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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의 영광 (사 5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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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영광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가 됨으로 조국을 잃어버렸습니다. 조국이 점령당했고 성전이 훼파되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일터도 다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가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언제 포로생활이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고통과 고난을 겪을 때 기한이 있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이 고생이 끝이 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한이 없다면 희망이 생길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처럼 절대적인 절망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는 우리가 예배드릴 수 없는가. 성전을 가질 수 없는가. 가족을 가질 수 없는가’라는 처절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절망 속에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 사람은 누구든지 고통을 겪고 고난을 겪으면 과거를 되돌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포로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를 사랑하고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셨던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옛날에 누렸던 영광, 예루살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훼파된 기구들을 다시 찾고 거기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고 예배하며 하나님과 영광스런 교제를 했던 축복을 마음에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4장을 보면 이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이 백성들에게 들려옵니다. 그것은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회복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하신다는 회복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회복의 메시지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수치를 벗고 회복될 것이니 환호성을 지르고 소리를 질러라, 둘째 앞으로 나타날 수많은 축복을 준비해 장막터를 넓혀라, 셋째 네 부끄러운 과거는 치유될 것이다, 넷째 다시는 이런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고 꾸짖지도 않겠다. 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평화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기쁜 소식이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데 이런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되니까 그들은 ‘야, 좋은 일이 생길거야’라고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일이란 옛날 영광스럽던 예루살렘의 회복이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도 다시 짓고 무너진 성벽도 다시 쌓고 제사도 다시 드리게 될 것이다. 이제는 과거처럼 살지 않고 잘 살아보겠다’는 상상을 하며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옛날 예루살렘의 영광을 기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옛날의 예루살렘의 영광이 아니라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과 환상을 주신 것입니다. 옛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 하나님께서는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을 보여주십니다. 땅의 예루살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기념비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사실 기념비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에 가보면 재미는 없습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와’하고 놀라지만 거기에는 아무 생명력이 없습니다. 미래를 여는 새로운 영적인 감동과 비전을 주지는 못합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는 한 페이지일 뿐입니다. 그것이 내게 생기를 주고 생명을 주고 축복을 주고 미래를 만드는 비전을 주지는 못합니다. 옛날 예루살렘의 영광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잊어버린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것 이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려는 것은 옛날 예루살렘의 영광의 회복이 아닙니다. 새로운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이스라엘 백성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 놀라운 영적 세계를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적 비전은 무엇일까요? 우리교회가 좀 더 크고, 좀 더 많이 모이고, 좀 더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영적인 비전입니다. 성공이나 성취는 위대하고 아름답지만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취해서 자꾸만 그것을 추구합니다. 성공이나 성취가 나를 구원해 주지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성령님과 다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입니다. 11절부터 12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폭풍에 그렇게 고생하고도 위로조차 받지 못한 성읍아, 보라. 내가 홍옥으로 벽을 쌓고 사파이어로 주춧돌을 놓겠다. 루비로 뾰족탑을 만들고 반짝이는 석류석으로 성문을 만들고 보석으로 모든 성벽을 둘러쌓겠다.”여기 나타나는 ‘폭풍에 그렇게 고생하고도 위로조차 받지 못한 성읍’은 옛날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값지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완벽하고 거룩한 새 예루살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런 일들을 보지 못했기에 인간의 언어 중 가장 좋은 것, 보석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찬란하고 완벽한 곳 어떤 분들은 새 예루살렘에 사파이어도 있고 루비도 있고 석류석도 있으니 다 뜯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데 착각하지 마십시오. 홍옥으로 벽을 쌓고 사파이어로 주춧돌을 놓고 루비로 뾰족탑을 만들고 반짝이는 석류석으로 성문을 만들고 보석으로 모든 성벽을 만든 이런 성은 없습니다. 지상에 존재할 수 없는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그 성읍을 한계가 있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려니까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이런 성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돌로 만든 성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그 성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시대부터 도읍지였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은 영광과 치욕의 역사가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마치 종교전시장과 같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에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가톨릭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금요일은 모슬렘의 안식일로 지키고,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로 지키고, 주일은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지킵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복잡합니다. 