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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소의 등불과 진설떡 (레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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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4장에는 성소의 등불을 아침저녁으로 켜서 꺼지지 않게 하라는 규례와 안식일에는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그것을 제사장이 먹으라는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 한자를 돌로 쳐죽이고 그래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서 이스라엘 중에 그런 악한 죄를 제거하라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

먼저 2-4절은 성소의 등불에 대한 규례가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찢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내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고 등잔불을 켤 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장밖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에 등잔불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여기서도 영원한 규례니라 하고 한마디씩 더 붙여서 그것을 강조하는 표현법들을 쓰고 있다. 그래서 순결한 등대 위에 등잔불을 끊이지 않게 정리해라. 처음에는 모세에게 가져오게 했고 다음에는 대 제사장 아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순결한 기름 또 순결한 등대 등잔불을 켜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꺼지지 않도록 해라.

5-9절부터 성소에 떡을 진설하라는 내용이다.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어리를 에바 십분의 이로 하여 여호와앞 순결한 상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 것이며 항상 매 안식일에 여호와 앞에 이 떡을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라.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중에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여기서는 에바 십분의 이로 만든 떡은 하루 분량의 식량이다. 그래서 한 덩어리를 에바 십분의 이로 하여 열둘을 구워야 되는데 그렇게 구워서 순결한 상 금상이다. 여기서 순결한 상 순결한 등대 순결한 기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순결한 상위에 두 줄로 놓는다. 그리고 각 줄에다가 유향을 기념물로 두어서 그것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가게 해야한다. 그리고 이 떡은 안식일마다 진설하고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떡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성소에서 먹어라 그 말이다. 화목제처럼 이틀치 양식이 아니기 때문에 성소에서만 먹어야 된다.

10-23절은 여호와를 저주 한자를 죽이라 한 것이 길게 말하고 있고 이어서 몇가지 규례가 붙어있다. 이스라엘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된자가 한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미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저주한자를 진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치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는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에 돌로 그를 칠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이라.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죽일것이요 짐승을 죽인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요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상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외국인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그 법을 동일히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 절기의 거룩이니까 23장에 거룩한 절기가 일곱 개 있고 또 25장에도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절기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느닷없이 성소에 불키고 떡을 진설하는 이야기 또 그것은 그럴 듯 한데 눈을 상했으면 눈으로 갚고 그런 이야기가 끼워져 있는 것 같다. 항상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라고 그랬다.

23-25장은 절기에 대한 거룩을 말하고 있는데 24장은 그런 의미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읽겠다. 성회는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하나님 단에 드리며 제사장과 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며 먹는 것이었다. 23장에 그렇게 되어 있다. 성회 때는 다 쉬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쉬어야 되냐면 성회에 속한 것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만일에 다른 일을 하면 성회에 속한 것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 아니다. 다 쉬는데 무슨 일을 하려고 쉬냐면 하나님앞에 많은 예물을 드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양식을 먹고 초수절에는 첫 양식을 먹기 시작하고 오순절에는 풍성이 거둬서 가난한 자도 먹고 그렇게 먹어야 된다. 그렇게 함께 즐거워하는 것 그 즐거움이 초막절에서는 일주일동안 초막에서 즐거워하고 그것이 곧 성회고 예배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수확의 절기들을 생명의 절기로 복주셔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회로 삼을 절기에 이어서 이제 24장에서는 성소안에서 제사장이 등불을 밝히며 하나님께 식물을 드리며 먹는 규례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앞에 성소는 하나님의 상에 드린 문제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 단에 드리고 즐거워하는 그런 문제만 언급되어 있는데 24장에는 한단계 더 진행시켜서 하나님의 성소안에서 어떻게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가 하는 성회를 더 심화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회로 삼을 절기에 이어서 성소안에서 제사장이 등불을 밝히며 식물을 드리며 먹는 규례를 말씀하신다.

