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죄를 품은 거룩 (행 07:51-53)

첨부 1


저는 여름에 가끔 바닷가에 나가서 조개를 주운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못하는 약간 깊은 곳, 수경을 쓰고 약 3미터 정도 더 내려가면 제법 큰 조개들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묵직한 조개를 잡고 올라올 때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숨은 좀 차고 가슴은 답답하지만 그 모든 고통을 다 이길 수 있어요. 큰 조개를 잡았다는 기쁨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 기분이 나쁠 때도 있습니다. 언제인가 하면 껍데기를 주울 때입니다. 물위에 떠서 수경으로 내려다보면 저 밑에 큰 조개가 있어요. 감히 내려가기 힘든 곳인데도 잠수를 해서 그 조개를 주워보면 빈 껍데기예요. 한쪽만 있는 빈 껍데기도 아니고 신기하게 껍데기가 완벽하게 있는데, 안에는 텅 비어 있는 거예요.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굉장히 기분이 나쁩니다. 속은 기분이 드는 거지요. 껍질이 좋으면 당연히 내용도 좋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아마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보시면 가장 기분 나빠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양은 어디로 보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 속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외모로 보면 하나님을 따르는 자인데, 그러나 그 마음은 아닌 자들! 겉으로는 거룩한데, 속으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품고 사는 자들! 이 모두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교에 국가를 이끄는 유명한 지도자들이었어요. 스스로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우기보다는 늘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자신들만이 올바른 믿음을 소유했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했습니다. 때로 사람들을 때리고, 감옥에 넣고, 욕하고, 심지어 죽이면서도 자신들은 의로운 일을 행했다고 양심에 조금의 가책도 받지 않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겉은 너무나도 거룩하여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속은 어쩌면 상관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외모가 너무 완벽했으니까요. 자신이 보아도 그렇고, 남이 보아도 그렇고, 그들은 분명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까?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했습니까? 누가 그 속을 의심이라도 해 보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남이 봐도 그렇고 자신이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나왔습니다. 매 주일 성수를 합니다. 수요예배도 출석하고, 때로 십일조도 드리고, 구역성경공부는 말할 것도 없이 새벽기도까지 드립니다. 누가 보아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어느새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관습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참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몸에 배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스스로를 믿음이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도 의심해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얘기입니까? 예! 가능하다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서기관과 장로들과 제사장들을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 도통했던 사람들이요, 말씀을 줄줄 암송한 자들이요, 날마다 기도했던 사람들이요, 날마다 예배를 인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겉을 보니 너무 멋있어요. 멋있는 페인트를 칠했어요.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런데 안을 뜯어보니 죽은 사람의 시체가 그곳에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마태복음 23장에서 8번이나 예수님은 화를 발하셨습니다. 저주를 발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저주를 하셨단 말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몇 가지 읽어봅시다.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더 늦기 전에 이 말씀 앞에 당신을 성찰해보지 않으시렵니까? 혹 나도 모르게 믿음에서 멀리 떠나 겉은 화려하지만 내 속은 비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매주 교회를 나오고, 어느 한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경도 읽었습니다. 성경공부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도 얻고 봉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신앙생활의 모든 구석구석이 관습화, 종교화되어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전혀 단절된 채 내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도행전 7장 2절부터 53절까지는 스데반의 설교 한 편입니다. 아마 이 원고를 가지고 설교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구약의 역사를 단숨에 요약해주고 있는데, 대략 6가지 사건으로 구약의 역사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16절까지 그는 창세기를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17절부터 41절까지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길게 요약합니다. 곧바로 세 절 말씀, 42절부터 44절까지 짧은 구절을 가지고 민수기와 신명기를 요약하며, 한 절 말씀 45절로 여호수아를 끝내 버립니다. 그리고 46절, 47절 두 절에서 사무엘 하부터 역대 하까지의 역사를 함축합니다. 마지막으로 48절에서 50절까지는 에스라에서 말라기까지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그가 요약하는 가운데 반복되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Thing'이 있단 말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무엇을 연상했는지 아십니까? 군인들이 행진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행진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멀리서 군악대가 앞에 서서 행진을 해옵니다. 군인들이 행진하면 반드시 동원되는 것이 팀파니, 드럼입니다. 저 멀리서부터 드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음높이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이상하게 우리들을 흥분시키는 것이 있어요. 그 드럼 소리를 들으면서 제식훈련을 해보면 몸에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아요. 용기가 솟아요. 왠지 모르겠어요. 이 드럼 소리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이 주제를 보십니까? 