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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예법 (히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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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의 여러 가지 낡은 의식과 묵은 제도와 조직과 정체나 종파 같은 것을 고쳐 새롭게 하려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습과 세태는 구습을 벗지 못하고 구태로만 변모해 갔을 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만민의 심리와 심령에 획기적 변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변혁의 주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방법, 법례, 법식, 법리, 예의, 예법이 새로운 이념, 제도, 체제, 예법으로 고쳐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섬기는 예법을 주셨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백성들의 감사를 위하여 예물을 드리는 예법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백성들의 회개를 위하여 피를 드리는 예법들이었습니다. 이런 예법들은 장차 하나님께로 누구나 직접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옛 사람들로 하여금 그림자로 예시한 법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이런 외적인 예물로가 아니라 내적 양심으로 할 수 있을 때에는 없어질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옛 섬기는 법을 옛 사람들에게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비밀입니다. 이것은 변형, 변질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를 말한 것입니다. 사 40:28에 “옛적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새 것을 바라보며”라고 하였고 사 61:10에는 “구원의 속옷과 의의 겉옷을 입혀줌을 받는 자로서 새 인간이 되어 옛 생활에서 새 생활로 옮겨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서도 예수가 없었을 때 입었던 옷을 벗어 버렸다가 다시 찾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인습의 속옷과 가식의 겉옷 위에다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었으니 겉은 새로운 듯하나 속은 낡아 빠질대로 낡아서 구린 냄새를 피우므로 예수의 성스럽고 향기로운 냄새를 잡쳐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누구에게나 무엇이나 좋지 못한 냄새가 나는 것은 예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만 있다면 그에게 있는 물과 불이 못된 것을 당장에 없애 버리고 예수의 향기만을 발합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신 그의 구원의 속옷과 의의 겉옷을 입고 있다는 의식을 언제나 어디서나 가지고 있다면 이 새 옷 위에 다른 인간의 나쁜 옷을 결코 덧입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늘은 예, 혼, 상에 대한 의식 가운데 극히 통속적인 그곳에 버려야 할 것이 많음을 지적코자 합니다.

1. 예배드리는데 부당한 것 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있으려면 예배 순서에 의식의 나열보다 먼저 예배드리는 자의 몸이 침묵과 경건과 정숙과 정중한 태도로 속마음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갈망하고 감격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에게가 아니요,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하는 심신 내외를 성찰하여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는 태도와 자세는 너무나 불경합니다. 사람의 강연을 들으러 왔는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기도가 진행 중이면 문 밖이나 안에서 기다렸다가 끝나는 대로 자리를 찾아가 앉아야 하는데 기도가 끝나기 전에 버럭 버럭 기어 들어가는 것, 앉아서는 정중하여야 하는데 구경꾼 같은 기분으로 누구를 찾는지 이리저리 살피는 것, 찬송가를 부르기 전후나 기도가 끝나면 아무 소리가 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코 들여 마시는 소리, 코 푸는 소리, 가래 뱉는 소리로 뒤숭숭해지는 것, 예배 시작 전에는 묵상하면서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옆에 있는 이하고 인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몸을 흔드는 것, 딴 책을 읽는 것, 젖먹이 아이가 울든지 보채면 젖꼭지를 물리든지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와야 하는데 그냥 안고 달래는 것, 졸고 있는 것, 연보하는 자세 등 이런 묵은 냄새나는 버릇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아니하겠습니까? 우리는 혁신의 정신으로 분발하여야겠습니다. 예배를 주관하는 성직자는 새 대제사장 예수를 대신하는 것으로 새 지성소 성단에 혼자 올라가는 것이어야 하는데 기도 순이나 교우 소개를 위해 다른 사람을 올라가게 하는 것은 예법에 어그러지는 일이니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봉독, 기도는 대제사장이 모두 해야 할 일이요, 그 수고를 덜기 위해서 제사장 외의 사람을 하게 하지만 이것 역시 실상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따라서 성경봉독을 다른 사람에게 하게 하려면 미리 성경 절수를 읽게 할 것이요, 기도도 마찬가지로 미리 부탁해서 마음의 준비가 있게 해야 합니다. 