순결한 등대 위에 등잔불을 끊이지 않도록 백성은 순결한 감람 기름을 가져오고 제사장은 끊이지 않고 등불을 관리하라는 규례는 여호와께서 생명의 빛으로 항상 휘장밖에 등잔으로 임하시어 계시다는 언약이다. 이 등잔불을 켜라는 데는 언약이라는 말은 없고 떡을 진설하라는 말에 영원한 언약이라 그런 말이 있다. 같은 것을 점점 강화시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역기서 언약적으로 설명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금등대 그런 문제보다는 순결한 등대 순결한 감람 순결한 상 순결하다 거룩하다 거기다가 강조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서 교제하고 있는 순결함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소 단에서 순결한 백성들이 하나님앞에 드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그런 문제들 그 앞에 22장에는순결한 제사장들이었다. 그런 문제를말슴했는데 여기서는 성소안 휘장밖 즉 하나님의 보좌 바로밖에 있는 거기서 하나님앞에 끊이지 않고 등불을 밝혀야 되는데 이 일을 위해서 백성은 순결한 기름을 가져와야 되고 제사장은 이 등불을 잘 관리해서 꺼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하는 것은 이 본문에서 직접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교회를 일곱 등잔으로 말했을 때 거기서는 세상의 빛으로는 말할 수 있어도 여기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휘장 안에 계신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캄캄한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 그런데 아무도 휘장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 하나님이 친히 일곱 촛대가운데 임하셔서 빛가운데 그들중에 임하시고 그 빛가운데서 제사장은 떡을 진설하고 먹는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은 빛이요 생명이다 그렇게 요한복음 1장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에 일곱 촛대에 등불이 없으면 제사장은 캄캄한 암흑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캄캄한 가운데 계시는데 그는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곱 촛대 가운데 임하시고 그 촛대는 떡 상을 비치도록 되어 있다. 그 떡상에 제사장이 떡을 진설하고 먹는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친밀한 친교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이처럼 깨끗한 기름을 가져오고 제사장이 이 등잔불을 끊이지 않고 관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임하신 일곱 촛대가운데 임하신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행함에 대한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백성중에 빛으로 임하신다는 생명의 교제 언약을 백성들에 삶의 규례로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순결한 상위에 떡 열두 덩이를 진설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함께 한상에 앉은 언약이다. 한마디로 하면 각 지파가 한 덩어리씩 내는 식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열 두덩어리를 떡을 하나님 앞에 진설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의 상에 가지고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차려 드리는 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떡은 그냥 떡이 아니라 떡과 함께 유향을 화제로 드려야 한다. 유향을 그 위에 놓고 그 휴향이 하나님 앞에 화제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마치 단에다가 태워드리면 화제가 되는것처럼 떡상위에 향이 불타면 그것이 하나님앞에 향기로운 화제 향기로운 음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떡은 지극히 거룩한 성소의 양식으로 제사장에게 주시고 매 안식일 마다 떡을 진설하게 하신다. 이것을 아론과 그 후손들이 먹는다. 그러니까 특별히 대 제사장 가문에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소밖에서는 못먹고 거룩한 양식은 성소 뜰 안에서 먹는다.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리고 이 떡은 항상 안식일마다 진설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떡이 다음 안식일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안식일에 새 떡을 낼 때 일주일전에 그 떡을 내서 그 가족이 먹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빼빼 말라서 맛이 없겠지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순 고기만 먹은 것도 영양학적으로 안 좋다. 채소를 많이 먹어야 되는데 여기서도 보니까 빳빳 마른 떡을 다음주에 먹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그 떡이 거기 있다. 그래서 떡을 안식일날 진설하고 안식일날 먹는다. 안식의 떡 다른 날 보다 안식일에는 열두 덩어리를 떡 열두지파가 하나님앞에 각자 식물을 차려 놓은 식이고 그것은 그 위에다가 향을 사르기 때문에 진짜 향기로운 음식이 되는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향기롭게 취할뿐만 아니라 대 제사장 가문이 성소에서 먹는 떡이다. 이런 친밀한 친교를 주셨다. 이것이 영원한 언약이다. 너는 내 상에서 영원히 먹고 마셔라.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드린 것은 안식의 완성 생명의 교제의 완성을 그렇게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상에서 앉으신 언약이다. 순결한 상위에 열두 덩어리를 떡을 진설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함게 한 상에 앉으신 언약이다. 이 언약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냐면 떡과 함께 유향을 놓고 그것을 화제로드리고 떡은 지극히 거룩한곳에서 대제사장 아론의 가문이 먹고 또 안식일마다 이 떡을 진설하도록 해서 거기에서 언약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 다음에 있는 이야기는 저주 한자를 죽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또 백성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생명이 되셔서 함께 하시는 회중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결론 짓고 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그런 백성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24장에서는 생명의 빛 생명의 떡으로 계신 분이다. 빛을 비추게 하시고 그 앞에 떡을 진설하게 하셨으니까. 그런 생명의 교제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자는 돌로 쳐서 죽여야 된다.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거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는 생명으로부터 제거되는 것이다. 왜 여호와의 이름을 저주했으니까. 그리고 저주한 말을 들은 자들이 저주 한자의 머리에 안수한 것은 그 죄를 그에게 돌리는 행동이다. 들은 자들이 안수해야 한다. 들은 자들이 죄를 그에게 다시 돌리고 그렇게 함으로 증인이 되는 안수다. 그러니까 안수한다 할지라도 그 문맥에서 그 안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번제를 드릴 때 안수한 것은 제사장과 제물을 일치시키는 안수지 무슨 죄는 번제물에 옮겨가고 번제물의 의는 내게 옮겨오고 그런 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제물과 자기를 일치시켜서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죄인과 안수함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옮기는 안수다. 마치 속죄제물을 드렸을 때는 죄를 고백함으로 안수한다. 그 때는 죄를 옮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맥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안수한 자와 훼방 한자를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귀로 들었던 죄를 그에게 옮기는 안수다. 그래서 다 안수하고 온 백성이 다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돌로 쳐서 죽인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는 대리 행동이다. 왜 돌로서 죽이면 죽음과 죽이는 사람이 전혀 연결이 안되고 돌로 쳐죽이니까 부정이 옮기지 않는다. 그래서 신성 모독 죄와 아비를 훼방하는 이런 죄들에 대해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온 백성이 돌로 쳐서 죽여야 된다. 왜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생명의 하나님으로 그들 중에 계신다. 이 하나님을 저주하면 그들은 죽여야 된다. 그런데 온 백성이 생명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을 여호와의 회중으로부터 제거시켜야 된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 법이 있다. 그것도 저주한 자를 죽이라는 법을 여러 상황에 구체화시킨 문제들이다. 이어서 말씀하신 동일 상해법은 즉 눈을 다치면 눈으로 하고 짐승을 죽이면 짐승으로 하고 그런 말이다. 그냥 여기서는 줄여서 동일 상해법 이렇게 했다. 사람을 죽인 자는 그를 죽여야 되고 짐승을 죽였으면 갚아야 되고 이런 이야기다.

