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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제사 (히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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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이 여기에 무려 21번이나 반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위인장이라고도 합니다. 역대 믿음의 위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무엇으로 살았습니까? 믿음으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5절에는 “믿음으로 에녹은”이라고 했고, 7절에는 “믿음으로 노아는”이라 했으며, 8절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으로 모세는”하며 모세까지도 믿음의 중요한 위인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체 그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겠습니까?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여기 히 11:1에 정의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에머슨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종달새의 앞에서 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시인은 믿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잔디씨 속에 있는 봄바람이다. 그것은 눈먼 아이 가슴 속에서 자라는 태양이라. 그것은 먼 땅 속에서 부릅뜬 개구리의 눈망울이다. 그것은 시인의 말 속에서 태동하는 애기 숨소리다. 그것은 내일을 오늘처럼 바라보는 마음이요 오늘을 내일처럼 믿는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보니 가인과 아벨의 이름에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간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왜 가인의 제사는 상달되지 못하고 아벨의 제사는 상달되었습니까? 우리는 그 원인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벨의 제사가 더 나은 제사였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는 어떤 제사입니까? 더 나은 제물로 드린 제사라는 것입니다. 더 나은 제물은 어떠한 제물입니까? 그것은 아벨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 즉 자신의 유일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자기를 대신한 양의 피로 하나님께 제사드렸습니다. 자기의 가장 귀한 것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벨이 형 가인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동생을 가인이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동생을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무서운 죄입니다. 타락한 천사인 악령을 사탄이라고 합니다. 사탄이란 뜻은 하나님을 대적한다라는 뜻과 시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시기의 사탄은 아담 하와를 시험할 때 네가 이 선악과 실과를 따 먹으면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기나게 했던 것입니다. 아담, 하와는 그 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완전히 속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행복의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인간의 불행의 원인은 바로 이 무서운 시기의 죄에서 시작된 것을 성서는 밝혀 줍니다. 여기 본문에서는 시기의 죄가 동생을 죽임으로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을 일으킨 것을 밝혀줍니다. 가인의 이런 얘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가인은 땅을 상속 받았고 아벨은 양떼를 상속받았습니다. 아벨이 양떼를 몰고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와서 이 땅은 내 땅이니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벨이 양떼를 몰고 산 변두리로 올라갔습니다. 가인은 거기까지 올라가서 이 땅도 내 것이니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참 슬픈 역사입니다. 예배는 먼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선해야 합니다.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그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제물 이전에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인이 이렇듯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했으니 그 제사가 상달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선한 마음, 겸손한 마음, 경건한 마음, 은혜를 감사하고 감격한 마음으로 찬송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하며 예배할 때 이 예배가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또한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는 생활과 예배가 일치한 예배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서에 경건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유세베이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유”라는 말과 “세베이아”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잘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는 날마다의 생활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의 그 정신 곧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면 그 경건생활은 어떤 생활이겠습니까? 최선주의의 생활입니다. 최선주의는 무엇입니까? 선과 악 사이에서 선을 택하여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선 사이에서라도 최선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그 최선을 선택하여 사는 생활이 최선주의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이 최선의 표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이나 만사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된 그리스도인의 최선주의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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