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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히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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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을 할 수도 있고, 싫어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옷 한 벌이라도 지어드리는 일입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길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처럼 인격적인 신이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닮아 인격적인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받았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기뻐하시는 일과 싫어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시험해 보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주께 기쁘시게 하실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엡 5:10).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1.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겔 33:11에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는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또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첫째가 백 마리 양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애쓰는 목자, 그리고 찾은즉 기뻐하여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거워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은전 10개를 가지고 있던 여인이 그 중에 하나를 잃고 온 집안을 비로 쓸어보아 이를 찾은 후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거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여 타락했던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크게 기뻐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혼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도 죄인 하나가 새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맏아들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도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를 인하여 더욱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가졌습니다. 어떤 나이 많으신 분이 그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아 앞으로 나오더니 담뱃대를 꺼내어 제 손으로 뚝 꺾어버리고 “목사님. 내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안 피우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또 부흥회를 가졌는데 이전의 부흥회에서 회개했다는 그 분이 또 나와 담뱃대를 꺽으면서 또 다시 회개했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그 교회에서 부흥회를 가졌는데 그 분이 또 나와서 담뱃대를 꺾으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러니 온 교인들이 모두 웃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되 철저하게 회개하고 바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달력은 오늘이요, 마귀의 달력은 내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믿기로 작정하려 할 때 마귀는 “내일로 미루어 두라, 차차 작정하라”는 말로 마음속에 속삭이고 주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오늘 이 시간에 과감성 있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 두 사도의 한 사람이 되기까지 하였으나 그 후에 마귀에게 유혹을 받았는데 이런 유다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며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영원히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도 탕자가 아버지 집을 찾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뿐만 아니라 내 생활 전부가 아버지께로 돌아와 거룩한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어 승천했습니다. 그래서 히 11:4-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과 상급을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 떨어진 노끈 하나를 주웠습니다. 때마침 그 동리에서 어떤 사람이 돈 지갑을 잃었는데 누가 본즉 아무개가 길가에서 그 지갑을 줍더라는 풍설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길에서 주은 것은 이 노끈이다”고 몇 번이나 변명했으나 사람들은 역시 그를 의심했습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그 돈지갑을 주어서 그 주인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람이 돈지갑을 주워놓고 제 삼자를 통해서 주인에게 보낸 것이라고 수군거리며 여전히 그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고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도 그를 믿어 줄 때 기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그를 믿어드릴 때 기뻐하십니다. 나는 청렴한데도 불구하고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그와는 반대로 피차에 믿어주면서 살아간다는 일은 얼마나 흐뭇하고 행복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의와 공평을 기뻐하십니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고 했습니다. 또한 “악인을 의롭다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사람은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고 했습니다. 우리가 감정과 인정과 애정의 지배를 받을 때 공의와 공평을 잃어버리고 판단을 잘못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항상 의와 공평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억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탁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부탁을 믿고 순종하는 생활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됩니다. 그래서 삼상 15:22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국민은 국가의 제도법에 순종해야 하고,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교인이 주께 순종하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제도에 순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5.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요 4:23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배는 형식과 내용이 충실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를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이 없는 예배는 무가치합니다. 의와 공평을 행하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면 그는 이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런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식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출 28:2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시간 중에 잡담을 하거나 옆 교인을 향해 인사를 나누며 얘기만 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예배를 한번 잘못 드린 것으로 인하여 그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오랫동안 고역을 하게 된 것은 지금도 불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주시는 경책의 말씀이 됩니다(창 15:13). 사무엘하 24장에 다윗이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값있게 예배를 봄으로써 온역이 그친 사실은 경건의 예배가 얼마나 귀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벨이 드린 피의 제사는 하나님의 속죄의 법칙을 순종한 것입니다. 아벨의 순종하는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었습니다. 그는 피로써 제사를 드렸고 또한 그로 인하여 자신이 최초의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의 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상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철저한 신앙자의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고 그 제사를 드리는 이에게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 주시고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에서 주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예배도 피의 예배, 생명을 바치는 예배, 몸과 정성을 바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교도들도 우상에 예배할 때 목욕재계를 하고서 정성을 다하여 하는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가페의 사랑으로 중생케 하신 우리의 영존하신 아버지를 예배하는데 정성이 이교도들의 그것보다 못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예배에 출석할 때 준비 없이 무 정성하게 불경건하게 한다든가 찬송, 기도, 헌금할 것 없이 형식적이고 의식적으로 한다든지 설교자가 성경을 토대로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고 또는 죄를 공격하여 회개를 시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위로와 기쁨을 얻게 하지 못하고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자 인간의 구미를 맞추기 위하여 아부와 아첨의 형식으로 이럭저럭 얼버무려 넘기고 시대에 맞추어 아주 간단히 미끈하게 한 시간 마친다면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열납할리 만무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인간의 중심에서 말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드리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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