동일 상해법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생명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이나 짐승이나 그 생명을 상하게 한자를 제거하시고 보상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중에 생명의 상함이 없게하신 것이다. 그런데 짐승을 죽여서 보상할려면 그 집 짐승도 죽여 버려야 되겠지요? 그런데 갚으라고 그랬다. 사람을 죽이면 갚을 방법이 없다. 마땅히 죽여야 된다. 그리고 눈을 상하면 눈을 상하게 하고 귀를 상하면 귀를 상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법적인 형식으로는 동일 상해법처럼 되어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중에 하나님을 저주한자도 죽여야 될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죽인 사람도 죽어야 되고 만일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조금이라도 상하면 그는 마땅히 자기 생명으로 보상을 해야한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상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무슨 말인가? 여호와의 회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한자도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이스라엘을 상하게 하는 자도 있어서는 안된다. 왜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고 말씀하고 있다 항상 그 문맥을 봐야 한다. 법 조문을 따라서 여기저기 보지 말고 문맥을 봐야한다. 그것이 24장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23장에서는 안식 성회의 절기 하나님의 성소의 단에 드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운 절기가 있었고 이절기를 한 단계 더 심화 시켜서 성소안에서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그리고 떡상을 안식일에 차려라. 그리고 제사장 가문이 먹어라. 그것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의 생명의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나를 저주하거나 내 백성을 저주한자는 내 회중에서 없도록 해라. 그렇게 해서 생명의 친교를 확증하고 있다. 그것이 24장의 내용이다.

