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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사는 사람 (히 1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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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같은 내용의 믿음입니다만 그 믿음을 이해하는 문화적 현상과 믿음을 따라 사는 각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농사를 지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신앙에 대한 해석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변하는 세대와 여러 차원의 문화적 현상 속에서 신앙의 의미를 계속 재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해마다 종교개혁 주일을 갖습니다. 이 날을 당하여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음미해 봅시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의 첫째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요 둘째는,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것이며 셋째는 만인 제사장설입니다. 첫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의를 부정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선행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고 다만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오직 성경에만 권위를 둔다는 것은 교권이나 어느 인간에다 권위를 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개혁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권위의 소재를 오직 성경에만 두고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그 말씀에만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도 오직 성서적이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재미있고 좋은 말로 설교를 했을지라도 성경 말씀에서 떠난 것이라면 그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정론을 주장했던 칼빈 선생님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시고 배워왔지만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이 이중의 예정론만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의심을 품고 있다가 칼빈 선생님이 임종하는 그 자리에서 이제라도 그 비합리적인 예정론을 취소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숨이 넘어 가시는 순간에 칼빈 선생님의 하시는 말씀이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합리적인 이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바로는 성경이 그같이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루터에게나 칼빈에게나 성서는 유일한 신앙의 근거였던 것입니다. 셋째로,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이 말은 인간이 중간적 입장에서 하나님께 중보의 역할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2,000년의 기독교사의 첫 교황 베드로를 비롯하여 존경할만한 많은 성자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 분들의 이름을 빌려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도 유일하신 모든 이의 중보자이신 것입니다. 이런 종교개혁의 정신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의 개념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만을 주장하고 행함을 부정하여 관념주의로 흐르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으로 믿고 실제 행동은 믿음에 미치지 못하여 이원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끔 합니다. 이런 신앙의 소유자는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인이 되고 교회 밖으로 나가면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적입니다. 둘째,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게 느끼어 무슨 다른 일로써 믿음에 보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하여 자기의 선행을 믿음과 병행시키려고 하는 것으로써 이것도 믿음의 적입니다. 인간은 믿음에서 떠나면 교만해지고 때로는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히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 즉 소망의 구체화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40년간 광야의 고생을 겪고 나서 꿈에도 잊지 못하던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약속하신 들에 섰으니 모든 것이 끝났으며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팔레스타인은 약속의 복지 땅이 아니라, 그 땅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하여 소망을 끈질기게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 소망의 결과로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소망을 다 이룬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아브라함이 얻은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했으며,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며 죽은 자도 살리시며 풍랑도 잔잔하게 하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을 감사하다는 것으로 그친다면 예수님은 좋은 의사로만 인식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 이상입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는 것은 신령한 눈을 뜨게 하는 것이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했다는 것은 죄를 씻는 의미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만 후에 그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살리셨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 위의 모든 축복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축복의 상징적 사건의 역사입니다. 실제는 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소망해야 할 것 바라야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이란 영원한 축복의 조그마한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생으로써 세계를 보게 되는데 하나는 양적인 면과 하나는 질적인 면입니다. 생을 물량적인 면으로만 보며 그런 세계에 사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에 성공했다거나 혹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며, 질적인 면을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는데 인간의 진실을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여 손해 보았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질적인 면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약진하는 신앙이 참으로 필요한 시기입니다.

1. 열성과 기도 없이는 약진의 신앙은 없습니다 약진하는 신앙에는 열심히 모여 기도하는 저력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약진하는 교회로 성장한 것도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한 120명의 합심기도에서 기인된 것입니다(행 1:15). 기도는 전능자의 무한한 보화를 쌓아둔 하늘 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연초부터 뜨겁게 모여서 큰 소망, 큰 보화를 얻기 위해 기도의 불길을 당겨야 합니다. 헤겔이 말하기를 “큰 정열 없이는 세계사의 대업을 이룬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열의 성회, 정열의 기도가 있을 때 약진은 약속될 것입니다.

2. 협동과 사랑 없이는 약진의 신앙은 없습니다 전 4:9-12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니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사랑과 협동으로 전진을 기약합니다. 협동과 사랑의 복음을 눈물처럼 흘리면 흘릴수록 크게 성장합니다.

3. 아멘 하는 순종 없이는 약진의 신앙이 없습니다 뜨겁게 모이는 열띤 집회도 좋습니다. 몸부림치는 기도도 좋습니다. 친절에 손잡는 협동과 사랑의 코이노니아(교제)도 좋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아멘”이 없다면 무익합니다. “아멘”을 몸에 배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은 순종의 열매요 신앙의 고백입니다. 아멘은 성도의 노래요 축복의 열쇠입니다. 아멘은 약진의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기독교는 아멘의 종교요 크리스찬은 아멘의 사람입니다. 쉬운 일에만 아멘 할 것이 아니요 역경에도 아멘 하는 자입니다. 순종의 믿음, 아멘의 신앙으로 약진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순임금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신하들에게 구덩이에다가 물을 길어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모든 신하들은 임금이 쓸데없는 인을 한다고 수근 수근대며 임금님을 비난하여 물을 길어 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충성스런 신하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리요하면서 온종일 혼자서 부지런히 우물물을 길어 구덩이에 부었습니다. 자꾸 붓다보니 우물의 물도 없어졌습니다. 두레박에 물이 오르지 않으므로 우물 밑을 보았더니 황금덩이가 번쩍이지 않겠습니까? 신하는 이 금덩이를 가져다가 왕에게 드렸더니 왕의 말씀이 “순종하는 신하에게 내리는 황금덩이 상이니 그대가 가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라는 말씀을 이 이야기는 보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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