수많은 구약의 역사를 한 장에 요약하면서 스데반은 주제를 잃지 않는데, 그곳에는 반복되는 주제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저 멀리서 시작된 주제곡은 점점 스데반 설교의 결론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크게 크게 들려서 우리의 가슴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 반복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순종과 불순종', '믿음과 불신앙'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수없이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제로 스데반은 역사를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 예를 창세기에서 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순종하기 쉬운 환경에 있었나요? 순종하기 쉬운 명령에 있었나요? 아닙니다.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임 목사님과 몽골에 갔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다 아는 곳이에요. 처음 가보는 곳이기 때문에 한편 마음이 설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도 있었어요. 웬만한 나라에 가면 영어가 다 통하니까 저도 불편한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곳은 영어가 안 통하는 나라더군요. 사흘 동안을 "으까까까 으까까-" 손가락으로 얘기하면서 지내는데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함을 그때 처음으로 저는 경험해 보았습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안내하는 선교사님이 "지갑을 조심하십시오! 붙들어야 됩니다." 밤에 나가려고 하니까 "위험합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때리고 돌멩이로 내려 찍습니다.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 많은 몽골인들이 이상해져 가고 있어요. 제가 다 아는 여행지임에도 밤길을 다니고 호텔로 혼자 들어갈 때면 불안했습니다. 공항에 나올 때까지도 "임 목사, 잘 잡어. 지갑 잡고 있지?" 여권을 잃어버리면 못 나오잖아요. 얼마나 위험했던지요. 경찰이 다 깔린 그 사회에서 우리가 그렇게 불안했거든, 하물며 이 시대이겠습니까? 국제 경찰이 없었습니다. 낯선 나라, 그 동네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자 하면 죽어야 합니다. 누가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명령을 아브라함은 순종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왜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를 보호하시고, 그분이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순종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 남 모르는 땅에 가서 땅 한 평 받지 못한 채 아들을 낳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순종의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불순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 불순종했나요? 이스라엘 백성들, 믿음의 조상의 신분을 가진 열 형제가 요셉을 시기해서 은 20에 그를 팔아버린 겁니다. 아버지를 속이고요. 믿음의 조상의 신분을 가졌던 열두 명 가운데 열 명이 불순종했다고 스데반은 지적합니다. 또 다른 예를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씁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굽 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수많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서로 원망하며 불평하고, 모세를 돌로 쳐죽이려고 하고,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며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스데반의 설교 요지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스데반이 지금 말씀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 포인트는 이 불순종의 사건들이 과거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데반이 과거 얘기를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이해가 빨랐을 겁니다. 왜? 자기 조상들 중 불순종한 사람과 순종한 사람들의 역사를 서기관들은 너무나도 환히 꿰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스데반은 갑자기 그 설교의 시제를 바꿉니다. 과거의 불순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불순종을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과거 역사에서 불순종한 조상들을 보았느냐! 그러나 그 불순종의 죄악이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 영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중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주님을 섬기고, 똑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외모를 꾸미고 앉아있는 이 사람들 가운데서도 순종의 사람들과 불순종의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겉으로 보면 믿음의 지파입니다. 외모로 보면 출애굽 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침례도 받습니다. 그러나 속은 아닌 사람들! 오늘 여기에 그러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스데반은 불순종의 사람들의 특성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스데반이 말하는 불순종의 사람, 죄를 품은 거룩한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속은 아닌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특징을 살펴봄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겸허히 성찰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51절을 읽어보겠습니다.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아무리 완벽한 신앙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해도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우리가 순종치 않고 있다면, 그는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믿음생활이 무엇일까요?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내 노력으로 나를 발전시키는 수양이 아닙니다.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달달 외우는 지식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 즉시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저 잠시 1초 동안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한 달 동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아예 성령님의 집을 지으시고 거기 들어와 사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성령의 성자가 거룩한 聖(성)자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죄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는 가실 수가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잠시가 아닌 아예 영원한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영원히 성령 하나님이 떠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흘린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죄를 짓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그냥 보시지 아니하고 하나의 창을 통해 보십니다. 