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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년과 희년 (레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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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기도하실 때는 우리 한국 말 어법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에 대해서 기도할 때는 가령 우리 나라 말이 무슨 말이냐면 우리 할아버지한테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하시데요 하고 전달 할 때까지라도 내가 말하는 분이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최고의 존칭어로 말해 버리면 할아버지한테 실례가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한테는 우리 아버지가 높은 분이지만 아버지 이야기를 할아버지한테 옮길 때는 할아버지를 중심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할아버지 앞에 아버지가 낮아지는 방식으로 표현을 해야 그것이 우리 나라 어법이 맞다. 우리 장로님이나 집사님이 기도해서 설명하기 좋은 것이다. 교인들이 하면 내가 기도 못한가 하고 낙심할까바 말을 안하는데 가령 목사를 귀하게 생각하면 귀한 목사를 이렇게 하면 되지 귀하신 그렇게 최존칭어를 안 써도 되고 가령 우리 양용석 전도사가 선교 잘하라고 기도하면 되는데 우리 양용석 전도사께서 그래 버리면 하나님 앞에는 최 존칭어를 쓰게 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 어법상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한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리 귀하게 생각하고 기도한 분이라도 하나님 앞에 이분을 높인 칭호를 붙여서는 안 들어가도록 표현을 해야 한다 그런 말이다. 그 어법이 맞지요?
지금 강론한 레위기 25장은 23-24-25장 한 단위를 이루고 있는 부분에 마지막 부분이다. 항상 성경 해석은 그 책 전체 또 작은 단락들의 전체 어떤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풀어내야 한다. 그러면 23장에서는 무엇이 있었는가? 연중 절기가 있었다. 그 절기는 공포해서 거룩한 예배로 모이는 그런 연중 절기였다. 그것은 전부 안식의 절기였다. 그래서 안식일부터 시작해서 연중 절기로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수장절까지 갔다.

그것은 성소 뜰에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또 거기서 먹고 하는 그런 교제가 성회 곧 구약 예배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깊은 것은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가 드리고 먹는 것이다 그것이 24장에 제사장은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관리하고 안식일에는 진설병 열두 덩어리를 떡을 놓아라. 하는 등불과 진설병에 대한 이야기가 24장에 있었다. 그것은 성소 뜰에서 드리고 먹는 것이 아니라 성소 안에서 항상 드리고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25장에는 일년 안에 든 그런 절기가 아니라 칠년 오십년 그 안식의 완성으로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절기들을 2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드리는 절기가 아니라 칠년 오십년 이렇게 든 절기들이다. 그래서 안식에 대한 문제들을 마무리 짓고 있다. 안식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함께 하는 안식이다. 이것을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 25장이다.

자 여기 25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안식년에 대한 문제와 그리고 희년에 대한 문제 두 가지 문제를 말씀하고 있다. 먼저는 전체적인 본문 순서를 따라서 전체적인 개략을 읽고 그리고 나서 해석하는 방법대로 강론하겠다.
2-7절까지는 안식년에 대한 문제인데 여기서 이름 붙이기를 땅에 안식년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있다. 2절을 보면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이것을 반복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3절부터다. 보니까 어떻게 안식하냐? 6년동안은 뿌리되 7년은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하라. 그리고 특별히 5절을 보면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아라.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3-4절은 뿌리거나 가꾸지 말아라 그런 말이고 5절은 스스로 난 것도 거두지 말아라 한 번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끝에서 말하기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안식년의 소출은 누가 먹을것인가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항상 동심원적인 물결 구조로 진행이 된다. 처음에는 주제적인 서론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그 의미를 설명한다. 6년은 뿌리되 7년은 거두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안식하게 하라. 또 한 번더 강화시키기를 그 해에는 스스로 난 것도 먹지를 말아라. 왜 땅의 안식년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해 소출은 그해 다 함께 먹어라 그렇게 설명되어 있다.

