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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종 메시아 (사 4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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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종 메시아 우리는 살면서 ‘저 사람을 닮고 싶다’ ‘저렇게 살고 싶다’는 모델을 발견합니다. 그 모델이 누구냐에 따라 꿈도 비전도 삶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모든 믿는 자의 꿈은 예수님입니다. 그런 꿈을 그리면서 살아갈 때 모든 상황, 환경을 뛰어 넘어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 됩니다. 온 인류를 위한 메시아 구약 사람들은 여호와의 종이 되길 원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49장에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1절입니다. “너희 섬들아, 잘 들으라. 너희 먼 곳의 민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중에서부터 나를 부르셨다. 내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으셨다.”여기서 ‘나’는 여호와의 종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때때로 여호와의 종이란 말 대신 여호와의 사자란 말을 썼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하나님의 종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천사도 아니요 인간도 아닌 독특한 개념입니다. 족장시대에 여호와의 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었습니다. 출애굽 시대의 여호와의 종은 모세였습니다. 왕정시대의 여호와의 종은 다윗과 솔로몬 같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종을 이 세상에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족장도 아니요 모세나 다윗과 같은 사람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먼 훗날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종’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이 메시아를 기다려라. 이 메시아를 사모하라. 이 메시아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의 핵심주제입니다. 모태에서 부름을 받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의 회복, 구원,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49장부터는 장면과 분위기가 달라져 여호와의 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지난주의 설교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 앞으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메시아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개념만 있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 개념을 통해 메시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섬들아’는 지중해 연안의 크고 작은 섬들을 의미합니다. ‘먼 곳의 민족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있는 크고 작은 알 수 없는 나라까지도 포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스라엘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 이 복음이 한국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이 복음이 이슬람권, 공산권, 미전도종족에게도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잘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종 메시아가 이 땅의 구원자로 태어나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에 이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선택을 받았다고 합니다. 메시아는 태중에서 복중에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년이 되어서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자유주의 신학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성인이 되어서라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다 성장한 후에 부른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억하고 선택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굉장한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부르셨다면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메시아의 세 가지 특징 2절입니다. “그분이 내 입을 예리한 칼처럼 만드셨고 주의 손 그림자 아래에 나를 숨기셨다. 그분이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셨고 그분의 화살 통에 나를 숨기셨다.”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어떻게 양육하시고 메시아에게 어떻게 권능을 주고 메시아를 어떻게 보호하시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입에 예리하고 칼 같은 말씀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메시아의 특징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병든 자가 일어나고, 귀가 열리고, 눈을 뜨고,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입에 능력 있는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입술에도 능력 있는 말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손의 그림자 안에 메시아를 숨기시고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고난과 위기와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 손의 그림자 안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와 보호 아래 메시아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올무와 악인의 덫을 피해가면서 피난처로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메시아는 날카로운 화살 같다고 했습니다. 이 메시아는 하나님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화살이 화살 통 안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분이 내게 말씀했다. ‘너는 내 종, 이스라엘이다. 내가 네게서 영광을 받겠다.’”여기 하나님의 종인 이스라엘의 모습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이신 메시아입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모진 고생과 고통과 수난과 역경을 겪습니다. 무가치한 일을 보상하시는 하나님 4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나는 헛수고만 했구나. 내가 힘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것도 된 일이 없었고 헛힘만 썼구나. 그러나 여호와께서 나를 제대로 판단해 주시고 내 하나님께서 내게 적절한 보상을 내리셨다.’”메시아의 특징은 자기가 하는 일이 헛수고라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처럼 사는 사람들은 ‘내가 괜히 이런 일을 하는 것 아닌가’, ‘죽을 고생을 했는데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메시아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메시아적 의미를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며 죽어야만했습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도 버림을 받았다고 느낄 정도로 메시아는 고독하고 외롭게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헛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이 보였던 그 사건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구속하고 구원과 회복을 가져오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 ‘나는 헛수고만 했구나. 내가 힘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것도 된 일이 없었고 헛힘만 썼구나. 그러나 여호와께서 나를 제대로 판단해 주시고 내 하나님께서 내게 적절한 보상을 내리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의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의 종의 헌신을 평가하시고 승리와 개선가를 부르게 하십니다. 진정한 여호와의 종, 메시아적 의미를 갖고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이 헛짓이라 말하는 무의미한 일들을 열심히 합니다. 