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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래도 부러운 가정 (창 24: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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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부러운 가정(창 24:61-67)오늘은 창세기 24장 61절에서 6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래도 부러운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실 때 절대로 100%의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라 할지라도 들어가 보면 어딘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삭의 가정은 참으로 좋아 보입니다. 사실 좋습니다. 그런데 들어가 보면 문제가 있었습니다. 쌍둥이 아들 중에 큰 아들 에서가 가나안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가정은 제가 볼 때 참으로 부러운 가정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을 가정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5월만 되면 첫째 주일과 둘째 주일에 어린이 주일 혹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가정에는 어버이도 있고, 어린이도 있기에 두 주일을 합해서 가정 주일이라 하여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을 가정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오래 전부터 5월 첫 주일을 가정 주일로 지켜 오고 있습니다.오늘 본문이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따라 이삭의 가정을 생각하면서 이삭의 가정이 어찌하여 "그래도 부러운 가정"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첫째, 믿음의 가정 (61-)처녀와 총각이 만나서 결혼을 하면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가정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부부 생활에 결정적인 치명상을 주는 증상이 하나 있습니다. 의부증 혹은 의처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심만 하는 정신적인 질환입니다. 의부증에 걸린 여자는 자기 남편을 사사건건 의심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전혀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 의심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남편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속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며 의처증이 있는 남자는 아내를 얼마나 의심하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함께 다니면서도 아내가 여자끼리 인사하는 경우에는 전혀 문제를 삼지 않는데 혹시 남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게 되면 집에 돌아가서 반쯤 죽습니다. '너 그 남자 좋아하지'라고 하면서 닥달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자가 버티어 낼 수가 없습니다. 서로 의심을 하고 의심을 받는 일처럼 괴로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부부는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런 증세가 깊어지면 부부생활은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서로가 믿어주는 부부가 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예를 들어서 동네 사람들이 저 집 아내가 어떻다고 하면서 별 소리를 다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남편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그 때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남편이 '나는 당신을 믿소'라고 하면 이야기를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남편에 대해서 저 집의 남편은 아무와 바람이 났다고 소문이 돌아갈 지라도 아내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내 남편을 믿는다고 하면 그 사건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이렇게 서로 믿고 살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너를 믿는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미워한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젊었을 때와 나이 들었을 때와 늙었을 때가 다릅니다. 하루에도 조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감정이 믿기는 믿되 성령이 우리들에게 임하사 성령으로 믿는 믿음이기 까닭에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너를 믿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를 믿는 바탕은 내 감정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듯이 남편을 믿고, 남편은 또 하나님을 믿듯이 아내를 믿어야 합니다. 이런 가정은 참으로 복되고 부러워할 만한 가정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1절을 보면 '리브가가 일어나 비자와 함께 약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고 하였습니다.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내와 함께 떠납니다. 아들이나 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 생활을 잘 하겠노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25년 동안 애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나이 100살, 그 아내 사라의 나이 90살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127세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아들만 남았습니다. 며느리를 골라 맞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때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는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을 고향 땅에 보냅니다. 고향에서 며느리를 골라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종을 보내면서도 아들은 절대로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오고 가는 길에 해를 당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의 아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고 혼자서 주인의 고향에 가서 며느리를 맞이해 오는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주인의 고향에 가기까지 순적한 길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계속하면서 주인의 고향을 찾아갑니다. 길을 가다 보니 메소보다미아 나홀의 성에 이르렀습니다. 동네 밖에 우물이 있는지라 '하나님 제가 여기에 지켜 서 있다가 아가씨가 물을 길으러 나오는 경우 내게 물을 좀 달라 했을 때 나에게 물을 떠주는 아가씨라면 하나님이 내 주인의 며느리로 택한 줄로 믿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리브가라고 하는 아가씨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물을 좀 주어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물을 떠서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약대들에게 물을 길어다 먹였습니다. 약대가 물을 한 사발 두 사발을 마십니까? 리브가는 시키지 않은 일까지 넉넉하게 하는 여자입니다. 너무도 후덕한 아가씨였습니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겠습니까? 종은 벌써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너무 고마운지라 손 목걸이를 끼워주고 코걸이를 달아주면서 "아가씨의 집에 내가 좀 쉴만한 곳이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그럼은요, 우리 집은 넓고 낙타에게 줄 먹이감도 많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달려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라반이 달려 나와서 그 종을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저녁 대접을 잘 하려고 만반진수를 차려 놓았습니다. 