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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수를 채울 자(다섯째 인) (계 0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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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일곱 인 중 6장에서는 여섯째 인봉을 개봉하였으니, 첫째 인봉 은 백마가 나타났으며, 백마 탄 자는 활을 가진 자로 적그리스도를 말함 이니 마 24장에 예언한 것처럼 첫째 환란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하였으며, 계 19:11에 백마 탄 이가 있는데 이는 사랑을 가진 참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봉엔 붉은 말의 전쟁, 세째 인봉엔 검은 말의 기근이 나타날 것이며, 또한 아모스 예언자가 예언한대로 말세에 교회에도 영적 기갈이 막심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째 인봉을 뗄때 청황색 말이 나온 것은 사망의 재앙을 말한 것이며, 재앙은 점차 더 커지니 불신자에게는 두렵고 무서운 변이 될 것이지만 신자에게는 예수 재림의 통지입니다. 즉 재앙이 심함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래 기다리던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쁜 통지이니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1. 그 수는 무슨 수입니까? 다섯째 인을 뗄 때에 순교자들의 영혼이 나타나서 순교의 피를 신원하여 주기를 호소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저희들의 동무와 형제들도 저희들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를 기다리라 하시었습니다. 그 수는 무슨 수입니까? 참살을 당하는 순교자의 수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수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순교자의 수에 들기를 원하십니까? 여기에 자기처럼 죽임을 받는다는 것은 심히 참혹한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24:9, 막 13:9-13, 눅 21:12-18에서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란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베임 받아 죽고, 베드로와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죽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시에서 짐승에게 밟혀 죽임을 당하였고,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목매어 죽임을 당하였고, 바돌로매는 가죽을 벗겨 죽임을 당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자들이 이런 참살당하는 것을 막아주지 아니하였고 도리어 더 많이 죽기를 기다리시니 웬일이겠읍니까? 하나님 나라의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허락하시고 순교자가 많이 나오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국가에 제일 귀한 사람이 국가를 위하여 순절할 때 충신인 것처럼 천국 에서 제일 귀한 천국인은 순교자입니다. 순교의 복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제일 사랑하는 종에게 주시는 은혜요, 예수를 제일 사랑하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영광이니 베드로, 야고보, 바울, 토마스, 손 양원 목사는 모두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계 14:13에 “자금 이후로 주 안 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살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병이 나서 죽든지 노쇠하여 죽든지 아무래도 한 번 죽어질 목숨을 예수께 바치어 천상 천하 제일 귀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에 순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죽음입니다. 곧 영광의 죽음입니다. 계 3:4에 사데 교회 신자들에게 주신 “저희들에게 흰 옷을 주신다.” 라는 흰 옷(白衣)은 지상 생활을 하는 신자가 입는 예수의 피로 씻은 의(義)의 옷이요, 순교자가 천상에서 입는 흰 옷은 영광의 면류관의 옷입니다. 변환 산상에서 빛나는 예수의 흰 옷과 같은 영광의 옷입니다. 여기서 그 수(數)란 바로 지상에서 주님의 피로 씻은 의의 흰 옷을 입고 의를 위하여 희생하다가 천상에서 영광의 흰 옷을 입은 자의 수를 말합니다. 참살(순교)만 생각하면 그 수에 들기 어렵겠지만 천상 흰 옷의 영광을 바라는 자는 그 수에 들기를 원할 것입니다.

2. 그 수가 얼마입니까? 그 수는 얼마인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예정한 수가 있습니다. 영광의 수 는 수천, 수만, 수억이 될지 모르나 그 수는 대단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멀리는 아벨의 피로부터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구약의 그 수는 다 알 수 없고 예수 십자가 이후 스데반의 순교의 피로부터 시작하여 로마 300년간의 대 박해에 흘린 피는 강같이 흘렀으나 그 수를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도 터어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회회교의 기독교 박해가 1500년간 너무 잔혹하였으니 마호멧의 독검에 피흘린 자의 수는 로마 시대 이상이었습니다. 개혁 시대에 개신교들이 흘린 피는 엄청났습니다. 프랑스의 바돌로매 축 일에 일어난 대학살은 하루에 이만명을 생매장으로 순교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수는 점점 줄은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동양 선교가 시작된 당태종 후에 중국에서 순교한 자의 수도 적지 아니하거니 와 일본에서만도 풍신덕천 양모부의 초지단(兩慕府의 初支丹) 금령 하에 26명의 선교사가 순교하였으며, 그 후 만명의 순교자를 내어 일본에 기독교가 허용되고 교회가 세워졌으며, 한국 선교 초기만 하여도 대인군 박해에 5만명 이상이 한강에서 참살당했으며, 일정 시,

6.25 때 수천, 수만명이 순교를 하였으며, 기독교의 순교자의 수는 2000년간 내려왔으나 그 수가 아직 차질 않아 세계 도처에서도 공산 진영과의 싸움에서 기독교인이 많이 학살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계시록 예언대로 보면 말세의 대 박해가 있을 것인 바 이후에 순교할 자의 피가 과거 2000년간의 순교자의 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봅니다.

