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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번제 (출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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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7장까지의 서론이다. 그래서 1-7장까지의 총 서론은 1:1-2절 그 말씀이 되겠다. 거기 보면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자손이 나에게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드려라 그런 말이 있다. 그리고 나서 그 예물이 번제의 예물이거든 하고 3절부터 번제로 들어가고 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여호와께 예물 드리는 법을 이르셨다.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신 이 부르심은 여호와께서 회막의 영광중에 임하신 후 첫 부르심이며 이 부르심이 여호와께서 회막중에 임하신 이유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중에 거하시며 그들과 한 식탁에서 교제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자손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일년된 어린양 한 마리로 번제를 화제로 드려 향내하는 냄새가 되게하고 그 번제와 함께 고운 에바 십분의 일에 찧은 기름 힌에 사분의 일에 더한 소제와 포도주 사분의 일의 전제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도록 드리도록 명하심을 받았다. 이것이 이스라엘자손이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예물을 드리는 번제이며 여호와께서 번제단에서 그들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출애굽기29에서 성소를 지으라는 명령을 하고 나서 그 성소에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제사장이 하는 봉사를 29장에 말씀하고 있는데 거기 방금 읽은 내용이 있다.

제사장이 할일은 무엇이냐? 아침 저녁으로 어린 양 한 마리로 내게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아침 저녁이 한 마리씩을 드리는데 그 한 마리 마다 소제로 에바 십분의 일 고운 곡식가루를 드리는데 거기에다 기름을 섞어서 드려야 되고 그것과 함께 힌 사분의 일에 포도주를 나한테 드려라. 그러니까 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 이것을 아침과 저녁으로 나에게 드려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늘 드리는 번제다. 그렇게 했다.

핵심은 번제인데 번제와 함께 드려지는 것이 소제와 전제다. 그것이 이스라엘백성의 제사장이 그 민족을 대신해서 아침과 저녁으로 대대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번제단 예물을 드리는 번제단은 어떤 곳이냐? 내가 거기서 너희들을 만나리라 그렇게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식탁의 교제로 만나시는데 번제단이 식탁이고 아침과 저녁은 하루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고 거기다 번제를 드리는데 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려라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식탁이다. 그래서 거기 고기가 있고 고운 기름 가루가 있고 즐거움의 잔이 있고 그것은 나에게 드려라 그것이 이스라엘백성을 하나님이 자기 거룩한 성소로 삼으시고 그 성소를 봉사하는 제사장을 세운 이유가 무엇이냐 그들로 하나님 앞에 번제드리는 백성이 되게 할려고 부르셨고 그 번제단에서 내가 너희들을 만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레위기전에 먼저 출애굽기에서 성소에 대한 제도를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회막을 지으시고 처음 모세를 불렀는데 부르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나에게 예물을 드리려거든 이렇게 드려라 그것이 출애굽기 29장에 이미 언약 체결의 3장소로서 성소를 지었을 때 있었던 말씀인데 바로 그 언약의 교제를 지금 레위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레위기의 5대 제사법은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제사가 아니다. 공식적인 제사는 출애굽기 29장에 보면 민족적으로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번제 그 번제하고는 다르다. 또 그들이 절기 때 드리는 공식적인 제사들이 있다. 그런 것하고는 다르다.
그 공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나님께 나와아 향기로운 예물을 드리게 하시며 부지중에 죄를 지은 경우에라도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시는 은혜의 제도를 말씀하신다. 이것은 민족적인 공적인 문제보다도 개인들에 대한 문제가 앞서 있다.

그러면 여기보면 향내하는 제사와 속죄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가 있는데 실은 속죄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와 목표는 같다고 그랬다. 죄를 속하는 것이 중심이어도 그 기름을 하나님의 번제물 위해서 태우면 하나님 앞에 향내가 된다. 그리고 그 제물은 속죄제를 드렸던 제사장이 먹는다. 그러니까 다 번제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자손중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자 하면 그는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드려야 한다. 소나 양에 미치지 못한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여호와의 배려이다.

