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인이여, 울지 말라 (눅 07:11-17)

첨부 1


인생을 아동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좋은 시절이 청년기이다. 이 때는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아이들은 어서 커서 청년이 되고 싶어 하고, 청년기를 지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청년기에 머물려고 애쓴다. 그래서 유행가 가운데 청춘을 돌려달라는 노래도 있다.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의 청년이 죽음 앞에 처참하게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게 된다. 죽음은 청년의 청춘도 삼켜버리고, 여인의 아름다움도 짓밟아 버린다. 죽음은 희망도 허무로 만들고, 행복도 불행으로 바꿔 버린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도 빼앗아가고 만다. 죽음 앞에는 모든 것이 수포와 같고,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안타깝지만, 죽음은 노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청년에게도 찾아오고 어린아이에게도 찾아온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렇다. 누구라도 한 번은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어찌할 수 없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일 것이다.옛날 마케도니아의 왕 빌립에게는 이상한 직분을 맡은 신하가 한 명 있었다. 그 신하는 일정한 시간에 왕 앞에 나와서 “폐하여, 폐하는 반드시 돌아가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하고는 돌아가는 그런 직분이었다. 왕이 직무에 한창 바쁘든지, 왕이 식사를 하든지, 왕이 잠을 자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이 사람은 와서 왕의 죽음을 깨우쳐 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빌립 왕이 평소에 ‘나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과연 그는 지혜로운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인생을 사는 동안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고 살면, 진지하게 살 수 있고, 욕망에 찌들어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산다고 한들, 뭔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사실 없다. 죽음은 삶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기에 죽음을 정복하지 못하고는 인생은 비극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죽음을 물리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역사가 소개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갈릴리 지방 ‘나인’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그 동네를 향해서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과, 성문 ‘밖으로’ 나오는 다른 행렬이 서로 만나고 있다.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무리들의 행렬의 중심인물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제자들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무리들이 합세해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성문 밖으로 나오는 행렬의 중심인물은 누구인가? 죽은 청년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의 어머니이다. 죽은 시체는 말이 없는데 비해 살아 있는 그 어머니는 절규하고 있다. 죽은 자란 산 사람에게 슬픔만을 안겨 주는 것인가! 배고픔이나 질병이 육체적 고통이라면 슬픔은 마음의 고통이다. 본문은 가장 큰 슬픔을 당한 여인이 나온다. 슬픔 중에 제일 큰 슬픔은 가족을 잃은 슬픔이다. 우리나라에선 아무리 기쁜 잔치(생일, 결혼, 회갑)라도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의 슬픈 자리를 만나면 최하 3일장이다. 3일 동안 통곡하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의식을 잃을 때도 있다. 가장 극한 슬픔은 사별(死別)이다. 그가 있던 자리, 그가 쓰던 책상, 그가 입던 옷가지, 그가 먹던 밥 그릇, 수저, 해맑은 웃음소리, 안에 있으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밖에 있으면 안에서 부르는 음성이 귓전을 울리는데……. 그래서 그가 쓰던 것들을 처리하든지 태우는 것이리라. 슬픔을 잊기 위해서.

1. 본문의 여인은 남편을 영원히 사별하고 과부로 된 상황에서 다시금 유일의 소망인 무녀독남마저 죽었다.어머니에게 자녀는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한 존재이다. 그런데 남편을 잃고 외아들만 믿고 사는 이 과부에게 하나뿐인 아들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을까? 남편 없는 과부는 괄시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자기가 의지하던 남편이 죽은 후, 그 여인에게 남은 외아들은 유일한 소망이요, 기쁨이요, 생명이었을 것이다. 살아가기 힘든 상황에서도 “얘야, 너만 어서 커 다오”라고 하며 고생을 달게 참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던 것이다. 자기 남편하고도 사별했는데, 또다시 외아들마저 요절했던 것이다. 다윗의 셋째 아들(삼하3:3)인 압살롬은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군사를 몰고 쫓아 다녔다. 그러나 그 아들 압살롬이 죽자,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삼하18:33).그러자 요압 장군이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만일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삼하19:6).이렇게 불효자식이 죽어도 고통스러운데 유일의 소망이었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소망이 끊어진 것을 말한다. 더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부둥켜안고 통곡했을 것이다. “아이고! 이 무정한 것아, 어미 가슴에 못을 박고 그 나이에 먼저 가다니! 나는 어떻게 살라고? 눈 좀 떠봐라 이놈아!” 이 여인은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 행렬은 슬픔의 행렬이요 죽음의 행렬이요 절망의 행렬이었다.

