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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집은 위험합니다 (눅 11: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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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은 위험합니다(눅11:21-28)빈집은 위험합니다 미국 교회의 오래 전 통계에 따르면 벤치워머, 즉 예배당 방석만 따뜻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 약 95%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성전 뜰만 밟는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요. 지금 여러분은 혹시 영적인 삶을 외면한 채 성전 뜰만 밟는 벤치워머가 아닙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한 사람으로부터 쫓겨난 귀신이 다시 들어갈 곳을 찾아 여기저기 다녀보다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하자 전에 쫓겨났던 곳으로 가보았더니 그 집이 잘 청소되고 수리되었는데 주인이 없으므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어 그 사람의 형편이 처음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빈집은 위험합니다. 칼빈(John Calvin)은 사람은 말과 같아서 누가 타느냐에 따라 가는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누가 주인이 되어서 그 마음을 주장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모든 형편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빈집은 보기 흉한 폐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경우를 가리켜 빈집이라고 말합니까?Ⅰ. 회개했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빈집입니다.회개는 했어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드리지 못하면 그 사람은 주인 없는 빈집과 같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죄를 뉘우치고 과거의 잘못된 생활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와 믿음은 늘 함께 있어야 합니다. 회개로만 만족해서는 안되고 새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만 빈집이 위험을 면하게 됩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회개의 세례는 받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집은 소제되고 수리되었지만 빈집으로 그냥 놔둔 것입니다.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세상에 나아가서 사는 삶이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셔서 자신을 주장하도록 하지 못하면 그것은 빈집일 수 있습니다. 회개는 했지만 예수를 구주로 삼지 못하는 어리석은 결과가 되고 맙니다. 이런 경우를 예수님은 개가 토한 음식을 다시 먹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빈집은 위태롭습니다. 이전보다도 더 심각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어 양심의 가책도 받고 말씀으로 찔림을 받아 그 죄를 회개했다면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주님과 함께 새 길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회개만 하고 새 길로 가지 못하면 점점 양심이 둔해지고, 자신의 거듭되는 잘못을 합리화시키게 됩니다. 이는 결국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더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이는 것입니다.Ⅱ. 새 주인이 주관하시도록 온전히 맡기지 않으면 빈집입니다.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영접해 들였다면 이제 그 분이 나의 모든 삶, 인격, 생각, 언행을 주장하시도록 그 분에게 주권을 이양해 드려야만 빈집이 되지 않습니다. 가령 늘 함께 살던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거나 다른 곳으로 오랫동안 출타하게 되면 우리는 "집이 텅 빈 것 같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다고 해도 그 분께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겨드리지 못하고 예수의 영이 나를 주장하도록 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빈집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예수의 영이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21절에서 예수님은 '강한 자가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는 그 소유가 안전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온전히 지키실 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온전히 지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분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뜻에 내 의지를 온전히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주권을 완전히 맡겨드릴 때 비로소 빈집이 아닌 주인 있는 집이 됩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여러분을 주관하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감동을 받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내 의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양심이 맑아집니다. 더 깨끗하고 온유한 인격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예수의 영이 여러분을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맡기십시오. 성령이 예수님께 임할 때 말씀을 전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기도 하셨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령에 붙잡혀 이 모든 사역을 감당했다면 그 성령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그 분의 의지대로 맡기고 살아갈 때 우리는 빈집이 아닌 주인 있는 집입니다.Ⅲ. 새로운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빈집입니다.죄를 회개함으로써 옛 생활을 정리한 후에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들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나를 주장함으로써 그 분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 즉 성령충만한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한 삶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면서 길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랑하는 의 자체를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 속에 성령의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가 아니라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만일 우리들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고백하며 예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분명히 빈집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님은 왼편에 있는 무리를 질타하십니다. 그러자 왼편의 무리들이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이 때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열매 없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주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이고 신비한 일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의 귀한 열매들이 외적으로 맺혀지는 것입니다. 엡 4:25-28절 말씀처럼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참말을 해야 합니다. 도적질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거기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 힘써 수고하며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인 후에 자신이 토색한 물건에 대해 4배로 갚고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그 후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영이 삭개오 안에 계셨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열매입니다.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혀지면 반대로 악한 영의 역사는 점점 약해지고 사라지고 맙니다. 나무는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그 열매를 봐서 알게 됩니다. 내가 지금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느냐, 아니면 과거의 내 인격대로 열매를 맺고 있느냐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한 여인이 감동을 받아 소리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열매맺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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