꼭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는 속죄제물에서 나온다. 만일에 염소로 못 드리면 어린 양으로 드려라. 이제 그런데서 나오는 것이고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도 되지만 하나님이 다양하게 잡수시는 것이지. 소도 양도 새도 받고 그러니까 모든 것으로 내게 드려라 그런 말하고 같다.
거기다 하나 더 집어 넣어라 모든 제물을 기뻐받으시며 그리고 가난한자를 위한 배려도 된다.
가령 왜 모든 것을 받으신다고 해석을 하냐면 소제물을 보면 기름가루로 드리는데 요리법이 다양하다. 그냥 중국 빵처럼 화덕 속에서 구워서 드린 것도 있고 우리나라 처럼 후라이 판에 지져서 드린 것도 있고 가루 그대로 드린 것도 있고 여러 방법이 있다. 요리를 다양하게 한다. 그런데 비쳐보면 전체를 받으신다는 다양함이 되겠고 속죄제물을 보면 이런 저런 것을 드릴 만한 힘이 없거든 그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가 된다.
예수님 부모는 전부 비둘기로 드렸다. 그 경우는 아마 가난한 자의 예물이 될것이다.

번제의 예물
이 번제의 예물을 보면 세 가지로 드리도록 되어있다. 예물을 번제로 드릴려면 다 태워 드릴려면 소나 양이나 염소의 수컷으로 드리면 새를 번제로 드릴려면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아야 한다. 이러한 등급의 차이는 가난한 자도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 향내하는 예물을 드리기 위함이다.

이것을 가축으로 드려라 하는 것은 실은 가축이 그들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이지요? 가령 사슴으로 드려라 그러면 그것은 드리기가 어렵겠지요. 가축은 항상 그 가족에게 주어진 생명의 선물들이다. 그래서 가축으로 드리라는 것이지 들 짐승은 아직 길이 안들여졌으니까 길들여 진것으로 드려라 해가지고 도덕적으로 풀면 안된다 그 말이다. 여기서 가축으로 드리라 그 말은 말 잘 듣는것 온유한것 예수님도 하나님 말 잘들었고 이런 식으로 도덕적으로 막 접근하면 안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면 여기 보면 소로 드리는 것하고 또 양이나 염소로 드린 것하고 자세히 읽어보면 약간씩 차이가 날것이다.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같은데 설명하는 과정의 강조점들이 다를 것인데 이것은 제사법의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약간씩 강조를 두면서 전체를 강조하는 방법이다. 가령 소를 읽어보면 여호와앞 회막 문 앞에서 잡아라 그렇게 되어 있고 양이나 염소를 보면 여호와의 단 북편에서 잡아라 그런 말이 있다. 또 새를 드렸을 때는 멱통과 더러운것은 회막 박 재 버리는 곳에 버려라 그랬거든요. 그러면 소를 잡았을 때는 똥은 어디다 버릴것인가 그런 말은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체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 소 똥은 어디다 버리라는 말이 없으니까 어떻게 할줄 모르고 새 똥은 어디 버릴 장소가 있는데 그런 말이 읽어보면 없다. 그러니까 그런 차이점들은 제사의 차이점들을 말하면서 전체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읽어야지 그것은 따로 따로 특징으로 읽어서는 읽을 수가 없게 되어있다.

가령 염소나 양으로 드렸을 때 기름은 머리를 베어내고 꼬리에 기름을 베어내고 이렇게 일일이 기름을 떠 내는 방법까지 있는데 소는 그런 말이 없다. 소는 각을 뜨고 머리를 따로 자르고 꼬리에서 기름을 베어내고 그런 말은 없다. 그러면 양이나 염소는 꼬리가 기름지지만 소 꼬리는 기름이 없는 것인가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전체를 통해서 번제를 드리는 법을 그냥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번제 예물의 특징은 이제 다른 것하고 비교를 해봐야 되겠지요. 회막 문 여호와앞 단에서 전체를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다. 번제의 특징은 전체로 불살라서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번제의 특징이다. 제일 끝에 항상 반복되기는 향기로운 냄새가 되니라 그 말로 계속 끝나고 있다. 전체를 불살라서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것이 번제의 특징이다.