모든 종교가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성지라고 합니다. 거기에 모스크도 지어놓고 교회도 지어놓고 성당도 지어놨습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무슨 평화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예루살렘을 다시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인 성공과 축복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권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나옵니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여기에 조금 설명해놨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과 환상과 모습들이 기가 막히게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26절에 보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고 히브리서 12장 22절에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했습니다. 결코 모슬렘, 가톨릭, 기독교가 차치하려고 하는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기다리고 우리가 사모하는 회복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요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비전입니다. 세속 도시인 바벨론과 대조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면 천상의 도시 예루살렘은 어떤 곳일까요?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7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자기 남편을 위해 화장한 신부처럼 준비돼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더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나 우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처음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때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 그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들은 신실하고 참되니 너는 기록하여라.” 그는 또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며 시작과 끝이다. 내가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서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큰 음성으로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새 예루살렘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상상이 아닙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이미 왔고, 오고 있고, 올 것입니다. 이곳은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병도 없는 곳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회개했습니다. 요한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은 장면을 보다가 ‘내가 너무 감동 없이 성경을 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비전은 땅의 비전이 아닙니다. 물질의 비전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병도 고쳐주시고 돈도 주십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낮은 축복입니다. 그것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하늘에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땅의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이 생각을 하니까 너무 감동이 되어서 설교를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 일이 너무 복잡하고 많다보니 우리는 종종 새 예루살렘을 잊어버립니다. 생각이 희미해집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보고 살기 바라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병들고 힘들지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했던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비전을 두라 이사야 54장 13절에서 14절입니다. “네 자녀들은 모두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고 평화를 마음껏 누릴 것이다. 너는 정의로 굳게 서겠고 압제는 네게서 멀어질 것이니 두려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공포마저 멀리 사라져서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새 예루살렘의 외형은 보석으로 설명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완벽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하는 것처럼 내려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의 내면적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평화와 정의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있고 정의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압제가 없고 두려움과 공포가 없습니다. 15절에서 17절입니다. “너와 다투는 사람들이 생기겠지만 그것은 내가 허락한 것이 아니니 너와 다투는 사람들이 너 때문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보라. 숨을 불어 숯불을 피우고 쓸 만한 무기를 만들어 내는 장인을 창조한 것은 바로 나다. 또 부수고 파괴하는 사람들도 내가 창조했다. 너를 치려고 만든 무기는 성능을 다하지 못하고 너를 고소해서 법정에 세우는 혀마다 도리어 패소할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종들이 받을 몫이고 내가 그들에게 주는 권리다. 여호와의 말이다.”하나님의 나라에는 사탄의 영향력, 공격이 모두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다투던 사람들은 다 무릎을 꿇을 것이고, 너를 죽이려고 만들었던 무기는 다 무기력해질 것이고, 너를 고소하려던 혀들은 다 패소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저는 새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두었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 여러분 크리스천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이겼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망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저는 여러분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음 대신에 우리는 새 하늘에 대한 영광이 있습니다. 비전이 있습니다. 새 하늘에 대한 영광을 누려야 하니까 빨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빨리 죽고 싶다고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가 되면 죽을 것이니, 그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향은 영원한 그 곳입니다. 우리의 비전도, 관심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잠깐 지나가는 여관과 같습니다. 여기는 영원히 살 집이 아닙니다. 우리 고향은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죽을 때는 육신의 옷을 벗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을 가진 사람의 특권입니다.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여기서부터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을 묵상하십시오. 여러분의 고향은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집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 어젯밤에 잘 때 한 꿈을 꾸었네 그 옛날 예루살렘 성의 곁에 섰더니...’ 이 찬양 속에 환상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그 비전 그 축복을 오늘 더 깊이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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