제가 요약해서 쓰기는 내가 주는 땅으로 여호와앞에 안식하게 하라. 수확하지도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이다. 줄일려고 하니까 강조법만 쓴 것이다. 안식년의 소출을 사람과 짐승이 함께 먹어라. 여기서는 그렇게 설명되어 있지를 않고 너희 네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함께 거하는 객과 육축과 들짐승이 다 먹어라 해서 하나도 빠짐이 없이 다 먹도록 일일이 세고 있다. 그것이 안식년에 대한 규례다. 그러니까 제가 요약해 놓은 것은 아주 매력이 없는 요약이지요? 단지 이 내용을 알기 쉽게 강조해 버린 것뿐이지 실은 본문 자체를 읽으면 그 표현법 자체가 그 안식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가장 알기 쉽도록 기록해 준 것인데 우리들이 그것을 읽으면 모르고 그것을 좀 요약해 놓으면 알기 쉽고 해서 그것은 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요약해서 내용만 짤막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음성을 구체적으로 듣는 훈련을 자주 해야 여러분이 성경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항상 먼저는 주제적인 서론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진행적인 방식들 그리고 제일 끝에는 그것의 결론적인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쉬기는 쉬는데 땅만 쉬는 것이 아니라 그해에 모든 사람들이 다 공짜로 먹는다. 아무 수고 없이 그것이 안식년이다.

이제 8절 이하에는 희년에 대한 문제다. 그런데 그 희년에 대한 것도 성경 본문이 여러 단락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기 때문에 그 나누어진 단락대로 요약해서 중심되는 것을 제목으로 붙이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희년은 그냥 희년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일곱 안식년후 다음해 그런 의미로 희년이 쓰여져 있다. 그래서 희년은 일곱 안식년과 관계된 의미다. 그래서 여기 책을 보면 7년 안식을 계수하라. 일부러 7자를 종이 지면도 줄여야 되겠지만 시각적인 효과도 거두기 위해서 숫자로 썼다. 그래서 7 안식년을 계수 한다. 실은 안식하면 7의 숫자인데 7 안식년을 셈하고 이는 7년이 일곱 번이다. 이것은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49년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안식이 얼마큼 강조되어 버렸는가? 7 안식년을 세어라. 7년이 일곱 번이다. 안식년이 일곱 번이다. 49년이다. 그래서 7 이라는 말을 굉장히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 7.7은 49하면 간단한데 성경은 그렇게 안했다. 그러니까 이런 표현법들이 그것의 내용을 강조하는 표현법들이기 때문에 성경 문장 자체로 읽는 것이 제일 좋다.

49년이다. 그런데 그 해에는 무슨 일을 하라는 말이 없고 그 다음에 50년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50년은 7.7은 49 그것을 완성시킨 다음해의 일이다. 그런 의미로 50년의 의미가 있지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다. 안식년을 일곱 번 완성시킨 7년이 땅의 안식이다. 이 안식을 일곱 번 반복하고 그리고 나서 7월10일에 나팔을 불어라 그 날은 속죄일이다. 그러니까 속죄일로부터 새로운 희년을 알리고 있는 나팔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일반적인 달력을 7월1일부터 시작한다. 항상 첫날이 그 달의 시작이어서 나팔을 분다. 그리고 그들의 거룩한 달력으로는 유월절, 유월절을 첫해로 삼고 있다. 바꿔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식년을 계산할 때는 7월1일로 계산하지 않고 7월10일에 나팔을 불어서 계산하고 있다.
7월10일은 속죄일인데 나팔을 전국에 크게 불어라. 제 50년을 거룩하게 하여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희년이니 수확하지 말라.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여기서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 우리에게 희년이니까 그냥 희년이니 그런 말이 아니다. 너희에게 희년이니 하는 것은 줄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넣어 논 것이다. 그냥 달력상 희년이 아니라 너희에게 준 희년이다 그런 말이다. 그래서 실은 이 안식년은 나팔절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이 레위기 문맥을 보면 7월달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희년은 7월10일에 나팔을 불어야 한다. 나팔을 전국에 크게 부는데 속죄일로서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이 제 50년을 시작하는 날이다. 그렇게 해서 제 50년을 거룩하게 구별을 해야 한다. 이 거룩하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희년으로서 거룩한 것이다. 그러면 7월10일에 나팔을 부는 것은 무슨 날인가? 하나님의 지성소를 거룩하게 하고 그런 의미로 시내산에 나팔 소리 가운데 강림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중에 임해 계신다는 그런 의미로 나팔을 부는 것이다. 그것이 희년을 공포하는 나팔 소리다.