이것이 번제와 다른 제사와의 차이점이다. 전체를 화제로 드리는 번제가 모든 제사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단의 이름을 번제단이라고 칭합니다. 여기서는 번제단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 앞 단 회막문 앞 이렇게 되어있는데 다른 제사에서는 번제단이라고 언급을 한다. 여기서는 회막문 여호와 앞 단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회막 문인데 여호와 앞에 있는 단이라 거기서 내가 너를 만나리라. 그전에는 모세를 지성소에서 만난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단에서 만나리라. 그런 의미로 여호와 앞 회막 앞 단이다.

그러므로 단의 이름을 번제단이라고 칭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아침과 저녁으로 항상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는 백성으로 번제를 드리는 백성으로 구원된 것이다. 거기서도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라 그랬지 다른 제사를 드리라고 안했다. 그리고 소제와 전제를 번제와 함께 드리지 그것은 아침과 저녁의 상번제지 그렇게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물론 구별하면 아침 소제도 되겠지만 항상 번제에다가 강조를 두고 있다. 그러니까 이 번제가 모든 제사의 핵심 근본 토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번제 드리는 백성으로 구원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은 제사는 번제단에 불태워 드리는 것으로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번제 전체를 다 태워드려서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하는 번제가 모든 제사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다.
제물의 머리에 드리는 자가 안수 함으로 속죄가 되는 것은 지난 시간에 했지요. 제물이 드리는 자를 대신하여 드려지기 때문에 속죄가 되는 것이다. 모리아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드리도록 여호와께서 친히 예비하신 번제의 수양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백성으로 서 있는 토대요 생명의 의미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전 생명으로 하나님을 헌신하는 여호와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면 이 번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디서 나타나냐? 물론 아브라함도 가나안 땅에서 번제를 드렸지만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렸을 때 하나님이 대신 예비하신 수 양이 있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나라를 상속할 자가 누구냐 이삭이다. 이삭을 따라 상속한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이 드리라고 그랬다. 그래서 진짜 드릴려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대신 수양을 예비해서 이삭이 아버지와 함께 수양을 번제로 드리고 자기는 살았다. 실제로 이삭을 드리는 것이다. 이삭을 대신해서 수양이 드려진 것이다. 대신해서 드린다는 의미로 속죄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토대는 어디냐 이삭이다. 그러니까 이삭은 상속이기는 상속자인데도 어떤 의미로 상속자냐? 자기의 전 생명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로서 상속자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이번제드리는 백성으로 구원되었는데 그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림으로 그들의 전 생명을 헌신하는 백성으로 구원된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토대요 삶의 의미다.
드리는 자가 제물에 안수하여 드리는 자와 제물을 일치해서 드리도록 했다. 안수하는 것은 일치의 행위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사 먹도록 하신 생명의 선물과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사는 생명이 일치된다. 왜 그 제물을 대신해서 드리도록 했는가. 제물과 그들이 일치되기 때문에 그렇다. 먹을 것을 주었으면 그것을 먹는자와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먹을 것에서 나타난다. 그 먹는 것이 부정하는 그 먹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부정하고 먹을 것이 거룩하면 그것을 먹는 자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그 먹을 것을 하나님으 성소에 드리면 그것을 먹는 자가 하나님이 성소에서 나오고 드려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하는 관계로 먹을 것을 주셧다. 그러니까 우리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주의 상에서 그의 몸에 참여하는 생명의 교제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가르치는 방식이다.

그렇게 안수해서 드리면 일치시키는 것이고 대신해서 드림으로 속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식탁에 오르는 모든 것으로 여호와께 드리지 못하고 그들에게 주신 식물중에서 흠 없는 생축과 고운 기름가루를 여호와의 식물로 드린다. 여기서는 소제니까 소제에서 기름가루가 나오고 번제에서는 기름가루는 안나오지만 모든 제사들을 보면 생축 즉 가축으로 드려야 되고 고운 기름가루로 드려야 되고 나머지 것으로 드리면 안된다. 마침 사슴을 한 마리 잡았다고 사슴으로 드린다거나 노루로 드린 다거나 그렇게 드리면 안되고 가축중에서 드려라 그런 말이다.

