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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이름 (계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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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서론에 나타나는 일곱 교회는 계시록의 수신 교회들로써 당시 소아시아에 있었던 교회들이 있습니다만, 동시에 세계의 모든 시대의 모 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이는 모든 신자들, 각자들의 대표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우리 교회나 개인들은 여기 제시된 일곱 가 지 교회 모형 중에 어디엔가 소속한다는 뜻입니다. 각 교회는 제각기 장점이 있고 또 단점이 있습니다. 거기에 따라 그리스도의 칭찬도 있고 책망과 회개의 권면이 있으며, 결론적으로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상급이 보장되 고 있습니다. 이제 봉독한 부분은 버가모 교회 기사로써, 일곱 교회 중 세째 교회이며, 순교까지 한 순수한 신자와 로마 환제 예배 및 니골라당이라 불리우는 성적 폐륜(廢倫)이 뒤섞여 있던 교회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상 숭배와 부도덕한 생활에 빠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회개를 권하시고, 이기는 자에게는 흰돌을 주고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새겨 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 새 이름은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알게 될 그리스도의 새 이름으로, 혹은 우리 성도들의 새 이름으로 해석됩니다만, 이를 우리의 것으로 취하고 새 이름을 받아 새 축복을 받는 은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영세를 받을 때 실지로 새 이름을 줍니다. 우리들은 이를 정신적인 의미에서 응용하고, 여기에서 우리 새 생활 원리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실지로 새 이름을 받는 경우를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생의 중대한 전환기에서 개명하고 새 이름을 얻는 사실 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경우들을 찾으면서 거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교훈을 묵상하십시다.

1. 첫째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부른 일들입니다 그것은 새 생활을 가리켰습니다. 창 17:5,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 라는 뜻이요. 아브라함은 “만 백성의 아버지 ”를 뜻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의 중대한 전환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그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지킨 신앙은 “높은 아버지 ”와 같았습니다. 그의 고향은 우상 숭배의 고장이며, 심지어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장사였다고 합니다. 이런 우상 숭배가 성한 곳에서 홀로 유일 신인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고(孤高)히 높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홀로 높은 신앙을 견지한 아브라함에게서 많은 믿음의 자녀가 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또한 아랍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며, 신령한 의미에서는 모든 믿는 성도들의 조상입니다. 즉 만백성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높은 아버지 ”라는 아브람이 “만백성의 아버지 ”인 아브라함이 된 것 입니다. 하여튼 아브라함이란 새 이름이 그로 하여금 믿음의 새 생활을 성 취시키는 축복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이름은 여러 가지 내 용을 표현했습니다. 가령 주님께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아마 그들의 급하고 불같은 성격을 가리켰을 것입니다(막 3:17). 세례 요한이 났을 때 그의 부모가 “요한”이라 부르니 (눅 1:61) 이웃 사람들이 “너희 친척 중에 이런 이름이 없다” 하였습니다. 즉 이름은 가문을 표시했던 것입니다. 구약 성서에 야곱의 첫 부인 레아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등 아들을 낳아가면서 (창 29:3, 1-35) 그 이름에서 남편 야곱이 자기를 소외하는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며, 자기의 소원을 밝혔습니다. 야곱의 이름도 그런 뜻이었습니다. 야곱-발꿈치를 잡았다. 에서-붉다, 이삭-웃는다, 사라-만인의 어머니‥‥‥등. 이사야가 예언한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누엘 ”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을 뜻하며 (마 1:23),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 그의 사명을 표시합니다. 이와 같이 새 이름을 가진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새로운 성격, 가정, 환경과 소망, 그리고 사명을 가진다는 교훈으로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 했습니다. “흰 것과 새것은 늘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흰 것은 천국의 제복이고 새것은 천국의 성격일 것입니다. 영국 격언에 “새것은 언제든지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세상의 새것은 곧 헌것이 되고 권태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언제나 새것으로 낡아지거나 권태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새 이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처음 새 생활을 할 것입니다.