그 때 그 종이 "내가 한 마디 하고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로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나는 아브라함이 종입니다. 그래서 지금 며느리감을 골라 데리고 오라는 사명을 받고 왔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기도하면서 왔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기도했더니 리브가가 기도한대로 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사연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부두엘과 또 그의 아들 라반이 "이것은 우리가 가부를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벌써 하나님께서 다 짝지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가씨에게 한번 물어는 봅시다"라고 한 다음 리브가를 불렀습니다. 리브가가 남편 될 남자의 얼굴을 한번이나 봤습니까? 음성을 한 번이나 들어봤습니까? 편지 한번을 받아 보았습니까? 전혀 그런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리브가는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확답을 했습니다. 종을 따라갔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순전히 믿음으로 따라 갔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삭은 자기가 직접 가서 보고 데리고 오는 것도 아니고 종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는 종이 데리고 오는 여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시는 것으로 알고 내가 맞이하겠다 하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믿음이 만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된 가정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이렇듯 철저한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나이가 좀 들어서 신학을 한 목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목사가 된 사람을 어느 교회에서 모시겠습니까? 그래서 개척할 수밖에 없다 하여 교회를 개척을 하는데 어려움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자기 보다 젊고 겨우 안면이 있는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젊은 목사의 사모가 차를 준비해서 대접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개척교회 목사님이 젊은 목사님에게 "목사님은 참 행복해 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젊은 목사님이 "제가 그렇게 행복해 보입니까? 뭐가 그렇게 행복해 보이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사모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세상에 목사 중에 사모가 없는 목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모가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거의가 재혼하여 사모가 있지 않습니까?" "예, 저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와 어린 세 자녀가 지금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는 그 자리가 그렇게 큰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보니 아내의 자리가 너무 컸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살아 계시니 얼마나 복됩니까?" 그 젊은 목사가 그 다음 주일에 무엇을 했겠습니까? 감사 헌금을 했습니다. 감사 헌금도 봉투에 두둑이 넣어 가지고 드렸습니다. 큰 교회라면 헌금 내역을 다 부를 수가 없지만 그리 큰 교회가 아니기에 그 내역을 다 읽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내역에 "아내가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저녁 시간에 남자 교인들이 전부 "아내가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감사헌금을 들고 왔습니다. 아내들도 "남편이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전부 감사헌금을 들고 왔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옆에 있는 남편이 곁을 떠나면 그 때 비로소 남편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실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내가 믿고 사랑하는 아내, 정말로 내가 믿고 사랑하는 남편과 믿음으로 맺어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정이 얼마나 복됩니까? 여러분들은 믿는 아내가 살아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남편이 살아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삭의 가정이 바로 아내와 함께 믿음으로 이루어졌고, 믿음으로 살아온 가정입니다. 정말로 부러운 가정입니다.둘째, 기도의 가정 (62-63)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셔서 나이 30이 될 때까지는 가정 일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나이 30이 되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만 하겠다하여 공생애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광야로 가셔서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서 키워야 되는 큰 일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를 때 기분 내키는 대로 부르셨습니까?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 16절을 보면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세우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키우는 일 전에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는 엄청난 일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지새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말씀입니까?이상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아무리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일에 앞서 먼저 기도가 우선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기도를 하시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일을 하시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제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생활의 일부요, 즐거움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는 가정은 참으로 부러운 사람이요, 부러운 가정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2절에서 63절을 보면 '때에 이삭이 브엘 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남방에 거하였었음이라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들에 나가 묵상을 하다가'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묵상 기도를 하다가'라는 뜻입니다. 이삭은 자기 아내감을 골라 데리고 오는데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고 종을 보냈습니다. 종을 보낸 날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묵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물가에서 종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삭의 가정은 기도로 이루어 진 가정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 20년이 되었는데도 아들도 딸도 없었습니다. 