50년 대속죄일에 나팔을 불면 이것은 그 해가 희년 복된 해다. 그런데 그 때는 무슨 일을 해야하냐면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 이 해는 이스라엘 백성의 희년이기 때문에 그 자유는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자유다. 항상 점진적으로 설명해 주는 구조다. 자유가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는 다른 자유가 아니라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자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희년을 알리려 오셨으며 그 때는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다. 갇힌 자가 놓이면 병자가 낳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며 그런 의미로 주님께서 희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설명을 하지 말고 일단은 그 문장과 그 역사적인 사건에서 희년에 의미가 무엇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된 해는 무엇이냐? 그들이 다 자기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종들이 해방된다. 그럴 뿐만 아니라 희년에는 수확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밭의 소산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년에도 수확하지 않는 것처럼 희년에도 수확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희년이 49년이 아니고 50년인가? 우리 같으면 안식의 완성이 7.7은 49, 49년에 큰 복된 해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49년째가 아니고 49년도 분명히 안식년이다. 안식년인데 그 다음 50년은 희년으로서 거룩하게 해라. 그렇게 되어 있다. 항상 구약에는 칠일 절기 다음에 팔일 절기가 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도 하루에 날이 지나면 새로운 날이 오고 특별히 레위기는 해가 지면 그 동안 있었던 부정은 깨끗케 되고 해가 지면 정결하게 되어서 다음날에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해가 지면 하루 동안의 부정이 끝난다. 진밖에 있다가 진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그것이 하루의 의미다. 우리처럼 똑 같은 해가 지고 뜬다는 자연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해가 지면 이전의 부정은 끝나고 새로운 생명이 오고 또 그 날 부정이 있으면 해가 지면 오늘 입은 부정은 끝나고 새로운 날에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완전한 생명을 향해서 날들이 진행되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칠 안식년을 세고 50년을 거룩한 해로 구별하면 이제는 칠 안식년이 끝나는 새로운 출발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안식은 항상 칠이 안식인데 그 안식을 마치는 다음해 안식년을 새로운 날이고 복된 해인데 이것은 땅만 쉬는 정도가 아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 기업을 회복해라. 그런 의미로 이전의 안식을 완성시키는 새 시대의 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구약에서 희년 50년의 복된 해다. 이렇게 자기 종들까지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는 안식은 구약 때는 없다. 다 칠년의 안식은 땅을 쉬게 하는 것이지 각기 종들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은 아직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희년은 안식의 완성과 함께 그 다음 시대의 새로운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 구약의 희년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희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자. 13-17절에 보면 희년에는 자유다. 희년에는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라. 여기서는 본문에는 그렇게 된 것보다는 희년에는 그 사람과 그 가족이 전부 돌아가라 이런 의미들로 반복되어 있다. 희년 후에 연수 곧 열매를 얻을 연수다. 희년 후의 연수 곧 열매를 얻을 연수를 따라서 값을 정해야 한다. 희년에는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희년에는 자유한다. 그러니까 모든 종들을 계산할 때 지금부터 희년까지 몇 년 남았냐 그것을 가지고 값을 계산해야 한다. 밭을 계산하던지 종을 계산하던지 앞으로 몇 년동안 더 써먹을 수가 있는지 계산해야 한다. 왜냐하면 희년에는 다 공짜로 놓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라 계산하라 그 말이다.

18-22절은 규례를 지키라는 한 번더 말하고 있다.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배불리 먹고 완전히 거하리라. 제 6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제 9년 추수하기까지 묶은 곡식을 먹으리라. 여기서 느닷없이 규례를 왜 반복하시는가? 차라리 이 규례를 앞에다가 돌리고 연속해서 희년에 대한 문제들을 쭉 설명하면 좋겠는데 여기서는 규례를 잘 지키라는 말을 여기다가 끼우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경고하기 위해서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희년에 복을 말하려고 여기서 삽입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언약적인 경고문 같으면 앞에나 뒤로 돌려야 할 것인데 여기서는 그 희년에 복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희년 상황에 넣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게 하고 안식을 주실 것이다. 어느 정도 배불리 먹게 하냐면? 제 6년에 복을 내리는데 9년까지 먹게 하신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지막 7 안식년의 6년일 것이다. 그러면 안식년에는 뿌리지 않고 거두지 않으니까 못한다. 그러면 6년에 몇 년동안 먹을 것을 주냐면? 안식년 그 다음해 안식년 다음해 8년 그 다음에 9년 가을까지 준다. 그런데 그것도 그 표현법은 묶은 곡식을 먹으리라. 즉 남아돌게 먹게 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염려 없이 지켜라.
그 다음에 이 희년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그러면 희년에 의미는 무엇이냐? 토지는 영원히 팔지를 말아라. 토지는 다 내것임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다. 또 토지 무르기를 허락하라. 처음에는 토지를 영원히 팔지 말라 하셨고 그 다음에 토지를 무르라고 그랬어도 그 무르는 방법은 가까운 친족이 와서 물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부자가 되면 물러야 한다. 그리고 기업으로 돌아가면 된다.