그것도 흠 없는 것을 드려야 된다. 가루는 고운가루에 기름을 섞어야 된다. 그러니까 흠 없다 또는 기름을 섞었다 하는 것은 생명의 온전함과 그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부정함과 죽음의 권세 아래서 먹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휘장 밖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부정함에 쌓여서 먹었다. 부정한 중에 일부만 정결하다. 다 먹으면 부정하고 진 밖으로 나가야 되고 먹을 수 있도록 주신 일부만 정결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부정함에 쌓여서 먹은 것이고 그것 까지라도 죽어버리면 먹어서는 안된다. 왜 죽음의 권세가 거기 있으니까. 그러니까 부정함과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는 먹음은 아직은 주어지지 안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 밖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상에서 곧 성소에서는 어떻게 먹느냐? 거기 보니까 기름지고 흠이 없고 그것이 성소의 양식이다. 그래서 성소의 양식에는 생명의 온전함과 풍성함이 있고 거기는 말하자면 이것을 먹으면 부정하니 진 밖으로 나가라 하는 그런 갇혀서 먹는 그런 방식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것 중에 가축으로 상품으로 먹는 것이다.

여호와는 생명의 온전함과 풍성함으로 그들의 봉사를 받으시어 가나안 땅의 생명을 성소의 교제의 생명으로 거룩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 밖에서 먹는 것은 부정함과 죽음의 권세 아래서 먹는 것인데 그것 중에서 흠이 없고 기름진 것을 내게로 가져와라 해서 하나님 성소의 양식으로 구별하셨으니 그들이 죽음과 부정으로 쌓여 있는 생명의 교제를 하나님의 성소의 있는 생명의 온전함과 풍성한 교제의 생명으로 복주셨다. 그것이 성소 안에 있는 먹고 마심이다.

그러나 제물을 먼저 드리는 임자에 의해서 죽여지고 임자가 제사장이 하는 일인데 임자가 직접 단에는 드리지 못하고 임자가 하는 것은 죽이고 씻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 단에 드리는 것은 아론 자손 제사장에 의해서 그 피가 단에 뿌려지고 그리고 그 후에 제사장에 의해서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회제로 드려졌다. 제사는 일단계 이단계가 있는데 먼저 임자가 안수하고 죽이면 그 피를 아론 자손 제사장이 단에 뿌리고 그것이 일단계다. 그 다음에는 각을 뜨고 그리고 더러운 것을 씻으면 아론 자손 제사장이 단에다가 태워 드리고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두 과정이 있다. 임자와 제사장 또 제물을 구체적으로 드리는 것도 먼저 피를 뿌리는 일단계와 제물을 불사르는 이단계로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 그리해야 하나님께 열납되고 향내가 되었다. 성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옷&51078;은 아론 자손 제사장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식탁을 봉사하도록 중보자로 세우셨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성소에서 봉사하는 자는 제사장이다. 그러면 ㅊ에서 제사장은 성소의 영광으로 옷입고 자이다. 백성들은 아직 성소의 영광으로 옷 입지를 못하고 성소 밖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회막 안으로 부르셔서 나에게 예물을 드리고 싶으냐? 가지고 와라 너희 들이 먹는 것은 부정에 쌓였고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것이 아니냐 내 앞에서 먹는 것은 생명이 온전하고 풍성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나안 땅에 있는 생명의 교제를 성소의 거룩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고 제사장이 하는 일을 백성이 다 볼 수 있다. 성소의 뜰이니까. 그런데 임자는 죽이고 씻는 일만 하고 임자는 죽이는 일을 하면 그 죽음을 당한 제물의 피를 제사장이 단에 뿌리고 그리고 각을 뜨고 씻으면 제사장이 그것은 하나님 단에 불사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향내하는 제사가 된다. 그러니까 백성은 대신해서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덧 입은 자를 제단을 봉사하도록 세워 주신 것이다. 백성은 직접 나가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덧입은 제사장을 그 중제자로 세우셔서 백성의 봉사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로 세우셨다. 그것이 지금 ㅊ에게서 말하는 중보자에 대한 은혜다.