2. 울지 말라(13)성문 밖으로 나오고 있는 행렬 가운데에서 죽은 청년의 어머니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무척이나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 행렬 가운데에서 대성통곡하며 따르는 여인이 바로 그 어머니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여인을 보셨다. 남편도 잃고 독자(獨子) 즉 외아들마저 잃어버린 가엾은 이 여인을 말이다. 주님의 눈길이 머문 곳은 바로 그 과부에게였다. 예수님의 눈은 언제나 마음이 상한 자들을 살피신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쌍하게 여기셨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13).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말인데, 그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님은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께서 이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얼마나 큰 동정과 사랑을 보내셨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상을 가서는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는 것이 예의이다.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 더욱더 깊은 조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굳이 인사말을 한다면 “얼마나 슬프십니까?”,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도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주에게 인사하기를 “호상(好喪)입니다”고 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장수했다고 하더라도 잘 돌아갔다고 하는 것은 상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그러면 예수님은 상을 당한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무어라고 하셨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울지 말라”(13)고 하셨다. 울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우는 자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방법은 함께 울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뜻을 새겨 본다면 “내가 너의 슬픔의 근원을 치료하여 줄 테니 울지 말거라”라는 말씀이다.

3. 청년아, 일어나라(7:14)젊은 연인들이 서로 입 맞추는 것도 살아서 뿐이다. 죽은 자와 입 맞추었다면 그 사랑이 소문날 것이다. 오직 생명에만 아름다움이 있다. 상여는 꽃으로 장식한다. 이 화려한 상여의 향방은 어디인가? 바로 공동묘지이다. 겉은 굉장하나, 속은 썩어가는 시체에서 악취가 풍긴다. 아무리 슬픔이 격하고, 분노가 솟구친다고 해도 길을 막으시는 예수님 앞에 멈추어야 한다. 멈추지 않고는 문제의 해결이 있을 수 없다. 유대교의 관습으로는 관의 뚜껑을 닫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관에 손을 대시는 분 앞에서 우리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장엄하며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16). 시체에 접촉하면 부정(不淨)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민19:11,16). 그런데 예수님은 관에 즉 죽은 시체에 손을 대셨다. 이것은 예수님은 생명을 율법 규정보다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에게는 시체의 부정이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정함이 시체에게 전달되어 시체마저도 정하게 되기 때문에 시체까지도 만지실 수 있는 것이다.주께서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 이 말씀은 장엄하고도 절대적인 명령이다. 그 명령 한 마디가 죽은 자를 생명의 세계로 되돌아오게 했다. 죽었던 그 청년이 이제 다시 살아나서 말도 하게 되었다. 불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겨자씨 이야기”에서 고타미라는 한 여성은 죽은 아들을 석가모니에게로 데리고 와서 그의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어떤 기적도 행치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다.“고타미여, 약을 구하러 여기 잘 왔도다. 도시로 들어가 샅샅이 돌아 보렴. 돌기 시작한 그 첫집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집안에 죽은 자가 아무도 없었던 집을 찾아내어 그 집에서 작은 겨자씨를 가져 오너라.”모든 집을 찾아 갔었지만, 그런 집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죽음이란 자기 집만 아니라 모든 자를 지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슬픔은 풀어지고, 아들을 묻었다. 석가모니는 삶의 지혜로 문제를 풀게 했던 것이다. 석가모니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인도했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근본인 죽음을 물리치시고 그 청년을 다시 살리셨다. 진정한 위로는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것외에는 없다. 주님은 그 청년을 다시 살리셔서 그 여인의 눈물을 닦아 주셨다. 슬픔의 근원을 제거해 주셨다.공동묘지로 가던 행렬을 해체시키시고 죽었다 다시 산 아들의 손을 잡고 방향을 바꾸어 동네로 다시 들어가는 기쁨의 행렬이 되었다. 장례 행렬이 변하여 생명의 행진이 되었다. 이 여인은 아들을 잃었던 절망감에서 다시 소망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죽음이 마지막 종착역이 아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부활할 것이다. 예수께서 함께 하시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예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시다.우리의 삶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꿨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잃음에서 다시 찾음으로 변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영원히 이별을 맛보아야 하는 삶에서 다시 만남으로, 다시 만날 기약을 갖게 되었다.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세상을 원망하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부활의 찬란한 아침을 기다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변화되었다. 이 모든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은혜인 것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풍성한 은혜를 누리길 바란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