3. 순교자 영의 부르짖음 9절에 죽임을 당한 영들이 제단 밑에 있었습니다. 이 묘사는 성전 제사 의식에서 직접 인용한 것으로 레 17장에 유대인의 희생물 중 가장 거룩한 부분은 피였고, 피는 곧 생명이라고 믿었으며,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다른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레 4:7에 “제사장은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라” 하였으니, 즉 피는 생명으로 제단 밑에 바쳐진다는 말씀입니다.

(1) 여기에 고난 받는 의로운 자의 영원한 부르짖음이 10절 “어느 때지니이까” 하는 절규에 있습니다. 시 79:5-10에도 이방이 언제까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괴롭히고 핍박하도록 방임할 것입니까? 이방인이 어느 때까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하느냐고 하나님의 백성을 욕되게 내버려 두시겠나이까?라고 한 다윗의 부르짖음과 같이 그 소리가 하늘 보좌에 닿았으니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의로운 자의 마지막 변호가 있을 것입니다.

(2) 순교자들은 순교자들의 수가 차기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였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 나라의 순교자 영이 다 차기까지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즉 그의 역사적 해석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장중 아래 모든 역사가 속하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4. 그러면 그 수를 채울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 수는 대단히 많은 수이니 그 수를 채울 자는 세계 각국에 있을 것이 며, 우리 한국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그 수를 채울 자인지 다만 하나님만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에 참예할 자의 자격을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 하였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죽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맞아 죽은 자들이요, 또한 다른 이유로써가 아니라 저희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칼에 맞아 죽은 자들입니다. 여기 저희들이 가진 증거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곧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순교란 어떤 민족적인 감정이나, 정치적 반항이나, 사상 운동등의 세속적 동기가 혼합되어서는 안됩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하여 피 흘리는 산 증인들입니다. 순교자는 순수한 복음적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신앙 동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가 그 수에 들고 아니 들 것인지 알지 못하나 말세를 당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그 수의 정신, 그 수의 각오, 그 수의 희망, 그 수의 준비 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그 수의 정신이란 세속적 감정과 언행을 세상으로부터 성별되게 함이요, 복음 운동에 헌신함을 뜻함입니다. 그리고 그 수의 각오는 심히 어려운 것으로 해방 이전 만주에서 있었던 일로써 김 영진 목사님께서 중공 팔로군에게 끌려가 살가죽이 벗겨져 참살당한 것이나, 한 경회 목사 외 세 목사님을 송화강 얼음 구덩이에 쓸어넣어 죽이고, 성도들을 대못판으로 머 리박아 죽이고, 여성도들을 잔악한 참살로 죽였던 이 모든 참경을 연상하면, 공산당의 독수가 나를 노리는 그런 박해가 내 가슴을 겨눌 때가 있다 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른지, 그 수의 각오는 실로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각오하시겠읍니까? 그 수의 영광은 지극히 귀하지만 그 수의 각오는 지극히 또한 어려운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일사 각오의 결의로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본문에 사도 요한이 심히 두려워하고 근심할 때에 공중에서 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제물은 양과 비둘기이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 은 산중 사자처럼 용맹있는 짐승이 아니라 도리어 연약한 어린 양이었습니다. 독수리처럼 강하고 날쌘 새가 아니라 순하고 약한 비둘기입니다. 즉 순교자의 그 수에 참예할 사람이 되기에는 강하고 용맹스런 대담한 사람보다 도리어 양같이 약하고 비둘기같이 순한 신자가 적당한 것이니 여러분 중 에 ‘나같은 연약한 종이 감히 그 수를 채울 자가 될 수 있을까?’ 하며 자포자기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결코 용맹으로 순교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이끌려서 하는 일입니다. 즉 우리 주께서 그 수의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그 날의 영광을 예비하셨으므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계 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또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 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 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라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께서도 끝까지 참고 견디는 인내의 믿음을 연단 받아 환란의 날에 거룩한 수의 무리에 참 예하는 축복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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