이스라엘 자손을 땅의 성소에서 아론 자손 제사장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의 생명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제 하늘보좌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의 것으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도록 교회를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사 속죄가 되사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사는 권세를 하나님께 향내나는 생명으로 거룩하게 하셨다. 지금 이 은혜의 일을 신약 교회에서 완성하셨는데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부르셨는가? 이제는 아론 자손 제사장을 세운것이 아니다. 아론 자손 제사장은 땅에 있는 성소에서 봉사하는 중보자다. 가나안 땅에 땅에 있는 성소의 중보자다. 그는 나오면 하나님의 번제단 앞에까지 밖에 못 나간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생명의 복이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아론 자손 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교회의 중보자로 세우셔서 그는 우리는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고 그랬을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를 대신한 제물이 되어서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셨다. 짐승의 피로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자기 피로 나아가셨다. 그렇게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데 가나안 땅에서 흠이 없고 기름진 극상품으로 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가나안 땅의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사를 지낸다. 왜냐하면 이제 가나안 땅의 성소가 아니라 예수안에서 이제는 하늘의 보좌를 열으셨고 이제는 구약 성소를 따른 정하고 부정한 영역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정결케 하신 아들의 죽으심안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도록 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도록 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번제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런 의미로 우리의 번제물이요 우리의 제사장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번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이다. 그렇게 할려고 부르셨다 그 말이다.
지금 여러분이 헌금하면 목사가 기도하는 것은 교회를 대표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드디어 그때 기도하면 올라가고 그런 구약 적인 개념을 가져오면 안된다. 교회가 모여서 예배 의식을 따라서 교회를 대표해서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이지 기도하기 전에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헌금하면 단에다 일일이 올려놓고 여기서 드디어 올라가고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그리고 올릴때도 두 손으로 올려야 된다. 가벼운 것인데 두 손으로 올리는 것이 나쁘다 그 말이 아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바친 식으로 조심해서 올리지 말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청교도들 예배모범 같으면 말하자면 여기다 올려 놓지 말고 기도하라고 할 정도로 이야기 할 정도다. 왜냐하면 그렇게 종교 의식이 위험한 것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자가 교회를 대표해서 감사 기도하는 것이지 드디어 여기서 새로운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더구나 교회가 몸으로서 예배를 드리는데 개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이 드린데로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미신적이고 아주 사악한 일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지금은 여기서는 차이점을 따라서만 강론한다. 지난 시간에서는 공통점을 따라서 이미 말을 했기 때문에 차이점에다 강조를 두어서 5대 제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이해를 하라.

역사의 처음부터 사람들이 드린 것은 번제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체를 태워드리는 것이 토대요 근본적인 의미다. 그래서 모든 제물을 번제적인 의미로 태워드린다. 기름을 태우드라도 번제적인 의미로 태워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예식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낼 때는 언제든지 속죄제물이 앞선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번제를 태우고 화목제물을 태우는 것이다. 그때는 항상 속죄가 앞서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물을 드린다 했을 때 특성은 번제에 있다. 전체를 태워 드리는 번제이다.

여기 보니까 비둘기는 찢지 말고 드리라고 그랬다. 찢을 것도 없이 조그만 새니까. 그런데 여기 털을 뜯으라는 말도 없으니까 그냥 드린가는 모르겠다. 이것도 가죽을 벗기는가?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잘 알겠지요.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제사 지낼때 새를 쪼갰다. 가운데 쪼개는 것이 날개 있는데 쪼개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제사를 잘 못 드려서 하나님앞에 벌 받아서 백성들이 430년동안 종 살이 했다는 말은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고 잘 못된 이야기다. 본래 새의 제물은 쪼개서 드리면 되고 각을 뜨고 그런 것은 아니다. 새 머리에다가 안수 할필요 없겠지요. 손가락을 올려 놓고기 그런데 그러니까 새의 제물에는 안수하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안수하라는 말은 처음 소나 염소나 양에 안수하도록 되어있다. 거기서 이미 나타난 이야기다. 그러니까 전체로 해석할 문제지 새는 안수하지 안해도 되고 이런 식으로 해석할 것은 아니다 그 말이다.

