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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눈을 열어 주소서 (왕하 06: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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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열어 주소서(왕하6:14-17)사람의 신체 중에서 귀하지 않은 부분이 없고 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겠지만 눈은 정말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족을 못쓰는 것도 엄청난 아픔이겠지만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더욱 고통스런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보이는 세계를 내다보는 육신의 눈도 이처럼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영적인 눈인 줄로 믿습니다. 육신의 눈은 인생길을 안내하지만 영의 눈은 더욱 중요한 영혼의 길을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때때로 큰 위기를 만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절망적인 현실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에겐 믿음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문의 엘리사에게 이러한 영적인 세계를 보는 특별한 눈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시간에 "내 눈을 열어주소서!"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 때에 성령께서 우리들의 영적인 눈도 활짝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을 정복하려고 여러 차례 침략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치 이스라엘이 군사전략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공격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왕하6:8-10)"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내부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없는 부하들만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놀라운 말을 듣게 되었다.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 6:12)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어서 우리의 작전을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있는 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스라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를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군대를 보내었습니다. Ⅰ. 위기를 만난 엘리사와 사환의 반응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다는 정보를 얻은 아람왕은 많은 군사와 병거를 보내어 엘리사가 있는 성을 에워싸고 엘리사를 생포하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난 엘리사의 사환은 말소리, 병거소리가 들려서 성벽에 올라가 보니 엄청나게 많은 아람군대가 성읍을 에워 싼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너무나 놀란 사환은 급히 엘리사에게 달려가 부르짖습니다. "아,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왕하 6:15)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구절은 엘리사를 수종들던 사환이 경험했던 불안과 공포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환의 두려움은 무엇으로 비롯되었습니까? 엘리사의 사환은 절망적인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 불안과 공포에 떨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어떠한 때에, 왜 두려워합니까? 어떤 사람은 질병에 걸렸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기치 못했던 사고를 만났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파괴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이 낙심과 공포심은 사실 그 실제의 현실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것입니다. 1933년 3월 4일, 미국이 경제 불황의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있을 때 새로 선출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지금 미국이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가지게 된 공포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취임 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가장 큰 적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불안과 공포가 반드시 환경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 누구나가 맛보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결단코 현실의 괴로운 환경 때문에 동일하게 일어나는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똑같은 곤고와 고통과 괴로움에 직면했어도 어떤 사람은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엘리사와 그 사환이 같은 환경,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엘리사의 사환만이 아니라 엘리사도 같은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게 낙심하는 이유가 '왜 이렇게 나만 고통스러운가? 왜 나만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가?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는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영적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갈릴리 바다를 걸어 주님을 향해 가던 베드로는 잠시 바다위를 걸었지만 풍랑과 바다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그만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육신이 눈이 믿음의 눈을 가린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도행전 12장에서 나타나는 베드로의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영의 눈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칼에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베드로는 감옥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도 있었고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도 채찍으로 맞아 온 몸이 욱신거리는 고통과, 수족이 결박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었습니까? 동일한 환경속에서 어떤 사람은 평안을 소유하며 어떤 사람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차이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도단성을 포위하고 엘리사와 엘리사의 사환을 죽이려했던 아람군대는 그들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위협, 같은 두려운 환경 속에서도 문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각 차이로 인해 엘리사는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환은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군대와 많은 군사와 병거를 보았습니다. 이 말은 현실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육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아람군대와 같은 병마와 실패와 가난과 절박한 환경을 바라보며 견딜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무엇이 불행합니까?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에 상처와 고통을 주는 이 불안과 공포가 바로 우리가 맛보는 불행입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은 목회자들에게 이 세 가지를 강조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형편에 처했든지 긍정적인 신앙을 잃지 마라.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비젼을 보아라.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을 들어라. 저도 이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신앙을 가지면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믿음의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축복된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시마다 때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사는 아람군대가 에워싸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그는 영적인 시각, 자기를 둘러싼 하늘의 천군천사와 불만과 불병거를 통해 자기를 보호하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는 신령한 눈이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 귀한 영적 눈이 열려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환을 보십시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아니라 오직 아람군대의 말발굽소리와 군대의 수효였습니다. 믿음없는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지하여 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고 약속하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영으로서 분명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육체를 지닌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고는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절) 성도 여러분! 보이는 것을 믿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상식이요 경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믿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당면한 현실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현실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신령한 눈을 떠서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사십시다. 그러면 나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엘리사는 두려워 떠는 사환에게 "두려워 말라"(왕하 6장16절)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장 16절) 엘리사는 영적인 눈으로 상황을 바라볼 때에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아람군대보다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더 많고 강하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들을 어떤 형편에 처했을 때에라도 여러분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들이 사방이 다 막혀 있어서 도무지 구원의 소망이 없는 상태에 놓였더라도 반드시 구원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아무도 우리를 도와 줄 수 없는 형편에 있을 때에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요 14:16)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망에 빠져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의 눈을 떠서 우리를 도우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군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할꼬." (시편 118:6)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를 낙심케하고 불신케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생활 곳곳에서 체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제일 확실한 줄로 알고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와는 정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것은 마치 아침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은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눈,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뜻을 발견하는 신령한 눈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케 하는 능력이 됩니다. Ⅱ. 하나님이여! 내 어두운 눈을 열어주소서

