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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사 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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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요, 파멸이 아니고 번영입니다. 하나님은 채찍을 드시면서도 한편으로는 회복과 번영과 희망의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오늘은 ‘우리말성경’(두란노)으로 말씀을 보겠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나 내 종 야곱아, 잘 들어라.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를 만들고 너를 태에서부터 지으신 분이 너를 도와줄 것이다. 내 종 야곱아, 내가 선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마라.”“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아”첫째, 하나님은 ‘내 종 야곱아’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옛 이름인 야곱이라고 부르셨을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서 축복을 주셨던 하나님을 상기시키기 위해 야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내 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특별히 부르신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른 하나는 열 두 지파에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야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야곱에게서 열 두 아들이 태어났고, 열 두 아들을 통해 열 두 지파가 생겼고, 열 두 지파가 한 민족을 이루어서 이스라엘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라 말할 때는 열 두 지파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둘째,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셨던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의 족보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이름을 통해서 불러주십니다.(창 35:10) 얍복강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창세기 25장을 보면 ‘야곱’이란 이름의 뜻이 나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 기득권, 전통, 돈을 붙들고 살려는 전형적인 인물이 야곱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야곱은 자기 한계를 느꼈습니다. 야곱은 자기 인생의 절망을 느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가 왔을 때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발뒤꿈치를 잡던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상대가 달라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상대가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유한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택한’이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한 국가, 한 민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나의 택한’이란 말은 “이 나라는 너희들이 만든 나라가 아니고 내가 세운 국가이고 내가 만든 나라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 조국과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독립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립시켜주셨고 하나님께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이 땅을 여기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여수룬아”셋째, ‘내가 선택한 여수룬아’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나오는 ‘여수룬’이란 단어는 ‘의롭다, 올바르다’란 뜻입니다. 자주 쓰는 단어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명예롭게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야곱은 사기꾼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장자권도 도둑질해 가고, 축복의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자기에게 오도록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불안해했습니다.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기꾼과 같았던 야곱을 고귀한 자, 의로운 자, 올바른 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수룬’으로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것입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을 더 시적이고 아름다운 여수룬으로 바꿔주신 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아끼는 마음,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도 나쁘게 해석하고 의심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다 사랑스럽게 보고 좋게 해석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따뜻한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어주고 이해해주고 좋게 해석해 주십시오. 누가 그 사람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 아니라고 변명해주십시오. 사랑하면 자연히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야단치고 혼내고 화를 내시다가도 결론을 보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이해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계시니까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면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 본척하고, 못 들은 척하고, 모르는 척하십니다. 그냥 좋게, 귀엽게, 따뜻하게 우리를 만져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를 도와줄 것이다”오늘 44장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세 가지 호칭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즉 그분은 창조주이시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분은 토기장이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흙으로 토기를 빚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빚어주셨고 우리 인생을 빚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시고,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장 천한 것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가장 영광스런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할렐루야!둘째, 만들어 주셨는데 그냥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모태에서부터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를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사랑할 때 임신할 때부터 사랑하지 애를 낳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본 다음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편과 모습이 어떻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은 모태에서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두 가지를 하십니다. 첫째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나를 설계하고 나를 지으신 분이 나의 정신상태, 나의 육체의 조건, 나의 심리상태, 인생의 운명을 제일 잘 아십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잘 안다’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두려움에 휩싸여 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다는 생각을 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생각을 하면 어떤 경우를 만나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 물을 주리라”3-4절 말씀입니다. “내가 메마른 땅에 물을 주고 마른 바닥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듯이 네 자손에게 내 영을 주고 네 후손에게 내 복이 흐르게 하겠다. 그들은 들판에서 솟아나는 풀 같고 흐르는 시냇가의 버드나무 같을 것이다.”