 금욕주의, 은둔주의, 안일주의가 아니고 죄악 세상에 뛰어 들어가서 소금의 직분, 빛의 직분, 가시밭 속에 백합화의 직분, 의로운 병기의 직분을 다하기 위하여 죄와 불의와 세상과 이단과 마귀와 더불어 싸워서 그 사회를 정화시키어 마지막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그 모든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고 가는 사명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교회 나오는 것을 나 혼자 은혜 받고 나 혼자만 구원을 얻는 것으로 자족해서 스스로 위로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웃과 더불어의 신앙입니다. 또한 법궤를 모시고 있는 교회에서 교인의 신앙고백은 뚜렷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마 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고백의 기초 위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추운 거울 날 어떤 시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 교회에서는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동안에 뜻밖에도 그 지방의 유지요, 그 지방에서 열렬히 불교를 믿는 한 어른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은 너무도 고마워 악수를 청하면서 “고맙습니다”라고 했더니만 그 사람은 무엇이 고마우냐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선생님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교회에 참석하셨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제 젊은 사람들도 선생님을 따라 많이 나오게 될 것이니 이보다 고마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분의 대답이 “누가 예수 믿는다 했습니까? 저 밖을 보십시오. 눈이 많이 와 깔렸습니다. 바람은 모질게 불고 절간에 가자니 멀고 밤길에 비탈길을 오르자니 미끄럽고 그러니 석가모니에게 가나 공자에게 가나 예수에게 가나 다 성자들이니 무슨 하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기독교 신앙은 석가나, 공자나, 예수를 같은 계류의 성자, 사람의 아들로 보는 관점을 거부합니다. 기독교는 신앙고백이 바로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죄악의 세상에서 노아의 방주 역할을 할뿐 아니라 구조선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하기를 “교회가 극장과 달리 왜 창문을 많이 다는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합니다. 그가 스스로 답하기를 “극장은 캄캄합니다. 음침합니다. 그러나 예배당은 밝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사명이 세상을 바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회가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거지요. 우리가 이 사회를 밝히 보고 사회가 어디가 잘못되고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으면 우리가 나아가서 그 욕구를 충당해 주는 것이 오늘 우리의 교회의 사명입니다.

(2) 법궤 재료 법궤는 가시나무로 만듭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값 비싼 감람나무, 잣나무, 백향나무, 종려나무, 소나무 등 이런 종의 나무로 만들었으리라고 보통 생각되겠지만 출애굽기 37장에 보면 싯림 가시나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싯림나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이스라엘 광야의 아카시아는 큰 나무가 겨우 2미터밖에 되지 않아 그 가지가 볼품이 없습니다. 못 생기고 흔해 빠진 이 가시나무로는 강대상이나 의자 등을 만들기가 어렵고 볼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상 아카시아는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이런 버린바 된 쓸모없는 나무를 가지고 법궤를 만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가난한 것들을 택하사 부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로 나약한 자를 들어 하나님께서 쓰시는 역사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초대교회를 형성하시고 이 복음을 세계에 반포하시고 영혼을 건지려고 할 때에 좋은 나무를 가지고 초대교회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희랍의 철학이나 로마의 정치가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초대교회를 형성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당시에 제일 못생기고, 제일 쓸모없고, 제일 흔해 빠진 천민들을 불러왔는데 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 세리로써 죄인 취급받는 마태, 다섯 남편을 가진 수가성의 음란한 여자, 교회를 핍박하고 교인을 살해한 사울, 이러한 아카시아 나무 같은 사람들을 불러서 초대교회를 세우고 이들이 성령의 불을 받으므로 이 가시나무로 적어도 하루에 3,000명 내지 5,000명의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신학을 정립시키기 위해서 쓰신 그릇은 어거스틴 같은 불량자를 택하여 교부가 되게 하셨으며 19세기 미국의 구두 수리공 무디를 택해서 근대 세계 선교의 역사를 장식케 하여 세계 부흥의 불을 붙이게 하였습니다. 이 처럼 하나님은 아카시아 같은 쓸모없는 나무도 귀히 쓰십니다.

(3) 법궤에 금을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법제는 아카시아 나무인 고로 아무 것으로나 칠했을 것 같으나 도리어 순금으로 안팎을 칠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시나무처럼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주의 종들에게 순금보다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안팎을 씻어서 발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금, 즉 믿음으로 여러분을 입히시는 역사가 있길 바랍니다.