만일에 무를 힘이 없으면 희년이 되면 공짜로 그 기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 땅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 땅이 그들의 기업이다.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데 땅을 통해서 공급하신다. 하나님이 생명이신데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고 땅이 그들의 기업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땅을 자기 권리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서 기업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그 기업을 빼앗기거나 옮겨서는 안된다. 만일에 가난해서 옮겨지게 되면 50년이 되면 전부 원상 복귀해야 한다. 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돌아가야 되고 하나님의 땅에서 안식을 누려야 된다. 그런데 이 안식의 제도는 희년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에게 풍성한 힘을 주시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갈 수가 있고 또 친척이 부자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왜냐하면 친척은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만 자기 백성의 기업을 돌려준 것이 아니라 그 친척도 돌려주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은혜의 제도이다.

그런데 땅은 이렇게 되는데 가옥은 어떻게 되느냐? 이제 땅 가옥 종을 돌아가면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성내에 가옥은 일년 안에는 무를 수 있다. 일년 안에만 무를 수 있다. 성경은 일년이 지나면 무르지 못한다. 희년이 되어도 돌려보내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성벽 없는 촌락의 가옥은 땅처럼 그렇게 무르기도 하고 희년에는 돌려보낸다. 그러나 성으로 둘러 쌓여 있는 가옥은 일년이 지나면 안된다.

레위 기업의 성읍의 기옥은 언제든지 무를 수 있다. 또 희년에는 돌려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레위 성읍의 기업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얻은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밭은 영원한 기업이기 때문에 팔지 못한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다. 집에 대한 문제 레위의 기업에 대한 문제다. 집은 촌락 없는 집 즉 들판에 있는 집은 땅하고 똑 같이 취급하면 된다. 그런데 성곽으로 둘러 쌓여 있는 집은 일년 안에는 무를 수 있지만 일년이 지나면 무르지 못한다. 그러니까 집도 성곽으로 둘러 쌓여 있지 않으면 땅처럼 취급해 버리고 성곽으로 둘러 쌓여 있으면 땅처럼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곽으로 둘러싸인 것은 땅에다가 무엇인가 작업을 많이 했다. 경계가 그어져 있고 자기 소유라는 울타리가 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레위 기업은 땅이나 집이나 항상 무를 수 있고 특별히 땅은 팔지를 못한다. 그러면 왜 그러냐?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십분의 일씩 떼어서 레위 지파에게 주었거든.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레위 지파는 장자로 하나님의 것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것을 받았지만 레위 지파는 그 중에서 구별한 것을 하나님의 소유로 받아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떼어서 준 것이다. 그것을 다시 빼앗아 가면 안되겠지요?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그러니까 절대로 땅은 팔면 안되고 집은 땅하고는 다르지만 언제든지 무를 수 있다. 왜 그들을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것으로 주어서 먹게 했기 때문에 그것을 그들이 다시 돌려 받아 가면 안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영원히 레위 지파의 기업으로 준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 일반 백성에게 준 것보다는 레위 지파에게 준 것이 훨씬 더 강화되어 있다. 왜 팔지도 못하고 영원히 소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 백성에게 준 것은 가난하면 팔 수가 있다. 그러나 형제가 물러 주거나 자기가 부자가 되면 무를 수 있고 희년이 되면 돌려 받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의 땅 그 다음에는 성곽 있는 가옥 그 다음 가장 강력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 레위 지파의 소유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을 누린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린 것 보다 더 강력한 기업이 곧 레위 지파의 기업이다. 왜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장자로 삼으셨고 다른 지파는 성소밖에 두었다. 레위 지파는 성소안에서 봉사하면 일반 지파는 성소밖에가 있다. 이방 백성은 가나안 땅밖에 있다. 그런 의미로 장자인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 더 강조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 다음에35-38절을 보면 이제는 땅이나 가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팔리는 문제다. 그래서 빈한한 형제에 대해서 희년에는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어떻게 하므로 하냐면 만일에 동족이 가난해서 빈손으로 있으면 함께 잇게 하고 그에게 이자를 취하면 안된다. 그리고 나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말이 붙어 있고 그 다음 제일 끝에 너희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붙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문단에도 그 말이 붙어 있다. 여기서 항상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 노인에 대한 문제가 나올 때마다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니라. 소경이나 귀머거리를 저주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런 말들이 붙어 있었다.
여기 가난한 형제는 함께 살게 해야 되고 그에게 이자를 취하면 안된다. 왜 그런가? 이유가 있는데 나는 너희 하나님이 아니냐? 어떻게 너희 하나님인가?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줄려고 애굽의 종으로부터 자유케한 하나님이 아니냐? 그렇게 해서 너희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도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아라.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된 것처럼 너도 네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아라. 네가 너희들을 자유케 해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준 것처럼 너도 네 형제에게 너와 함께 그 복을 누리도록 해라. 왜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었으니까. 그것이 구약에서 윤리다. 그래서 이자를 취하지 말도록 한 것이다.