1. 세상의 눈이 영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가 영의 눈이 열려야만 승리할 수 있는데 우리의 영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 세력은 눈에 보이는 세상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조상들의 죄 때문입니까?"(요9: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고 말씀하시고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시자 곁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 왜 소경을 고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요한복음 9: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함이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자라도 눈을 뜨고,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는 본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의 눈을 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분노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면서도 다 보고 사는 줄로 착각합니다. 자기는 다 본 다고 착각하면서 살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달려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파키스탄의 시골에서 진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검은 소 두 마리가 열심히 연자맷돌을 돌리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소들의 눈을 새까만 보자기로 가려놓은 것이었습니다.그는 동행하는 현지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주인을 위해 땀을 흘려 일하는데 왜 눈을 가렸습니까” 그러자 현지인이 대답했습니다. “어리석은 짐승이라 눈을 뜨게 하고 연자맷돌을 돌리게 하면 제자리를 계속 도는 것에 지쳐 그만 주저앉게 됩니다. 하지만 눈을 가려놓고 회초리로 때리면 멀리 가는 줄로 알고 열심히 뛴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이 목적도 없이 바쁘게 달려만 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헤밍웨이는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 그리고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물을 필요조차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참혹하게도 자살로 자기의 소중한 인생을 끊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한 부자가 소출이 많아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많은 곡식을 저장하기 위해 곳간을 새로이 짓고 거기에 그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고 만족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적으로는 아주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자식들까지 여러 해 쓸 돈을 준비해 놓은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몇 년 쓸 물질은 준비하면서도 자기 영혼에 대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부르시면 그가 준비했던 재물마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로 착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영의 눈이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이 돈벌고,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권력을 갖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사는 동안 큰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다가 가는 것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주 예수 안에서 믿음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드리고 있다고 한 다음, "너희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엡 1:18) 알게 되기를 원한다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된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영의 눈이 밝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소망은 오히려 별 것 아닌 것 같이 보이고 세상의 눈에 좋아 보이는 소망이 참된 소망인 것으로 알고 그것만을 향해서 인생을 불태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적으로 말하면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자 되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합니다. 또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깨닫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8). 우리의 눈을 환하게 닦아주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오로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보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영적으로 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반드시 영적으로 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영의 눈을 뜰 수가 있겠습니까?

2. 기도해야 영의 눈이 열립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역사가 내 눈에 보입니다. 어떻게 해서 엘리사는 영안이 열리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의 선생님인 엘리야를 열심히 섬기면서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하 2:3-14). 엘리사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구했고,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엘리사의 기도처럼 "하나님!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 주옵소서.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를 볼 수 없었던 아침에 일찍 이러한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그 사환의 눈을 열어서 하늘의 군대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17절에 "엘리사가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데 저의 눈을 여시고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영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없는 것을 꾸며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인데 자기 혼자만 볼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늘 군대의 불 말과 불 병거는 엘리사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의 사환의 눈이 열리니 사환도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영안을 열어 주셔서 이 시대의 불안과 공포를 벗어날 수 있는 축복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안이 열리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함으로 영의 눈이 열리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영의 눈이 열리면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합니다. 또한 우리의 현실과 상황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이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보이는 현실 세계만을 바라보면 불안과 공포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기백성을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때에는 기쁨과 용기와 확신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받는 환난이 지겹고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끝내고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이 세상 환난은 심각하지 않습니다. 환난이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도 영의 눈이 열려있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절) 바울은 항상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환난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영광의 상이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을 때에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4절) 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오늘의 환난보다 내일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환난 가운데서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3,4절)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환난 가운데서도 천국의 소망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환난 가운데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의 면류관'을 생각하면서, 낙심하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슬픔과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슬픔이 기쁨이 되고 불행이 행복이 되고 좌절이 희망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현실 앞에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잡히는 것들이 흩어졌다고 낙담하지 맙시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들은 사라져 버렸지만, 새로운 세계, 영원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꼭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영의 눈이 열리면 승리합니다. 불안과 공포는 믿음이 강할 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시편 3편 6절에서는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했고, 시편 27편 3절에서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단성을 둘러싼 아람군대를 보고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환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엘리사와 같이 담대하게 이겨내십니까? 아니면 그의 사환처럼 두려워하십니까? 지금 무슨 문제에 둘러 싸여 있습니까? 믿음의 눈, 영의 눈으로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만나 주시고, 믿는 자와 함께 하시며, 보이지 않는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세상에 지배를 받는 자는 겉만 그리스도인일 뿐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능력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요 목표입니다. 성도 여러분! 눈을 들어 능력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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