우리는 1-2절에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3-4절은 이스라엘에게 회복과 번영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메마른 땅에 물을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킹 제임스 번역에서는 ‘메마른 땅’이 아니라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메마른 땅,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땅이 갈라집니다. 식물과 동물이 말라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물을 부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마른 바닥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른 바닥에 시냇물이 흐르도록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강이 생기고 시냇물이 흐른다는 것은 나무가 자라고 채소가 자라고 농사가 잘된다는 뜻입니다. 가축들이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추수가 있고, 가축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풍요로운 환경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막 같은 땅을 하나님께서 옥토로 바꿔주시고 푸른 초장으로 바꿔주시고 말할 수 없는 풍요로운 추수가 있는 곳으로 바꿔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네 자손에게 내 영을 주리라”셋째, 하나님께서 ‘네 자손들에게 나의 영을 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아주 독특한 말씀입니다. 요엘서에는 “그날에 너희 하인들과 하녀들에게도 내가 내 영을 부어 줄 것이다.”(2:29)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어린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날’ 즉 말세에는 악한 것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령이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세에 성령을 받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령 받는 성도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온누리교회가 성령 받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이 땅이, 이 민족이 성령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물이 들어와서 사람과 땅이 회복되고, 강물과 시냇가가 생김으로 환경이 회복되고, 성령이 오셔서 민족이 회복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민족의 부활이 있습니다. “생기야 들어와라” 할 때 해골골짜기의 뼈들이 군대가 된 것처럼 성령이 임할 때 민족의 부활이 임할 것입니다. 돈, 무기가 있다고 민족이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력, 미사일, 핵폭탄이 국가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넷째, ‘네 후손에게 내 복이 흐르게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저주도 전수되고 복도 전수됩니다. 저주는 3-4대에 이르고 복은 천대에 이른다고 했습니다.(신 5:9-10) 복은 전수됩니다. 하나님의 복이 우리 자손들에게 전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후손에게 성령을 부어주겠다,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환상이요 얼마나 기막힌 예언입니까? 하나님은 포로생활에 찢기고 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과 번영과 희망을 약속하는 놀라운 말씀들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문득 포로생활에 찢긴 것이 북한 땅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몇몇 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겠지만 대부분의 많은 북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굶주림과 비인간적인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북한 땅에 적용해보았습니다. 북한 땅에 샘물이 터질 것입니다!북한 땅에 시냇물이 흐를 것입니다! 북한 땅에 성령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 주민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이방인들이 나를 예배하리라”이것이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예언의 환상이었습니다. 우리는 미사일의 협박을 받는 비참한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6자회담에서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들은 끝까지 협박을 할 것입니다. 오직 한분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땅에 성령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민족이 복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그곳에 놀라운 은혜의 강물이 흐르고 시냇물이 흐르고 새싹이 돋고 풍요로운 농사가 일어나게 하는 축복을 이사야의 예언처럼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도 일어나게 해주옵소서! 이 지구상에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이 예언이 필요합니다. 이 축복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들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5절입니다. “그 때에 ‘나는 여호와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를 야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손에다가 ‘여호와의 것’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고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이스라엘의 회복과 번영과 축복을 보면서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이방인들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인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저는 늘 ‘나와 악수하는 사람은 다 복 받을지어다’라고 축복하다가 요즘에는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은 다 복받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나와 만나는 사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 때문에 다 복을 받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이 비전이 있다면 얼마나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나 때문에 내 가족이 내 친척이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내 동네가 내 직장이 다 행복해지고 복을 받는다면,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존재이겠습니까.“너는 내 것이라”5절에서는 몇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 ‘나는 여호와의 것이다’라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내 이름은 야곱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을 자기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손에 ‘나는 여호와의 것이다’라고 문신같은 것을 새기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이스라엘과 너무 멀리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인류학적으로도 이스라엘과 우리는 아무 접촉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보다 우리가 예수를 더 잘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4장 5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 ‘나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헌신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 내 시간, 내 물질, 내 삶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마음대로 쓰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자기의 이름을 성경의 이름을 붙입니다. 김여호수아 목사님은 자기가 여호수아도 아닌데 김여호수아라고 합니다. 성경의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셋째, 손에 사인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은혜, 진리, 예배, 찬양 등으로 자녀의 이름을 짓기도 하고, 기업의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언이 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더욱더 예수님 앞으로 가까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마다 대로가 열리고,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어둠과 죽음과 분열의 세력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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