그 다음 종으로 팔린 형제가 있으면 그 종을 엄하게 부리면 안된다. 그리고 품꾼처럼 함께 잇게 하고 희년까지 섬기게 하면 된다. 희년이 되면 그와 그 자녀가 주인을 떠나서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 다음 또 이유가 붙어 있다.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나의 품꾼인즉 종으로 팔리지 말고 엄히 부리지 말고 너희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데 내 품꾼으로 그들을 구원했으니까 너희 품꾼처럼 부리지를 말아라. 그러니까 너에게 팔렸으면 엄하게 부리지 말고 일하러 온 사람처럼 부리고 희년이 되면 돌아가게 해라. 그러면 그도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 그는 내 일꾼이니까 너의 종처럼 부리지를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47-55절은 이방인에게 형제가 팔리면 이방인은 부자가 되고 너의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팔리게 되면 그 가까운 친족이 속량하고 만일에 그가 부자가 되면 스스로 속량하면 된다. 희년까지 연수를 따라서 값을 정한다. 주인을 그를 삯꾼과 같이 부리고 네 앞에서 엄히 부리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그를 천하게 부려서는 안된다. 왜 이스라엘 백성의 감독자가 되어 있으니까. 만일에 속하지 못하면 희년이 되면 자유하라. 이스라엘 자손은 내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다. 그러기 때문에 형제의 종이 되어서도 안되고 이방인의 종이 되어서도 안된다. 더구나 이방인은 그를 부릴 때 조심해야 한다. 왜 이스라엘 땅에 우거하고 있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감독관이나 된 것처럼 그들의 눈앞에 있기 때문에 엄히 부리지 못하리라. 왜 그들은 내 품꾼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희년에서는 무슨 말이 있는가? 근본적인 문제가 기업으로 돌아가라 하는 것이 희년에 자유다. 그러면서 이 희년을 지키면 복을 많이 주리라. 희년에 풍성한 복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복은 그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 땅이 팔린 자 집이 팔린 자 종으로 팔린 자 이 모두가 여호와의 풍성함에로 돌아갈 것이다. 왜 땅은 내것이고 너희는 내 땅에 거하는 내 백성이니까. 너희들은 내 품꾼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여기 문단의 내용이다.

해석이다. 먼저는 방금처럼 그 문장의 구조에서 말하는 문법적인 내용들 그리고 이것이 당시 하나님의 이스라엘 중에서 의미하는 복을 해석하고 나서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는 어떻게 하늘에 질서로 완성되어서 교회안에 주어졌는가? 이것을 해석을 해야만 드디어 구약의 휘장이 벗겨지고 구약이 이스라엘 백성의 책으로 읽혀지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늘에 질서로 소유한 교회의 책으로 읽어지고 선물되는 것이다. 반드시 기독론적인 해석을 마지막에 해야 한다. 그것을 가하지 않으면 구약 문장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것이지 예수안에서 완성된 책으로 읽지 못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희년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 25장에만 있다. 물론 다른데도 잇기는 있다. 겔36장에도 있고 또 여기 레27장에도 나올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희년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명령하면서 희년에는 자유하라 붙어 있는 것이고 희년에 대한 규레를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희년에 대한 규례를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은 레위기25장에만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의 종과 가난한 자에 대하 규례는 출21장 신15장 23장에도 있다. 희년에는 무슨 말이 포함되어 있냐면 이스라엘 사람의 가난한 사람 또는 종 그런 말들이 있다. 그런 내용은 실은 출21장 신15장 23장에도 있다.