벼락 부탁은 예법이 아니니 아예 감행할 마음조차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에 돈 얘기를 하는 것은 예배의 분위기를 망치는 일입니다. 딴 자리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왜 교회의 재정난을 예배 시에 들고 나와 걱정합니까? 또 목사 임직식과 장로 장립식은 정규 예배시간 외에 해야 합니다. 아침예배는 단식이 원칙이요 복식이나 혼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식후에 먹는 일(食)을 전폐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나서 중임의 책임을 느낀 나머지 완수를 기원하는 그 심경을 먹는 일로 혼란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약혼식과 결혼식에 대한 예법 약혼식은 약식 결혼식이 아닌가 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약혼식은 양편이 접근하는 기회요, 장차 부부로 영접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예약하는 시간인 만큼 서로 자리를 같이하여 주의 이름과 말씀으로 경건한 서약과 기원을 가정예배로 드려야 할 것이니 결혼식이 되지 않게 하기를 바랍니다. 결혼식은 배우(配偶)가 아닌 배우(俳優)가 혼례극을 합니다. 마치 아들 딸과 아주 이별해 버리는 송별 연주 같고 가장행렬 같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인이 이전 것과 이후의 것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성도라고 자처하는 청춘남녀가 혼례식을 하노라고 극성을 부리니 어이가 없고 가소로운 일입니다. 본래 첫 아담과 하와 부부는 아무 식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부부가 되어 생활을 하면서 이 부부가 하나님 말씀대로 아니 했음으로 생겨진 부끄러움을 가리우려고 의식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그 다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생 생활의 모든 부분에 의식이 아닌 것이 별로 없습니다. 확실히 지금은 안과 밖으로 잘못의 악이 있건만 사탄의 간교한 수단 방법으로 외면을 치레해서 옳게 보이려고 하는 세대입니다. 끝으로 한 두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화장과 예복에 대한 것입니다. 위에 말한 대로 기독교인은 의식이나 가장이 없어야 합니다. 여자는 복면의 너울을 쓰지 말고 그대로 약간의 화장을 한 채로 순수한 의상을 입을 것이요, 남자는 담백한 평복을 입되 장갑을 끼거나 꽃을 꽂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예식장은 반드시 교회라야 합니다. 예수 이름이 없는 예식장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상례에 대하여 기독교인으로써 상인(喪人)이 되었을 때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하렵니다. 예수 없는 사람처럼 대성통곡하지 말고 믿는 자의 태연자약한 것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예수 없는 사람들은 정말 통곡하는가하면 울음나지 아니할 것을 허식으로 가곡을 하기도 합니다. 진곡이건 가곡이건 두 말할 것 없이 저희들의 절망곡입니다. 예수 없이 아주 없어져 버렸으니 이 얼마나 큰 절망입니까?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이 소리를 내어 웁니까? 예수 없는 자들이 비웃을까봐 우는 것입니까?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우 통곡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하고 예수의 말씀을 확실히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 인정으로 소리 없는 슬픈 눈물방울쯤은 흘리면서라도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예수를 믿는 자의 예법입니다. 끝으로 한 두 가지만 더 말하고 그만 두려고 합니다. 왜 산 사람이 베로 상복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까? 베는 시체를 싸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산 사람들도 베를 두르고 있으니 이상합니다. 기독교인은 상복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은 검은 양복에, 여자들은 검은 치마 옷이나 흰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이 예법입니다. 상례를 치른 후 그 옷을 도로 입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는 사람이 이일장이나 사일장을 하지 못하고 꼭 삼일이나 오일장을 해야 하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풍속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을 때의 관례를 완전히 버리고 예수 성도의 관례를 따르기 바랍니다. 밤새워 우는 일이나 음식 차리는 것을 없애고 예배드린 후에 관 있는데서 자는 그런 구습을 초월한 혁신자의 예법입니다. 비석에는 한글로 정면에 “기독인 ○○○ 주 안에 잠드심”, 혹은 “믿던이 ○○○ 예수 안에 잠듬”, 혹은 “목사(장로, 집사, 권찰, 전도사, 권사) 000 주 안에 잠듬”, 혹은 “○○○ 아기예수 품에 안김”이라고 새기고 비석 후면에는 약력을 새기든지 유가족의 남녀 이름을 전부 새기고 비석 우편 측면에는 “××××년 00월 00일 왔음, ××××년 00월 00일 갔음”, 혹은 나심, 가심으로 해도 좋습니다. 비석 좌편의 측면에는 생시에 제일 좋아했던 것을 글로 새기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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