이것이 보혈의 창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붉은 피를 통해 우리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고 꺼멓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얗게 보십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겁니다. 그것을 '칭의'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롭게 된 겁니다. 완벽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순간, 나는 부족하고 나는 거듭나지 못하고 내 행위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거룩하게 보셔서 성령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내 마음 안에 보내셔서 그곳에 거처를 삼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재하심입니다.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처를 만드셨어요.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기적 가운데 이것보다 더한 기적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스데반은 얘기합니다. "너희가 성전을 지었느냐?" 또한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놓고 올바른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기도합니다. "주여, 어찌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감당치 못하겠거든 내가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이리이까!" 여기서 그는 우주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하셔서 무엇을 합니까? 팔짱끼고 가만히 계시나요? 아닙니다.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날마다 인도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던 주님! 그들이 배고프다고 할 때에 만나를 주셨던 하나님! 목 마르다고 할 때에 반석에서 물을 내시던 하나님!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에 메추라기를 보내시며 그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셨던 그 동일하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얘야, 그런 말하면 안 된다. 그런 생각 가지면 안 돼.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참 믿음의 사람은 이 성령님의 인도에 나를 굴복시키는 겁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을 듣고도 성령님이 참으라고 하시면 참습니다. 아무리 작은 잘못을 범했어도 성령님이 그 작은 것을 지적하시면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내게 당장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성령님이 시키는 일은 순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겉은 화려하고 믿음의 사람 같아도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령을 소멸시킵니다. 이 말은 성령을 내 속에서 없앨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물을 끼얹는 겁니다. 불길이 확 줄어들 듯이 성령님의 역사에 항상 물을 끼얹어 꺼버립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아무리 주일성수하고, 아무리 십일조를 드리고, 아무리 오래 교회생활해도 성령님께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불순종의 사람이라고 스데반은 설교하십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왜 멸망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해서 멸망했나요?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거절했기에 멸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나요? 그분의 뼈아픈 지적을 받고 울어 보신 적이 언제입니까? 그분의 교정의 음성을 듣고 엄히 무릎을 꿇고 "주여,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그렇게 겸허히 성령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맡겨본 적이 언제입니까? 성령의 사람, 참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굴복합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사람은 항상 성령을 거스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한다 성령을 거역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합니다. 52절을 보십시오.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이 말은 조금 어려운데, 너희 조상들이 도대체 핍박하지 않은 선지자들이 있었더냐? 너희 조상들이 한 행위는 선지자들을 언제나 핍박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선지자들을 핍박했는가? 그 다음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모든 선지자들을 다 핍박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선지자들을 골라가면서 지독하게 핍박하고 악착같이 죽였습니까? '선지자 가운데 의인이 오실 것이다'에서 이 의인이 누구입니까? 착한 사람입니까? 원어에 보면 대문자로 써놓았어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의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완벽한 의인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낼 것이다. 그는 사실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거야. 그는 죄가 없어. 그래서 그가 너희들의 모든 죄를 도말해 줄 것이다.' 선지자들이 한 얘기는 하나입니다. '의인이 오실 것이다. 하나님이 의인을 보내실 것이다. 메시아를 보내시고... 메시아, 메사이어, 크라이스트, 그리스도!'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 중 불순종한 사람들이 지은 죄는 무엇입니까? 의인이 오신다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골라가면서 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더 했어요. 그 다음을 보십시오.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누가 더 큰 죄인입니까? 의인이 오실 것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죽인 사람과 그 의인이 마침내 왔는데 그 의인을 죽인 사람들! 여러분, 이 설교가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찔렀는가를 상상하시겠습니까? 조상들이 의인을 죽였다는 것도 창피합니다. 조상 욕을 하는 것도 창피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얘기합니다. '너희가 그 의인을 죽였도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들은 십자가, 그렇게 많이 들은 복음인데 다시 그 마음 안에 감동을 느껴요. 마음이, 영이 살아나는 것을 느껴요. 