그리고 희년에 대한 문제는 안식년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이것을 서로 비교해서 각각의 문맥에서 그 강조점을 잡아서 해석을 해야 한다. 먼저는 비교해 봐야 한다. 여기 있는 것이 왜 저기 있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를 비교해 보면 문맥 잡기가 좋다. 이것은 이것을 강조하고 저것을 저것을 강조하는구나! 그 강조점이 있다. 그 강조점을 따라서 읽어보면 그 문맥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비교하고 그 문맥에서 어떻게 강조점을 표현하고 있는가 그런 표현법들을 알고 해석을 해야 한다. 출애굽기는 어떤 것을 강조하냐면 언약 체결이 출애굽기의 주제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풍성함이 주제다. 레위기는 언약 백성의 교제의 삶이 주제다. 그 주제를 따라서 거기 있는 기록들이 조절되어 있다.

조금더 설명을 하자면 출애굽기는 가령 가난한 자에 대한 말이 21장에 있는데 여기 레위기는 친족이 물러 주고 희년이 되면 자유케 해라 이런 말이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런데 출21장에는 그런 말이 없고 너희들이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사면 6년은 종으로 부리되 7년에는 자유케 해라. 그가 혼자 왔으면 혼자 떠나게 하고 만일에 종으로 팔린 뒤로 장가갔으면 혼자 떠나게 하고 만일에 자기 처자식을 사랑해서 주인과 함께 있기를 원하면 귀에 못으로 구멍을 뚫고 평생 그 집 종으로 살아라. 그 말이 있다. 그런데 레위기는 평생 종으로 살아라 는 말은 없다. 누구든지 돌아가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지 평생 종으로 살아라 그런 말은 없다. 그리고 혼자 왔으면 혼자 가라 그런 말도 없다.

여기서는 팔렸으면 그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라는 의미로 자유를 말하지 그 신분에 대한 문제가 강조점이 아니라 기업 회복이 강조다. 기업은 풍성한 복이다. 제대로 하자면 6년부터 9년 가을까지 주는 복이 여기 나타난 복이다. 그것을 누리도록 해라 그런 말이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언약 체결이 강조이기 때문에 누가 여호와의 백성인가? 종과 자유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놓고 쭉 언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는 그렇게 언급을 안한다. 여기서는 땅의 안식년을 설명할 때도 그것을 땅의 안식년 그렇게 언급을 하지 않고 면제년 그렇게 말한다. 여기 레위기서는 땅의 안식은 전부 다 쉬고 풍성한 것을 누리는 것이다. 아무런 수고 없이 땅도 쉬고 짐승도 쉬고 전부 놀고먹는다. 풍성히 먹는데 신명기에서는 면제 년에는 면제해라 그것이 강조다. 빚을 다 면제하고 이런 말이다. 그리고 면제할 때는 본전만 주지 말고 풍성히 주어서 돌려보내라. 그리고 면제년에는 어떻게 하느냐? 가령 십일조를 각 성에다가 모아 두었다가 고아나 과부나 함께 먹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풍성한 안식 가나안 땅의 풍성함을 누리는 율례이기 때문에 면제하되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한 살림 풍성히 주어서 종을 보내라고 이런 말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각 책의 주제를 따라서 어떻게 그것이 강조점을 잡아서 묘사되어 있는지 그것을 서로를 비교해 보면 알기가 좋다.