나중에 보면 단의 거의 번제의 단으로 묘사를 한다. 여기서는 번제의 단으로 묘사를 하지 않고 여호와의 회막문 단 앞 그렇게 말하고 있다. 거기서 만나는 것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들아에서 화목하셨다. 하나님이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셨다. 화목은 아버지로부터 출발된 것이지 아들로부터 출발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출발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법정적인 개념으로 진노를 푸는 개념으로 들어가면 안된다.

그러면 예수님의 어떤 면에 번제적이냐 줄긋기 할려고 물을 필요 없다. 히브리서에는 모든 제물에 대해서 말하고 구태여 붇이자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번제와 속죄제 그런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이제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시편같은데서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외식을 싫어하고 진심을 원한다는 그런 문맥이 아니라 이전의 소나 양의 제물로는 온전함이 없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시고 한 몸을 예비하셨다. 그렇게 해서 구약의 완성자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구태여 듣자면 그가 아버지의 뜻을 기뻐하셔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기뻐하는 것이 그의 전 생명이다. 그런 의미로 번제물이 된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읽을 때까지라도 히브리 단어로 풀어서는 안되고 이 책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단어를 채워줘야 한다. 가령 번제 하면 태워드린다 하는 단어로 풀지 말고 여기 있는 번제는 이렇게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자로 써 있다고 해서 한자 풀이 해서는 안되고 화목제라는 말도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상에 드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교제의 제물을 화목제라고 그런다. 그러니 성경의 의미로 풀어줘야 한다. 단어 풀이를 하면 안된다.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나라는 단어 풀이 한 정도가 아니라 로마법적인 개념으로 풀어냈다. 왜 하나님이 진조하시면 불의하고 죄인이 아니냐 죄인이 어떻게 용서를 받냐? 하나님앞에 갚아야 할것이 아니냐. 기준에 도달해야 할것이 아니냐 해가지고 하나님을 재판장으로 이야기를 해 온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재판장이 아니라 그들중에 계신 아버지로서 그들의 생명을 더욱 거룩한 생명으로 복주고 교제하는 아버지로 계신 것이지 재판장으로 계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잘못 읽어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 한자 몰라도 되고 레위기의 내용을 알고 있고 그 내용이 예수안에서 완성된 것만 알면 아는 것이다. 번제 속건제 이런 것은 한자로 잘 모른다. 이제 레위기를 읽고 그 의미대로 속건제를 알면 된다.
하나님의 성소는 회막이라고 그랬다. 서로 만나서 교제하고 기뻐하는 만남의 장소다. 그 구원을 하늘 장막에서 만나도록 완성하셨다. 우리 대표자가 하늘보좌에 계시거든요. 그것이 예수께서 완성하신 제사의 완성이다.

여기 제사장을 묘사할 때도 항상 아론 자손 제사장 꼭 그러지요. 그냥 제사장가문 하면 우리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아론 가문 알겠는데 번제를 보면 아론 자손 제사장 그 말을 계속 반복한다. 그 제사장은 아론으로부터 그 은혜가 계속 상속되는 자들이다. 그 아론은 누구냐.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산에 올랐던 자고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덧입은 자다. 대대로 그 자손이 그 옷을 입을 것이다.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만일에 아론 자손 제사장이 없으면 백성은 하나님앞에 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아론 자손 제사장은 나가봤자 땅에 있는 성소 그것도 백성을 대신해서 회막 문 앞 회막 문앞 여호와의 앞에 거기까지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역사를 완성하셔서 세운 아들은 이제는 하늘의 영광으로 덧 입었고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앞에 직접 나아가는 분이다. 그는 자기의 생명으로 내 살고 피를 먹고 마셔라 그렇게 온 땅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앞에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낸다.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생활이 곧 번제의 생활이다. /김강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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