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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이 있는 믿음 (약 0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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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의 입증
20-26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두 인물을 들어 신앙의 위대한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제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또 라합은 약속의 땅을 정탐키 위해 보냄을 받은 정탐꾼을 숨겨주어 그의 생명을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후에 정탐꾼으로 왔던 살몬과 라합이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소명과 부르심에 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라합도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정탐꾼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행하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고 행하여 신앙과 행위가 상반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믿음과 행위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 없이 행동에 옮긴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은 그 사람의 행동을 창출했습니다. 만일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신앙이었다면 그가 가지고 있던 믿음은 가짜일 것입니다.

2. 신앙의 실체화 학문이나 과학의 논리나 도덕도 실체화 하지 못하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실체화 하지 못한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 7:21에서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1) 신앙과 행위의 관계 신앙이란 히 11:1에서 정의했듯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신앙생활은 실체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행위는 실제에 있어서만 행위인고로 시간과 공간 내에서 구체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요 신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선험적으로 정립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신앙과 행위는 서로 합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학적 견지에서 이 세상에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행위 곧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구원 얻을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고 십자가를 믿음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에 대해서 절대로 반대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믿음은 참 믿음이어야 되겠고 이 믿음은 산 믿음이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이 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머리로 믿고 입으로만 믿는 것이 옳지 않으며 실지로 행위에 나타나는 그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 할 줄로 믿습니다.

(2) 행위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진리는 뿌리요 행위는 열매입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납니다. 나무와 열매를 결코 나눌 수 없듯이 신앙과 행위는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외치기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믿고 참 회개를 했습니까? 그가 회개했다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토색하였던 것을 네 배로 도로 갚아 주었습니다. 또한 자기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참 믿음으로 봅니까? 어떻게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는 행위로 따랐습니다. 고향과 친척을 다 이별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객지로 유랑 생활을 다녔습니다. 그는 간 곳마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모리아산에서 독자까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순종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마음으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기생 라합의 신앙은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정탐꾼을 숨겨 주고 피할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믿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로 믿을진대 우리가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을 분명히 알진대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에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온유와 겸손, 거룩의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죄를 죄인 줄 알면서도 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한다고 하면 그것이 참 믿음이겠습니까? 믿음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는 그 생활에 있어서 양심적인 생활로 반드시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금전거래에서든지 사교생활에서든지 모든 방면에 다른 사람보다 양심적인 선한 열매로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행위는 필수적인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3) 행위는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행위가 믿음의 열매인 까닭에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행위가 결국 믿음의 진가를 판단하는 표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그 행위를 보고 열매를 보아서 판단하라고 몇 번이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였습니다. 포도나무에서는 포도를, 엉겅퀴에서는 엉겅퀴를 내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을 가진 이는 자연히 마지막에는 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위선자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이런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훼방을 받고 전도의 문이 막히고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 때문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내 행위로서 내 신앙을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4) 행위는 최후 심판의 표준입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결국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산상보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1서 2:17에서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최후 심판 때 면양과 산양을 기르는 비유를 기억 하십시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가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와 보았고 너희가 위문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심판의 표준이 바로 행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습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 배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 종에게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더 큰 일을 네게 맡기리라”고 칭찬하셨으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묻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은 그 종을 가리러 “악하고 게으른 종아! 저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외칠 때 “이제 도끼를 나무뿌리에 놓았으니 좋은 얼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고 경고했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시다가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말씀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산 신앙을 가지므로 행위로 나타나는 참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축복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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