(4) 법궤의 장물. 법궤에는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 두 돌비가 들어있습니다. 1) 썩지 않는 만나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얼마나 유식한 설교를 하는지 나 같은 무식한 사람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손자가 목사님 설교를 듣기 위해 할머니 다니시는 교회의 예배 시간에 참석해 보니 목사님께서 노트에 무엇인지 꽉 적어 오셔서 철학적, 문학적, 법학적, 예술적, 심리학적, 논리학적, 정치학적, 과학적, 무슨적, 적, 적, 적 설교를 하는지 그 젊은이도 무슨 말인지 설교를 잘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모두 잘못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국그릇에 깨, 소금, 고춧가루 등의 모든 양념은 다 들어있는데 건데기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설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강대상에는 강연회가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2)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것은 기독교의 부활을 말합니다. 공자는 중국 산등성 평창에 그 무덤이 있고 석가는 인도 살수서안에 무덤이 있고, 모하멧은 아라비아 맥카에 그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내가 예수를 믿어 세례 받아 옛 사람이 다 없어지고 새사람이 되어서 나의 인격과 생활이 전폭적으로 뒤집어지는 것도 내 생애의 부활인 것입니다. 전도는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목이 터지라고 설교만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믿는 사람이 거듭나서 그 가족에게, 이웃, 친구, 친척에게 그 생활로 감화를 끼치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의 현재의 신앙생활에서의 부활도 중요한 것입니다. 3) 돌비에 새긴 십계명 이것은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 권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법궤의 승리 여호수아 3장에 보면 여호수아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밟을 때 요단강이 갈라졌으며 여리고성 함락 시 법궤를 앞세우고 성을 돌매 여리고 성이 하나님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교회는 자연계를 정복할 위력이 있고 인간세계도 정복할 권능이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횡포 하는 말세가 비록 여리고성과 같이 견고하고 요새화되었다 할찌라도 교회를 섬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한다면 세상을 승리하고 정복하고도 남습니다. 세상 힘을 믿고 성령을 의지하지 못하는 금일의 교역자는 요단강에 들어 설 수 있는 용기가 없고 세상의 세력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권능 받지 못한 금일의 교인이 여리고 성을 향하여 나팔을 불지 못하나니 그 교회에는 결코 승리가 없는 것입니다.

3. 법궤의 화와 복

(1) 이기적으로 하지 맙시다. 사무엘상 4장에 이스라엘이 다년간 블레셋의 침략을 받아오던 중에 대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스라엘 진에서 최후의 결전을 꾀하여 실로에 있는 법궤를 가져다가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메고 가던 법궤를 빼앗겨서 법궤가 다른 우상 진각에 들어가고 만 사건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목이 부러져 즉사하고 이스라엘 천지는 곡성이 사무쳤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의 죄입니다. 이미 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영광은 벌써 떠났는데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법궤를 이용하려 해도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인위적으로 하지 맙시다. 사무엘하 6장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천도한 뒤에 바알레유다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기고자 하여 3만의 무리를 엄선하이 친히 데리고 갔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아들 아효가 수레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뛰니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붙들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니 웃사는 궤 곁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크게 두려워하여 법궤를 감히 옮기지 못하고 가드인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습니다. 법궤는 성별한 제사장의 어깨에 메는 것이어늘 수레에 실은 것이 위법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운전하되 성경의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수단으로, 세속의 방법으로 또는 이교적 풍습으로 운전하는 것은 법궤를 손수레에다 실은 이상의 위법입니다. 법궤는 택함을 받은 제사장이 메어 옮기는 것이어늘 소에게 끌게 하는 것은 불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체험이 없는 자가 교회를 담임하는 것은 짐승이 하나님의 법궤를 끄는 이상의 범죄입니다. 무지한 소가 뛸 때 법궤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중생하지 못한 일꾼들이 소처럼 싸워 작당 분쟁하매 하나님의 교회는 동요하게 되는 것이요 파멸하는 것입니다. “아비나답의 아들아 법궤 운행의 법이 이미 틀렸거늘 어깨에 메지 아니하고 네 손으로 능히 붙들겠느냐? 믿음이 없고 교만한 웃사여! 네가 비록 대왕 다윗에게서 큰 신임을 얻었다 하되 그것으로 법궤를 붙들겠느냐, 네 완력으로 능히 법궤를 붙들겠느냐? 소위 무슨 주의, 무슨 운동하면서 교회를 공격하는 자, 제 뜻대로 작당하는 자들은 웃사와 같이 될 것이니라 오! 법궤가 소 수레 위에서 요동하는 시대여.”

4. 법계를 모신 가정과 나라의 복 삼하 6:11에 “여호와의 법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법궤를 모시는 집에 이처럼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하는 자와 하나님의 교회를 정성으로 봉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오벧에돔의 가정이 복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왕은 다시 법궤를 옮길 믿음이 생겼습니다. 천하의 신앙의 부흥운동은 이처럼 한 가정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대상 15:14-15에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하여 몸을 성결케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법궤는 모세 이래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이전되었습니다. 3만의 예배자를 동반한 대왕 다윗의 어행과 이스라엘 전국의 권위로도 법궤를 옮길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여 능히 법궤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전국의 힘을 기울일찌라도 한 교회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이요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교회를 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궤를 왕도에 모셔 들인 이스라엘은 여호와 종교로 국가의 기초를 정하고 다윗 왕가는 태산반석에 안정하였으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오늘날 독일이 부흥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왕년에 수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교회 짓는데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다니다가 하여튼 공터만 있으면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그때 독일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고 하니 “대머리는 모자를 대머리에다 써라. 비스마르크가 예배당을 지을지 모르니 조심해라”고까지 할 만큼 교회 짓는데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바로 알려면 어디를 가야 하느냐 하면 북쪽 대서양 연안 메사츄세스 주 프리마우스에 가서 1620년 영국 청교도들이 제임스 국왕의 종교적 핍박 때문에 더 살 수 없어서 신앙의 자유, 예배의 순결을 위하여 정든 고향 산천을 다 버리고 성경책 하나만 들고 배를 타고 미국에 건너 와서 미국을 개척한 기록을 보면 압니다. 그것이 오늘의 미국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이처럼 강대한 것도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서 건설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잘 살려면 교회가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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