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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삭의 신앙 (히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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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이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고 종합적인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만 해도 신앙의 다양한 형태가 출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삭의 경우는 그의 일생 자체가 특이하고 또 그로 인한 신앙의 형태로 특이합니다. 이삭의 일생은 창 17장∼35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99세 때 원래의 자기 이름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또한 100세 때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엎드린 채 속으로 피식 웃었습니다(창 17:17) 그리고 장막 뒤에서 사라도 그 말을 듣고 쓴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져서 다음해에 나이 많은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이 탄생되었습니다. 사라는 너무 기뻐서 창 21:6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전날에 믿기지 않아 쓴 웃음을 웃었던 사라는 이젠 정말 달고 기쁜 웃음을 웃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이삭”의 그 이름의 뜻이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것입니다.

1. 그의 생활의 특수성 그의 출생은 이렇게 극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삭의 성격이나 생활은 매우 평범하고, 소극적이고, 비활동적이고, 피동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그가 겪는 사건은 매우 특이합니다. 이삭에게 있었던 주요사건 세 가지를 살펴봅시다.

(1) 모리아 산에서의 사건-창 22:1-14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100세에 주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아브라함이 구일 길을 걸어 모리아산에 이르러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막고, 하나님이 예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주석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이삭의 나이가 이때 20세였다고 합니다. 그 기록을 읽을 때 우리 마음에 석연치 않은 것은 20여세의 힘센 청년 이삭이 120여세의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반항도 않고 잡혀 죽을 뻔 했다는 것입니다. 20여세의 청년으로써 또한 “약속의 아들”임을 잘 알고 있었을 그로써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겠습니까? 나 외에 아버지의 적자가 또 어디 있습니까? 왜 이러한 나를 죽이려 하십니까?”라는 당연한 반항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완전히 피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결혼-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주 늙자 그의 늙은 종을 불러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족속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의 본토 동족 중에서 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하여 늙은 종은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의 성에 가서 아브라함의 동생이자 나홀의 아들인 브드엘의 딸 리브가를 만나 그녀를 데려다가 이삭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는 옛날 강제 중매결혼이 성했을 때의 우리나라 신랑들의 나이처럼 열 살, 열두 살 된 소년이 아니고 자그마치 40세가 된 노총각이었습니다. 그는 40세가 되어 장가가는데도 연애는 고사하고 제 신부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불평이나 제 의사도 발표하지 않은, 정말 낯선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정해 준다고 그저 감사해서 장가가는 피동적 인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 24:63에 “이삭이 해가 저물 때에 들에 나아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보매 약대들이 오더라”는 말이 있는데 40세가 된 자기를 장가보내겠다고 늙은 종이 메소포타미아까지 갔다 오는데 이삭은 남의 일처럼 태평이었습니다. 어딘지 모자란 사람 같았습니다.

(3) 창 25:21-26을 보면 리브가는 결혼 후에 20년간이나 아이 하나를 낳지 못하고 20년이 지나서야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것을 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본처 사라 외에 아들을 보자고 첩 하갈을 얻었고, 사라가 죽은 후에는 그두라라고 하는 후처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언약의 아들, 곧 자기를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그 자손이 퍼지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진정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해야 할 아들인 이삭은 결혼 후 20년이 경과하여 60세가 되기까지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그 자식 때문에 얻어도 좋은 다른 아내나 첩을 둘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추측컨데 천하태평으로 지낸 것 같습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그 아들 야곱이 그 아내를 여럿 두었던 당시 사회상을 볼 때에 그는 분명히 유별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2. 그 특성이 암시하는 신앙의 특성 이런 이삭을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의 위인록에 열거하고 “믿음으로 이 삭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삭의 생활에서 하나님은 주도적이요, 인간은 오직 수동적 응답자라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동자요, 인간은 수동자라는 기독교의 독특한 면을 이삭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잘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기 전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인간의 신앙을 계시하시기 전에는 인간은 인간 자신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주를 계시하시지 않으시면 인간은 구주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이 규율의 길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스스로 그 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기 전에는 인간은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이 진리를 계시하시기 전에는 인간의 자력으로 진리를 알 수 없다고 기독교는 주장합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한 것이며(요1서 4:10),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불러 그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응답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인들은 인간 위주, 자기중심을 고조하는 나머지 모든 면에서 능동적인 것만 가치가 있고 수동적인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복종입니다. 이삭과 비교하면 현대인들은 그의 “모리아” 산에서 언제나 끈덕진 반항을 합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희생되어야 하나”고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을 끝까지 거부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일찌라도 “나” 라는 인간개체의 생명의 존엄성으로 그 명령에 항거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이삭의 순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수풀에 예비 된 어린양이 있을 수 없고, 그들 자신이 자기 생명을 스스로 잡아 죽이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올바른 세계관, 훌륭한 인생관, 분명한 사리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임을 주장하면서 내 생활, 모든 사건과 행동을 나 자신의 지식과 힘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반항합니다. 인생의 교훈이나 하나님의 생각들은 오히려 인간인 나의 생각보다도 못한데 왜 내가 간섭을 받겠는가며 인간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소리 높여 외치며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몰아내고 인간이 대신 그 자리에 좌정하였습니다. 현대인들은 연약한 것이 싫고, 희생적인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답답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께서 지시 하는 대로 따라가며, 그가 불기둥으로 인도하면 불기둥을 따라가고, 그가 구름기둥으로 인도하면 구름 기둥으로 따라가는 생활이 어떻게 보면 평범하고, 소극적이고, 지나치게 피동적인 생활 같으나 실상은 평범한 그 속에 귀한 진리가 있고 소극적인 것 같으나 소극을 통하여 적극 이상의 의미가 있고, 비활동적인 것 같으나 진정한 활동이 있습니다. 역사의 주장가는 하나님이십니다. 작은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하나님이 제정한 질서에 조금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 질서를 따라서 사는 것뿐입니다. 인간의 생의 최고목적은 하나님이 제정한 그 질서에 따라 자기의 구원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20년이 아니라 그보다 몇 배가 더 긴 세월이 걸리더라도 나를 통해서 언젠가는 하나님의 언약이 결실될 것이라면 불평 없이 오래 참아야 할 것입니다. 이삭의 신앙은 한 마디로 “?從의 신앙”입니다. 모리아 산에서도 결혼에서도, 아들 없는 20년의 생활에서도 그는 말없이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바로 이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신앙의 위인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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