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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 (고전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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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고전15:1-8)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 위에 서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시공간(時空間)의 인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처럼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한 수많은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모두가 다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복음을 전하다가 자기 목숨을 잃기까지 했는데,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수많은 순교자들이 스스로 거짓말에 속아서 그 거짓말을 유포하다가 목숨을 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의 진실성을 논증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셨던 사례들을 그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 부활하신 모습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는데, 제일 먼저는 게바, 즉 베드로에게 보이셨고 그 후에 열 두 제자에게도 보이셨으며, 그리고 그 후에는 오백여 성도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일시에 그들에게 그 부활의 몸을 보이셨는데, 그러한 부활의 목격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이 전도 활동을 하던 그 당시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후에는 예수님의 친형제인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으며 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자기에게도 그 영광된 부활의 모습을 보이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격했는데, 어떻게 자기를 비롯하여 복음 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거짓말일 수가 있겠느냐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 외에도 여러 차례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용기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처럼 부활하신 모습을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지만, 그러한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오늘날 현대인들의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히 비효과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라면, 그리고 그런 복음의 핵심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예수님은 그 부활하신 모습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빌라도나 로마의 황제, 또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다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러한 유력한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면 기독교 복음이 훨씬 더 빨리 퍼져 나가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로마의 통치를 받는 지역 내에는 여러 곳에 대규모의 원형 극장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수시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대형 집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경기장에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대개가 이름 없는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로서 그녀는 과거에 일곱 귀신이 들렸었던 비천한 신분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나 주신 제자들도 다 한결같이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이렇다 할 사회적인 영향력이 거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자 가운데 세상적인 조건들을 그런 대로 갖춘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 한 사람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부활하시고 나서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좀더 효과적으로 과시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힘이 있고 권력이 있은 자들에 나타나시거나, 또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는 대형 경기장에 그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다락방이나 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사회적으로 능력도 없고 힘도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만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셨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하시는 원리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퍼져 나가는 기본 원리를 깨달아야 할 줄로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시면서도 늘 겸손한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사역을 하셨습니다. 수많은 인파들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직 소수의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된 그들에게 증인의 사역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이후에도 예수님은 오늘날의 현대 교회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매스컴을 이용하는 등 과시적인 방식으로 떠들어대며 그 부활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가난하고 겸비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 비록 때로는 연약하여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며, 그러한 그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과 복음은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좋아하는 물량주의적이고 과시주의적인 그런 방식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수십만의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집단적인 세력을 과시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형 교회를 짓고 교회에서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들이 나온다고 해서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의 증인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본 사람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그 인격과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 의해서만이 진실한 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노라고 하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위선적이고 세속적인 야망을 버리지 못한 수십,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있는 비 기독교인들을 조금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 사이트들 중에 기독교를 비방하고 부정하는 소위 안티 기독교 사이트의 운영자들 가운데는 중고등부 시절에 교회에 나가서 학습까지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런 사람이 자기 돈과 정력을 허비해 가며 기독교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 한국교회가 외형적인 숫자와 외형적인 건물의 크기는 과시하면서도 진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하고 인격이 변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외적으로는 평안한 듯 하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나 영적인 측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공격이 드세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나팔을 불며 떠들어대거나 외적인 숫자나 건물을 가지고 과시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변화된 인격과 삶을 통해서 부활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새로운 결단과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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