결혼하고 20년 동안 애기가 없다면 이처럼 다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걱정과 근심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부는 '기도할 문제다'라고 생각되어 열심히 합심기도를 했습니다. 20년 동안을 내외가 합심하여 기도한 결과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남편 이삭은 그 날부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기도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내는 혼자서라도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태중에서 쌍둥이가 싸우기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는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 이쯤 되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작은 아들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도를 중단했기 까닭에 하나님의 그런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다가 쉬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기어이 작은 아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그것을 응답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이삭의 가정은 이처럼 기도로 시작을 했습니다. 리브가는 계속 기도로 살아왔습니다. 합심기도는 끝까지 못했을지라도 개인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 가정이었습니다. 얼마나 부럽고 복된 가정입니까? 여러분들 가정에 기도 소리가 계속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극상 한다는 것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잠깐 하는 식사기도뿐이 아니십니까? 그 것도 형식적으로 말입니다. 기도가 없는 가정에서는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삭의 가정은 기도의 가정이었습니다. 한번은 젊은이가 벌목장에 가서 취직을 하려고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주인님, 저를 좀 써 주십시오.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네에게 달렸어,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이고, 일을 잘 못하면 안 되는 것이지" 그래서 도끼를 받아들고 월요일에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화요일에도 열심히 하고, 수요일에도 열심히 하고, 목요일에도 한 나절을 했는데 주인이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일한 품삯을 계산해 주면서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인님, 제가 이렇게 열심히 했고 다른 일꾼들이 놀고 또 쉬는 시간에도 저는 일을 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때 주인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런 결과가 나오지?" "무슨 말씀이신데요?" "자네가 월요일에는 일등으로 제일 많은 성과를 올렸지. 둘째 날은 중 가운데쯤이었고, 셋째 날은 제일 꼴지야, 오늘은 지켜보니 영 형편이 없어. 왜 그렇지? 점점 능률이 떨어지고 있으니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어.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젊은 청년은 이상했습니다. 그 때 주인이 "자네 혹시 도끼를 갈아서 날을 세운 일이 있나? 없나?"라고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도끼는 열심히 나무를 찍어서 하루를 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갈고 갈아서 날을 세워야 하는데 도끼 날을 세우기 위해서 가는 시간이 헛되게 보내는 시간인가? 그 시간이 노는 시간인가?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 아닌가?라는 주인의 말에 결국 대답을 못했습니다.도끼의 날을 세워 놓고 한번 찍는 것은 무딘 도끼로 열 번을 찍는 것보다 능률이 더 좋습니다. 반드시 갈고 날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젊은이는 모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또는 믿음 생활에서 날을 세우는 일이 무엇입니까? 준비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 생활이 아닙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우리가 놀고 먹는 시간입니까? 헛되이 보내는 시간입니까?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믿음의 날을 세우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안 하는 사람보다 열 배나 낫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열 사람이 기도하는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도 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가정은 기도로 시작했고, 계속 기도로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에서의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부러운 가정이라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셋째, 사랑의 가정 (64-67)본문으로 돌아가서 64절에서 67절을 보면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약대에서 내려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뇨 종이 가로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고하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하였습니다.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지 25년이 지난 후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의 나이 37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37살이고 이삭은 37살입니다. 남자만 둘이 살았습니다. 홀아비만 둘이 산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홀아비 3년이면 뭐가 서말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홀아비끼리 산다는 것은 그렇게 재미가 없고 구차하다는 뜻입니다. 남자 둘만의 삶은 삭막할 뿐이었습니다. 웃을 일도, 재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의 세월을 홀아비끼리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이삭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 본문에 등장하는 리브가라고 하는 아가씨를 맞이하여 장막에 들이고 사랑을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합니까? 시아버지가 사랑합니까? 시아버지가 사랑합니다. 시아버지 아브라함이 그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했겠는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어쩌면 시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랑을 받는 즉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귀하지만 내가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오히려 큰 복입니다. 사랑스러운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이삭도 나이 40에 장가를 들었으니 이삭이 정신 없이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제 아들 딸을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항상 져주니까 평안합니다. 우리들도 며느리를 맞이하거든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십시오. 이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친정 어머니가 딸한테는 져 줄줄 알면서 왜 며느리한테는 꼭 이겨야 하는 줄로 여깁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며느리에게 이기려고 했겠습니까? 사랑을 주고 위로를 받고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부러운 가정입니다. 나중에 에서의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부러운 가정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부러운 이삭의 가정은 첫째 믿음의 가정입니다. 믿음으로 출발을 했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도의 가정입니다. 기도로 시작을 했고, 기도가 생활의 한 부분이었고, 평생을 기도로 마친 가정입니다. 셋째 사랑의 가정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기에 천국과 같은 가정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평생 아내 한 사람으로 만족했고 아내는 이삭 한 사람 밖에 모르는 가정이요, 진정 부러운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도 이렇게 부러운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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