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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아침이슬'과 '행진'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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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 준비 시절 즐겨 듣던 노래 아침이슬. 그 노래를 작곡한 김민기는 암울한 시대를 가슴으로 앓는 시인으로, 우리 또래의 우상이었다. 나는 언젠가는 그를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27년 뒤, 노래 <행진>을 히트시켰던 가수 전인권이 필로폰을 복용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법정에 김민기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갈색 재킷에 헐렁한 코르덴바지를 입은 그가 조심스럽게 증인석에 앉았다. 거무스름한 피부와 눈가의 주름이 그가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가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마약을 복용하는 이유가 뭐죠?”

재판장은 정직한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듯 진지하게 물었다.
“상업적인 노래로 급격히 인기가 오르는 가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기라는 거품은 곧 걷혀지고 대중들로부터 소외되기 마련이죠. 그때 느껴지는 공허감 때문에 마약에 손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정 안을 잔잔히 울리는 저음으로 그가 대답했다.
“스트레스 해소나 과중한 공연활동에서 오는 피로를 극복하기 위한 건 아닌가요?”

재판장이 구체적으로 물었다.
“물론 그런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기가 급격히 하락할 때 그 정신적 공허감을 메꾸기 위해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주일 전쯤이었다. 김민기와 친구인 모 일간지 부장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김민기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대학시절부터 스스로 낮은 데로 찾아갔다.

공장에 취업하여 노동자들의 상처받은 영혼과 함께 하고, 탄광 막장에서 광부 노릇도 했다. 신분을 속이고 검푸른 바다 위에서 고깃배를 타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농부가 되었다.

암울했던 시대에 상처 입은 사람들과 영혼을 나누면서, <아침이슬>을 비롯한 그의 노래들은 탄생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서 있는 피고인 전인권의 본질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법정에서 그에게 물었다.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수 전인권의 노래는 상업적인 대중 가요하고는 다릅니다. 저 친구는 노래에 자기의 전 영혼을 쏟아 붓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은 음악밖에 모르고 또 음악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약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온 말이었다. 돈이나 인기가 아닌 예술가의 길을 그는 얘기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검찰측 증인이 나왔다. 그는 필로폰 판매책으로, 검거되었을 때 수사관은 그에게 필로폰을 판 유명인이나 거물을 대라고 다그쳤다.

그 정보 제공의 대가는 자유였다. 그의 말 한 마디가 결정적인 증거인 셈이었다. 증인을 바라보는 전인권의 얼굴은 무언가 애원하는 듯했다. 하지만 증인은 칼날을 전인권의 등에 꽂는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필로폰을 탄 술병이 분명히 전인권에게 건네지는 것을 봤어요.”

말을 마친 증인은 무덤덤하게 먼 곳을 바라보았고, 전인권은 고개를 떨구었다. 유죄가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범죄는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그러한 감정은 순간적으로 자기 조절능력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유혹에 빠지면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 담 안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사람모두 예비 범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잘 관리하고 순간의 유혹을 이겨내는 지혜만 있다면 교도소 담 밖에서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선고 사흘 전 나는 교도소로 전인권을 찾아갔다. 그의 얼굴은 고통스런 감옥생활의 괴로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벌써 10개월 째 살고 있습니다. 정말 여기는 사람이 들어올 데가 아니에요.”

하얗게 탈색된 그의 푸석푸석한 얼굴은 환자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잘못을 저질러 본 다음에야 교만했던 눈길이 깊어지고 경박했던 입술이 무겁게 닫혀진다. 겸손이란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야 알아지는 건가 보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만약 나가게 된다면 정말 음악만 할 거예요. 무대에서 노래하다가 쓰러져 죽는 게 영광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너무 늦어 버린 깨달음이요, 늦어 버린 눈뜸일지라도 분명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혜가 아닌가. 그는 자기의 음악과 예술이 얼마나 귀한 보람인지를 알아가는 듯했다.
“김민기 형, 정말 고맙더라구요.”

물에 빠진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증인으로 나선 김민기였다. 그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사일 것이다.
랄프 트라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 진정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 무엇을 하든 무엇을 꿈꾸든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라.”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관을 지니고 스스로 발견한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꽃을 피워야 한다. 자신의 길이 잘못된 줄 알았다면 더 망설일 것 없이 곧 바른 길을 택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 뒤 전인권은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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