2.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른 일입니다 그것은 새 승리를 약속한 것입니다. 때는 야곱이 20년이 넘는 객지 생활에서 고향으로 돌아 올 때였고, 곳은 얍복 나룻가였습니다. 그곳은 야곱에게 있어서 생의 분수령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처럼 이 나루를 건너 갈 때에는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나왔더니 (창 32:10) 이제 건널 때에는 두Ep로 나누는 재물과 네 명의 아내와 열두 명의 자녀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이같이 큰 축복을 받았고 큰 성공을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큰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가 집을 떠나기 전 형을 속여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았기 때문에 객지 생활 20년 동안 늘 불안했었고, 지금 돌아오는 야곱에게 에서는 4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야곱은 두려워하였습니다. 20년간 얻은 재물을 일순간에 잃어버리고 자신의 생명마저 위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식구와 양떼를 두 떼로 나누어 우선 얍복강을 건너보내고, 나룻가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였습니다. 즉 천사가 나타나 밤새도록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씨름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기도로 승리했을 때 천사는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었읍니 다. “이스라엘 ”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이라는 새 이름이었습니다. 야곱은 잡았다는 뜻으로 태어나면서 형의 발꿈치를 잡고, 또한 아우이면서 형을 능가하려던 초조한 전 반생을 대변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이겼다”는 뜻으로 그의 승리적인 후반생을 대변하는 이름입니다. 야곱은 그때까지만 해도 “승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에게서 이겼고, 아버지에게서 이겼고, 아내들에게서 이겼고, 처남에게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새 이름 “이스라엘”은 그에게 새 승리를 약속한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 지금까지의 승리는 외적인 것이고, 육적인 것이었으나 앞으로는 내적인 승리, 영적인 승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엡 6:12,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 요, 정세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에게 대함이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귀와 악령의 역사를 상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여러 가지 싸워야 하고 씨름해야 할 문제들이 다가 올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싸움에서 이 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기에 앞서 먼저 진정한 승리 가 무엇인가를 알아야겠습니다. 야곱처럼 “이스라엘 ”이란 새 이름을 받는 진정한 새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3. 세째는 사울을 바울이라 부른 일입니다 그것은 새 사명을 받는 이름입니다. 사울이라는 뜻은 “큰 자”라는 뜻 이었으나 “무덤 ”이란 깊은 뜻이 있고, 바울은 “지극히 작은 종”이란 뜻이었으나 “일꾼”이란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란 개명(改名), 즉 새 이름은 그의 과거, 현재 하여야 할 그의 사명을 잘 표시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사울 옛 시대의 그의 일을 했고, 바울은 바울의 사명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울 시대에 그는 성도들을 해쳤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주동이었던 파괴자 무덤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에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서신을 쓰는 등 더할 수 없는 충성된 일꾼이 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사명감의 변화는 아그립바 왕의 어진 재판에서 행한 그 의 변호에서 명백히 구분되고 있는 듯합니다. 행 26:9, 사울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스스로의 신념에서의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철학에서 취해진 행동이었습니다. 그의 율법적 지식으로 판단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의 계시를 받은 후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계시를 따라 피동적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가 평생 바울을 지배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할 일이 너무 많아 불평하기 쉬우나 그보다 더 큰 고통은 할 일이 없을 때 받는 고통입니다. 교도소에서 죄수에게 가하는 가장 큰 형벌은 독방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할 일도 없고 대화할 사람도 없는 것, 몇 년이고 혼자 보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생을 늘 일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람직한 일은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1) 자기의 적성에 맞는 적당한 일인가?

(2) 그 일을 통해 자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가?

(3) 특히 강조할 사항은 그 일에 대한 명백한 사명감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칼빈은 모든 직업은 하나님 앞에 소명받아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보수가 많다 해도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의 소명을 느끼지 못한다면 가치없고 보잘것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명감이 분명한 사람은 같은 일을 해도 보다 충실 하게 할 것이며 보다 잘 할 것입니다. 사명받은 자는 늘 어려운 고비를 오래 오래 잘 견딥니다. 그리고 늘 창 조적이고 늘 새로운 좋은 점을 모색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새 이름을 받아 새로운 생활을 하며, 나아가 새 승리를 목표하고, 새 사명감 에서 일하는 새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큰 은혜 받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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