그런데 여기 레위기에서는 기업으로 돌아가라. 내가 주인이고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냐? 내가 너희들을 애굽에서 왜 이쪽으로 옮겼느냐? 내 품꾼 내 일군 삼을려고 옮겼지 않냐? 내가 먹이리라. 그러니까 만일에 팔렸는가 전부 돌아와라. 내가 주인이니까. 어느 누구도 종으로 매이지를 말아라. 내가 주인이니까. 그렇게 해서 풍성한 교제의 삶에다 강조를 두고 있다. 특성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칼빈이 했던 것처럼 이런 율법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조직해 가지고 그 안식년은 어떻게 한다고 풀면은 못 푸는 것이다. 오히려 각 책의 특성을 따라서 풀어야 문장을 해석하고 그 문장을 설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법규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읽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마태복음과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표가 다른데 서로 섞어 버리면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마치 부족해서 일부분 일부분 하신 것처럼 우리는 종합하는 능력이나 있는 것처럼 종합시켜 버리면 각 본문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각 본문을 두고 서로 비교하면서 각 본문의 강조점을 따라서 그 메시지를 해석해야 마태복음은 마태복음의 메시지가 있는 것이고 누가는 누가로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님의 증거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모세 오경도 그와 같이 해석을 해야 되지 조화적인 방식으로 서로 섞어서 그것을 법규를 세로 짜 맞추는 것처럼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비교하고 차이점을 따라서 문장을 해석해야 한다.

이제 해석하겠다. 땅은 여호와의 것이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안식년과 희년 실은 땅의 안식년의 완성은 희년에서 잘 나타나 있다. 7.7은 49 지나고는 새해의 안식에서 모든 안식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잘 나타나 있다. 땅은 여호와의 것이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품꾼으로 구원됐다. 땅의 안식이 완성되는 희년에는 이스라엘 모두가 여호와께 속한 자유와 안식과 풍성을 누린다. 이스라엘은 안식년과 희년에 규례를 지킴으로 이 은혜를 누리며 형제에게 공급한다. 이 규례를 왜 그들이 지키는가? 이스라엘은 안식년과 희년에 규례를 지킴으로 이 은혜를 누리며 형제에게 공급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안식년과 희년에 새기신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은 너희들은 너무 나하고 거리가 멀고 수준이 안 맞다 하는 죄의 책망의 용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으로 상급으로 주신 것이다. 단지 그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반복적이고 제한적이다.

그런 의미로 완성을 보도록 했다. 이제 드디어 예수 안에서 구약의 한계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희년도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이지 영원한 자유는 아니다. 50년이 돼서 다시 원상 복귀가 다 됐는데 또 가난해 져 버리면 또 팔려야 한다. 그리고 6년하고 7년되면 쉬고 7.7은 49 또 50년에는 안식의 완성이 되는 새로운 해를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반복적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안에서 완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완성을 바라보도록 하신 것이지 너희들은 한참 나와 멀다. 너희들이 율법을 못 지킨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에서 약속하신 것을 누리며 그 약속하신 것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품꾼으로 구원한 것처럼 그들의 품꾼으로 가나안 땅의 모든 복의 땅으로 심어준것처럼 그들도 그 복의 땅에서 형제에게 그 풍성한 것을 공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이 면제해 주니까. 하나님이 면제할 때 이스라엘이 면제해 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형제를 공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땅의 안식년에는 땅이 여호와 앞에서 안식을 누린다. 안식년의 소출은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과 짐승의 식물이다. 풍성히 먹는다. 여호와의 땅과 거기 거하는 모든 것이 여호와 앞에서 안식을 누리며 그 땅의 소출로 배불림을 받는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면제년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풍성한 양식 풍성한 것 너희들이 절대로 종으로 있지 말고 내 땅에 거하라. 너희들은 내 성소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냐? 너희들은 내 땅에 사는 사람이 아니냐? 이 땅으로부터 쫓겨나지 아니하리라. 이 땅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팔렸는가 돌아 오라. 너희들은 먹여 주마. 삼년을 풍성히 먹여 주마 그런 것이 희년에 나타난 것이 그런 말이다.

7안식년을 채우고 7월10일에 속죄일에 부는 나팔은 희년 곧 복된 해를 알리는 해이다. 제 50년은 거민에게 자기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자유를 공포하는 복된 해로서 거룩하다. 다른 의미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해로서 거룩하다. 안식의 떡을 먹으며 양식을 먹는데 이 양식은 제 9년 수확할 때까지 미친다. 기업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풍성한 양식을 먹는다. 수고 없이 먹고 삼년까지 먹는다. 그것이 희년이다.