찬송가를 그렇게 많이 불렀는데 보혈에 관한 찬송가를 부를 때면 그 마음에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요. 뜨거워져요.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기만 하면 마음에서부터 거부합니다. 윤리를 설교하면 좋아합니다. 상식을 설교하면 좋아합니다. 쾌락을 강조하면 눈을 반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면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이들은 마음에서부터 거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정말 십자가의 복음을 사랑하십니까? 갈보리 십자가를 사랑하십니까? 십자가와 관련된 찬송을 부를 때 감격이 넘치십니까? 십자가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여러분 마음에 꿈틀거림이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 속은 비어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비어있는 자신의 속을 바라보며 "주여, 기도하기를 내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결국 한 사람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는 원래 하나님과 본체이신 하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지으셨던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는 33년간 이 땅에 계시며 수많은 하나님의 나라를 교훈하셨고, 마지막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 분의 죄가 아니라 바로 내 죄 때문에, 내 잘못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붙들지 못하고 그는 사흘만에 완벽한 몸으로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십니다. 성령이 무엇을 얘기합니까? 언젠가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시는 날, 그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요, 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앉으신 바로 저와 여러분을-교회에 나왔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아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인가, 아닌가-심판하시기 위해 권세를 가지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순종의 사람은 이 복음을 거절합니다. 믿음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겁니다. '주님, 돈도 당신 것입니다. 내 생명도 당신 것입니다. 시간도, 내 인생도, 내 재능도 모두 당신 것입니다. 제 인생의 열쇠를 당신 앞에 넘겨드립니다. 주님, 저를 사용하시옵소서!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이것이 순종의 사람입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다닙니다. 성경도 읽습니다. 온갖 교회 봉사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문밖에 세워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사실을 보고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입니다.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사람 가운데 가장 수치스러운 사람이 누군 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면서, 성령도 알면서, 이렇게 피가 끓는 수많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자들! 수치입니다. 불순종의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거스릅니다. 불순종의 사람들은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를 바라봄으로 주님 앞에 여러분 인생의 주도권을 넘겨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3.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53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1절을 보세요. 그는 그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불신앙의 사람들은 수없는 설교를 듣고 수없는 예배와 말씀을 읽어도 순종치 않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목이 곧다고 표현합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꽉 차 있는 겁니다. 자기 경험이 제일입니다. 자기 지식이 제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을 곧게 하는 것이죠. 교만한 겁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입니다. 마음도 옛 마음이요 귀도 옛 귀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지만, 여전히 옛날 세상 소리의 하나로 들어버립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도 합니다.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나이 어립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저에 대해 섭섭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저의 말로 이 말씀을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경험으로 판단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지식으로 취사선택하지 마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귀를 열고 받으십시오. 예수님은 앞으로 장차 올 한 세상, 말세를 농사짓는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어른들은 다 알 겁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농사짓는 것을 압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틈이 나면 농사일을 도와주곤 했습니다. 나락, 벼를 다 베어 옵니다. 그 벼를 말립니다. 탈곡기를 경상도 말로 와룡이라고 합니다. 탈곡기를 발로 밟습니다. 저는 그것을 하다가 딸려 들어간 적도 있었어요. 아버지 흉내내고 한 단을 얹었더니 지탱을 못하고 딸려 들어가더라고요. 그래서 벼로부터 곡식을 다 분리해 냅니다. 마지막으로 하는 작업이 뭔지 아세요? 지금은 선풍기로 하지만 그때는 선풍기가 없었어요. 어른들이 큰 담요를 가지고 발로 밟고 부채를 부칩니다. 바람을 세게 일으켜요. 그러면 어머니들이 체에다가 곡식을 떨어뜨려요. 바람이 오면 알이 꽉 찬 곡식은 밑에 쌓여요. 그런데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데 안이 비어있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바람이 불 때 저 멀리 날려가 버립니다. 농부는 그 모든 날려간 나락들을 주워서 불태우는 겁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들어서 앞으로 장차 이러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신에게 닥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말씀을 왜 기록하셨는가?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이 말씀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겸허히 한번 성찰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교회 나오셨습니까? 직분을 받으셨습니까? 과거에

2.7시리즈를 끝내셨습니까? 성경공부를 많이 하셨습니까? 교사이십니까? 집사이십니까? 아니오. 지금 그것을 묻는 질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속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