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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문 밖의 길 (히 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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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대에는 어린양을 희생의 제물로 드렸는데 그 제물을 드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추방법입니다(레 26:20-22). 인간의 모든 불의와 더러운 죄를 걸머졌다고 상징하는 양 한 마리를 멀리 광야로 쫓아내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희생의 양과 함께 자기의 죄도 멀리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한 것은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의 제사법은 어린양을 죽여 그 피는 제단에 바치고 가죽이나 내장 같은 양의 시체를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태우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시체를 태워버림으로써 묵은 죄악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의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전통적인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맞추어 해석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문 바깥인 골고다로 끌려가서 처형된 것은 바로 속죄의 어린양이 성문 바깥으로 끌려 나가 태워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성문 바깥에 계시니 우리도 예수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성문 바깥으로 끌려 나가 태워진 것과 같이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외칩니다. 예루살렘이라 함은 그 중심은 성전이었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는 사중의 영문이 있었습니다. 그 곳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갑니다. 영문 하나 밖은 일반 제사장들이 들어갑니다. 둘째 영문 밖은 유대인 남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영문 바깥은 유대인 제자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문에는 무서운 공고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속으로 들어가는 이방인과 죄인은 사형에 처함.”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이기 때문에 둘째 영문 속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영문 바깥의 계급인 죄인의 친구가 되고 이방인과 어울리고 세리와 창기와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행태는 당시 종교 권위주의자들이나 정치 권력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새로운 신앙운동이었습니다. 그 신앙의 밑바닥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차별 받는 민중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권력의 울타리에서 빠져 나왔던 것입니다. 천대 받는 죄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 나무에 매달린 것입니다.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한 수치를 함께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영문 안의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 같은 형식만 차리는 부패한 교회입니다. 돈을 모아 외모를 갖추고 교인끼리 영문 안에 들어 앉아 평안을 찾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영문 바깥으로 나가서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고, 우는 자의 눈물을 씻어주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주고, 피곤한 자의 지팡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때에 프랑스에서 생긴 일입니다. 어떤 미군 중에 세 명이 형제 이상으로 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기독교인인 한 명이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두 친구가 일선에 있는 성당을 찾아가 친구를 성당 묘지에 묻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신부는 교회법에 개신교도는 영내에 묻을 수 없다하여 영문 밖에 묻게 하였습니다. 3년 뒤에 친구가 전사한 날 두 사람은 친구의 무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당 묘지에 와서 그들은 놀라고 화가 났습니다. 영문 바깥에 있었던 친구의 무덤이 없어진 것입니다. 흥분한 미국 청년들에게 신부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무덤은 저 안쪽에 있습니다. 울타리를 넓혔기 때문에 그 무덤은 울타리 속으로 들어왔는데 개신교도인 줄은 알지만 슬쩍 넘겼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영문을 어디까지 넓히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울타리의 철폐를 명하신 것입니다. 영문 밖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거기는 주님이 계십니다. 영문 밖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참 신앙이 있습니다.

1. 영문 밖의 그 길은 피의 길입니다(12절) 피는 곧 자기 생명을 의미합니다. 모든 동물의 피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어떤 동물이든지 그 몸에 피가 마르거나 멎으면 죽게 됩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구약 시대부터 범죄 한 인간의 속죄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셨으니 짐승의 피 곧 흠 없는 양, 살진 송아지, 비둘기 등으로 바치는 것입니다(레 16:3-16, 14:4, 민 19:6). 히 9:22에는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귀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즉 자신의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열려져 있는 이 생명의 길, 피의 길을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는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을 바쳐 이 생명의 길을 전할 것이며 아직 이 길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전할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에는 양에 대한 제사법이 상세히 나옵니다. 두 마리의 흠 없는 양을 취하여 제비 뽑아 한 마리는 잡아서 피를 번제단에 붓고 다른 한 마리는 제사장이 양의 머리와 등에 손을 얹고 백성들의 죄악을 그 양의 등에 지우는 기원을 한 다음 저 멀리 광야로 내어 쫓아 버립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악을 속량하시고 새 생명을 완전히 주실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친히 천하 만민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예루살렘 성밖의 피의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2. 영문 밖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12절 하반부에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문 밖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고난이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무수한 고통을 당하여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만일 우리 인간에게 죄 값을 묻는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아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죄 값을 묻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그대로 심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킬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없는 이에게 인류의 죄를 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 대속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류가 받을 모든 징벌을 대신 지운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눈물 없이, 피땀 없이 못 가는 길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주님 홀로 영광 거두소서. 주여. 내 눈물, 피와 땀, 내 생명을 주님이 받으소서. 피로 값 주고 사셔서 기름 부어 세우신 그 뜻을 이루소서.

3. 영문 밖의 그 길은 기독교인이 걸어가야만 할 길입니다(13절) 13절에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짊어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어서 우리를 향해 “오라”하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길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이 길을 걷노라면 아픔도 있습니다. 고난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 곧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야 합니다. 내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인데 내 누구이기에 이 길을 사양하겠습니까? 성도의 슬픈 눈물을 주님께서 그 손으로 닦아 주시고 그 손에 금 면류관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시니 주님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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