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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 (눅 07: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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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심판자라고 생각하고, 어떤 분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은 의사라고 생각하고, 어떤 분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이런 여러 가지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일부분이지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세례 요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에게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왕비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세리도 제자로 삼으신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급히 예수님께 보내 뜬금없는 질문을 합니다. 20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오실 그분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이 질문을 다시 말하면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께서 약속한 메시아입니까?”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었고, “나는 물로 세례를 주나 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다.”라고 했으며, “그는 흥해야하고 나는 쇠해야 하겠다.”라고 했었습니다. 그랬던 세례 요한이 왜 지금 이런 질문을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례 요한이 생각했던 메시아와 예수님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과 당시 유대 민족들은 모세나 다윗 같은 영웅적인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꿈꿨던 메시아는 로마 식민지로부터 압박받는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는 카리스마적인 군사 영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의 칼을 휘둘러서 악한 권세를 제압하고 새 이스라엘과 새 왕궁을 세우는 임금이었습니다. 물론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해야 했지만, 그것은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에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전해준 예수님에 대한 보고는 세례 요한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 중에서 섬기고 사랑하는 부분만 성취하신 것 같았습니다. 심판, 공의, 정의를 실현하는 메시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확신이 필요한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던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메시아 많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이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리 현실에 입각한 희망사항에 가깝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장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답답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과 세례 요한이 그랬습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아는 옛날 다윗과 모세처럼 자신들을 압제자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줄 그런 카리스마적인 구세주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 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웠던 말씀은 갇힌 자들을 자유케하고 압제당하는 자들로부터 해방시키며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것만 하나님의 예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남편은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라는 에베소서 말씀만 읽습니다. 몇 절만 내려가면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심과 같이하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부분은 절대 읽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읽는 것이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 옆에 있는 “부모들아 자녀들의 마음을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읽지 않습니다. 자기한테 필요한 말씀만 붙잡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현실에 맞는 것만 붙잡습니다. 몸에 좋은 음식은 먹지 않고 입에 맞는 불량식품만 먹으려는 어린 아이처럼 세례 요한과 이스라엘 민족은 사랑, 용서, 치유보다는 정의와 심판자로서의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현실과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진짜 메시아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실망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이 정도 밖에 안 되십니까? 이렇게 우리 민족이 힘든데 이렇게 나약한 이미지만 보여주시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충격적인 예수님의 대답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들에게 자신의 사역과 능력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21절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고쳐 주시고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사역현장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 현장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해 듣는 것과 직접 가서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돈으로도 못하고 국가가 나서도 안 되는 이런 생생한 일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직접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돌아가서 너희가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 이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군사적인 영웅적인 메시아를 기대하던 세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로마의 창칼을 깨는 힘은 원시적이고 간단합니다. 그러나 깨어진 인생을 복구하는 힘은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창칼로 깨는 것은 칭기즈칸도 할 수 있고 알렉산더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진 마음을 다시 살리고,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메시아에 대한 모습입니다. 인간의 진단 vs 하나님의 진단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를 진단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당장 내 고통을 덜어줄 진통제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따끔한 질책일 수 있습니다. 진통제가 아니라 칼로 도려내는 수술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아무리 여러분이 원망한다 하더라고 하나님은 그 칼을 내려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압제당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군사영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잘못 진단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식민지가 된 것은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때 이스라엘은 엄청나게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모든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했기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은 정권을 물리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병든 영혼을 고치는 것입니다.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은 해결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원하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그분이 지금 하시는 일이 최선임을 믿어 의심치 마십시오. 23절을 읽겠습니다. “‘나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지금 당장 현실적인 기대에 차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설교만 들으면 마음이 찔려서 ‘하나님께서 내 집에만 도청장치를 달아 놓으셨다보다. 왜 나만 갖고 그러시나?’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말씀 듣다가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고치십시오. 하나님께 삐치지 않아야 말씀이 쑥쑥 들어가 자랍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오신 방법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그분의 뜻은 온전하고 그분의 선하심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가장 탁월합니다. 세례 요한을 높이시는 예수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둘려보니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감정이 좋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아시고 바로 세례 요한을 높여주셨습니다. 24-26절입니다.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냐? 아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에 빠져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가 구름떼처럼 광야로 말씀을 들으러 나갈 정도로 세례 요한은 영적으로 기름부은 사람이다. 파워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변덕스럽고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분명한 확신과 지조를 가지고 영적인 신념을 가지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에 빠져 있는 왕족 같은 사람도 아니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인류역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인 BC와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인 AD로 나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역사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약속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는 오신 예수님의 구원과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대입니다. 세례 요한은 약속의 시대의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예수님께 근접해 있었기에 그때까지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구원과 축복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사는 우리는 요한보다 더 큽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최고로 만들어주는 것임을 믿습니다. 춤추지 않고 울지 않는 세대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십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말씀을 전할 때 세례 요한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심판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의 하나님도 믿고, 용서의 하나님도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정의의 하나님도 ‘아멘’하고 믿으시고, 사랑의 하나님도 ‘아멘’하고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믿을 때 가슴에 거리낌이 없어야합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 마음이 열린 사람은 요한의 메시지도 받고, 요한의 메시지를 완성한 예수님의 메시지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30절을 보면 종교지도자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요한의 메시지도 거부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한탄하십니다. 31절부터 35절입니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은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들은 무엇과 같을까? 그들은 시장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너희를 위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너희는 ‘저 사람이 귀신 들렸다.’라고 하며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 너희가 말하기를 ‘보라, 저 사람은 먹보에다 술꾼으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인증하는 법이다.”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변덕스러운 자기에게 맞추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핑계꺼리라도 찾아내서 자신들의 불신앙을 변명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우둔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겸손히 마음을 낮추고 마음을 주님께 활짝 여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믿으십시오. 좀 껄끄럽고 힘들어도 믿고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게 될 것입니다. 35절을 보면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인증하는 법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정의의 하나님도 받아들이고 사랑의 하나님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기대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이해가 되지 않아도 ‘아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이 놀랍게 변합니다. 그리고 변한 우리의 삶이 다시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어떤 말과 어떤 핑계로 거절한다 해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고, 삶이 변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내 생각과 기대를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변화시키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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