그리고 25장에서는 안식년과 희년으로 이것을 한 단계 더 축제의 절기로 높인다. 그래서 24장에 성소안에 등불을 꺼지지 않게 하고 떡을 차려 놓으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이제 기독론적인 해석이다. 교회가 어떻게 이것을 읽을 것인가 그 말이다. 바로 이 은혜의 일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세 규례를 통해서 자기 백성의 생명이 되셨다. 끊이지 않고 등불을 켜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중에 빛이 되시고 그런 하나님앞에 일용할 양식을 가져옴으로 하나님의 친교의 식탁에서 먹을수 있도록 되었다. 만일에 이들이 이 규례를 안지키면 하나님의 성소의 불을 꺼져 버리고 하나님의 상은 빈 상이 되어서 하나님도 잡수실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을것이 없다. 그러니까 이 규례를 지킴으로 생명되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이 규례를 지켜라. 너희 영원한 언약이니라 하는 말씀이 그런 말씀이다. 이것은 행위를 지켜야만 천당간다 그런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얼굴에 비치는 영광의 빛가운데서 교회에 임하사 성소에 속한 생명의 교제 질서를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질서로 완성하셨다. 구약 때는 하나님께서 성소에 비치는데 하나님은 생명이신데 일곱 촛대에 비추는 빛이다.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과 불기둥 가운데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한 장막에 거하셨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제사장을 만나시는가? 일곱 촛대 가운데 나타나신 빛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명이신 데 어떤 생명이신가? 순결한 상에 차려 놓은 음식물을 대제사장에게 주는 분으로 생명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가장 친밀한 생명의 교제 언약이다. 그런데 이 일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늘에 속한 영광의 빛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받는다.
구약 때는 일곱 촛대 가운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또 하나님을 볼 때는 하나님의 성소에 옷을 입은 아론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만일 아론이 나와서 백성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다. 왜 성소에 속한 영광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성소에 기름 부음이 그에게 있는 자이다. 그 외에는 하나님을 볼 방법이 없다. 왜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시니까 그런데 첫 언약에서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범죄해 버렸다. 하나님이 언약을 새롭게 했을 때 모세가 기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처음에 언약을 체결했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보지를 못했다. 그런데 언약을 새롭게 갱신했을 때는 하나님이 등을 보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빛났다. 백성들은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언약은 중보자 안에서 갱신되었는데도 아직 백성은 그 영광을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백성이 하나님을 보면 누구를 본가? 모세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굴이 빛나는 영광을 백성들이 볼 수가 없었다. 왜 아직 그 언약이 완성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영광 그런데도 휘장으로 가리워서 백성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그 언약을 완성하셨을때는 예수의 얼굴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다. 그는 영원히 우리중에 오신 하나님시다. 우리는 그 영광의 빛가운데서 하나님을 본다. 그는 참 빛이시다. 일곱 촛대에 비치는 빛이 아니라 그림자적인 아론과 모세의 그런 빛이 아니다. 그는 참 빛이고 하늘에 속한 영원한 빛이다. 그가 오셨다. 우리들은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데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그런 방식으로 먹는다. 가나안 땅에 양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난 그런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몸의 죽으심을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간격 죄된 간격을 제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급하신 것은 가나안 땅의 양식이 아니라 친히 자기 백성을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주님의 살과 피 그것이 교회가 누리는 생명의 양식이다. 그것은 열두 지파가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먹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 만민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어서 우리가 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몸의 교제로 주의 상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나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손으로부터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영원한 생명의 떡을 먹는다. 대 제사장만 거룩한 뜰에서 먹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이 모든 곳에서 먹는다. 그것이 완성이다.

이제는 거룩하고 그렇지 않는 영역이 없고 이제는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믿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는 주의 상에 앉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를 누린다.그리고 여기 구약 때는 보니까 하나님을 저주한 자는 죽여야 되고 이는 이는 눈은 눈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상한자는 전부다 그대로 갚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을 상한자가 없도록 했다. 물론 예수의 이름을 저주한자가 있을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냥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대리자로 형제를 사랑해서 몸의 헌신을 감당함으로 영원히 형제의 생명을 상하는 저주를 제거해버렷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산다 그 말이다. 그것이 성소에 있는 즉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완전한 생명의 교제다. 그렇게 완성하셨다. 그것이 24장에서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어떻게 성경을 풀어야 하는지 알겠지요? 그 당시 구체적인 역사의 구원의 의미를 말하고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됐는가를 다시 설명해야 되지 구약을 확대해서 올라오면 못 올라온다. 왜냐하면 지금은 원수를 사랑해서 자기 몸을 주신 사랑의 봉사니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이것을 확대해서 못 올라온다. 이제는 몸의 봉사로 사랑할 수 있다. 그 몸은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일으키신 몸이다. 그런 몸으로 봉사하도록 했다. 주님의 교회안에 형제의 이를 상하고 눈을 상하게 하는 저주는 없다.
그것이 주님께서 새로운 인류인 교회와 함께 하시는 빛과 생명의 교제와 사랑의 봉사다.

구약이 다 그리스도의 책인데 우리가 못 읽어서 휘장 밖에서 더듬고 있어서 못 읽은 것인데 얼마큼 어린아이에게 주신 규례로 정확하게 주시고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구약 법을 신약 백성에게 정신적으로 적용하면 안된다. 새로운 관계에서 적용을 해야 한다. 신약 시대는 구약 법을 더 세분화 시켜서 올라오는 것이아니라 주님의 몸의 질서로 새로 창조된 관점에서 새로운 윤리를 설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죽음의 그림자 형제를 훼방하는 저주의 그림자는 영원히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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