저는 가끔 선교지로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처럼 멋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당신이 선교사로 꼭 가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 같지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종입니다. 누군가 그런 헌신을 하고 그런 희생을 했기에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희망이 없던 자들이 꿈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다시 세우십니다. 보상을 해주십니다. 흩어진 자를 모으심 그렇다면 메시아가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5절입니다. “나를 태에서부터 지어 그분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야곱을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에게로 모이게 하신다. 나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사람이 됐다. 내 하나님이 내 힘이 되셨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첫째 이스라엘을 모으는 것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부르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상처받고 흩어지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다시 희망과 용기를 주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하는 일입니다. 저는 교회가 이런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상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서로 미워하고 고발하는 현 상황에서 교회와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은 흩어진 사람을 모으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분열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능력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누구를 비판하고 고발하고 소리 지르는 것을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어머니 같은 분입니다. 타락한 자녀를 가슴에 품는 아버지 마음이 있는 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오면 위로를 받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심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복시키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자신이 어디에서 부름을 받았는지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이 확신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크면 클수록 고난의 강도가 높아져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무리 고난의 강도가 커도 부름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열방에 미치는 구원 메시아가 하는 일 둘째는 6절에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돼서 야곱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내가 보호해 놓은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이 네게는 아주 작은 일이다. 또한 땅 끝까지 내 구원을 이르게 하도록 내가 너를 또한 뭇 나라의 빛으로 삼아서 땅 끝까지 내 구원이 이르게 하겠다.”이스라엘을 모으는 일은 작은 일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큰 그림에 비하면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이스라엘의 회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은 이스라엘을 넘어섭니다. 팔레스타인을 넘어 온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메시아적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우주적인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민족은 소중하지만 민족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민족이 열방을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회복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열방과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도구로 너를 삼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더 큰 목적과 더 큰 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빛이 되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뭇 나라의 빛으로 삼아서 땅 끝까지 내 구원이 이르게 하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1백 년 전에 한국에 선교사가 왔습니다. 그분들이 한국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한국에 친척도 가족도 없고, 아무 이해관계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선교사들은 1백 년 전에 한국에 왔고 이 땅에 묻혔습니다. 그분들이 이방의 빛이 되었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부인이 선교지에 적응을 하지 못해 정신이 이상해 졌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왜 없겠습니까? 선교지에 가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울증에도 걸리고 심지어 자녀들이 죽기도 합니다. 선교사들은 이런 희생, 대가를 치르면서도 그 나라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선교사들이 모슬렘 지역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선교사들은 틈만 나면 다시 들어가려고 합니다. 며칠 전에 베트남에서 오신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은 그곳에서 반정부 요인이라고 경찰에서 계속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나라에 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메시아 의식이 있는 분들은 잡아도 가고, 때려도 가고, 막아도 갑니다. 이것을 누가 시켰겠습니까? 이방인의 빛이 된다는 비전이 이분들의 마음에 잉태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비전이 잉태되기를 축원합니다. 멸시를 당하는 메시아 셋째는 7절입니다. “멸시를 당하고 민족들에게 미움을 사며 지배자들의 종이 된 사람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왕들이 너를 보고 일어나고 귀족들이 너를 경배할 것이다. 신실하신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너를 택하셨기 때문이다.”할렐루야! 우리는 멸시를 당할 것입니다.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처럼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가 무시하면 그 무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럼 간단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공격하고 미워하면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하십시오.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인생에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신분이 나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게는 영광스런 주님,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갈 때 죄수의 신분으로 갔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수라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로마에 갔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예정하시고 양자로 삼으셨습니다.(엡 1:4-5) 이것만 생각만 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암에 걸려도, 실패를 해도, 부도가 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계획이 다 망가져도 이 말씀이 중심에 있다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선택이요 부름입니다. 메시아의 시작은 부름에 대한 확신입니다. 저는 우리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흔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서 12절을 보면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잘 묘사해 놓았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이미지, 메시아에 대한 환상, 메시아에 대한 자화상이 여러분의 삶에 흔적으로 남아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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