이 은혜를 해를 예수께서 선포하셨다. 눅4:18절 이하에 회당에서 사61장을 읽으시면서 이것이 너희 귀에 응했느니라. 즉 희년에 약속이 너희에게 성취되었느니라. 그러니까 회당 사람들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인데 놀래 버렸다. 그런데 성소에 계신 여호와께서 아들안에서 이스라엘 중에 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유와 생명과 기쁨이 세상에 임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속한 생명과 기쁨을 그의 교회에 주시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 봉사케 하셨다. 그것이 교회 안에 희년에 완성이다. 예수께서 희년을 선포하신 것은 자기 자신이 임마누엘로서 그들 중에 임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제는 옛 언약의 완성 자로 오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희년을 선포하셨을 때는 단순히 땅으로 돌아가는 그런 회복이 아니었다. 그런 희년은 모세 제도가 주는 희년이다. 예수는 그런 희년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메임과 모든 병의 메임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해 주셨다. 단순히 가나안 땅의 생명의 부요함을 이룬다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자유 자로 말씀하셨다. 왜 구약 때는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는데 그 때는 아직도 가리운 원수된 것이 있었다. 아직도 죄의 권세와 반복되는 죽음 아래서 나와야 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런 휘장을 거두시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나를 너희에게 이르노니 친히 하나님으로 그들 중에 임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전보다 더 큰 안식으로 그들 중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신 그런 일에서 안식의 성취 희년 새로운 해 새 시대의 옴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루셨는가? 예수님도 죽으셔 버렸다. 그러면 희년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까지 죽음의 권세에 갇혀 버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종으로 팔린 정도가 아니다. 그 왕이 죽음의 권세에 갇혀 버리면 이것은 희년에 소망은 없는 것이다. 자유의 소망 생명의 소망은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간 제자들이 구원의 소망이 끊어졌다고 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살리셔서 보좌 우편에 오르게 하셨는데 이분이 우리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부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로 먹이신다.

구약 때는 어느 누구도 피를 먹은 적이 없다. 짐승의 제물은 제사장은 먹어도 평민에게는 주어지지 안했다. 심지어 화목제물 까지 의미상으로 확대하자면 임자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어도 구약 본문의 내용은 제사장까지고 임자에게는 안 준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제물은 성소 뜰에 잇는 제사장의 양식 외에 백성들은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거룩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휘장은 찢어졌고 심지어 무덤까지 열려서 무덤도 경건한 백성들을 가두어 둘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로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 올라 가셨고 그는 자신의 살과 피를 교회의 양식으로 주셨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먹지 못하는 생명이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온전한 일체의 생명을 주셨다.

우리가 주님의 몸에 참여하며 몸이 교제로 먹는다. 그러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에 참여한 예배로 모이고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것으로 주의 상에 함께 진설하고 우리가 주님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교제의 감사로 먹고 그리고 그것으로 가난한 자가 먹을 수 있도록 공급해야 한다. 그러니까 성찬식과 구제가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이 초대 교회 예배다.
여러분이 먹을 때마다 주님의 몸에 참여하고 그런 의미로 가난한 자의 몸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주셔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라. 그것이 주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한 것이다. 고후8-9장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사도행전의 교회 설립 사건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도 만나를 거뒀을 때도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주의 몸에 참여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우리의 주님의 일군이다. 우리 주일 학생이 그런 질문을 했다고 그랬다. 하나님이 왕인데 왜 사람을 왕을 만들었을까요? 이스라엘에 왕이 많찮아요? 하나님이 왕인데 왜 사람을 왕을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대리자다. 왜 하나님처럼 누리게 할려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두 우리에게 위탁하셔서 같이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믿음이다. 구약 때는 구약대로 살면은 그들은 하나님의 품꾼이고 하나님의 안식의 누리고 그 안식을 백성에게 선물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우리들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몸의 지체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몸을 공급하시는 주님처럼 그렇게 삶으로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로 주님의 일군 품꾼으로 사는 것이다. 왜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몸에 심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희년에 완성으로서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자유다.

이 자유는 끝이 없다. 날짜가 반복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죽음이 권세를 시행하고 있고 모든 것이 탄식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시면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누리는 모든 것을 온 우주에서 누리게 되고 그것이 주님께서 만유의 만유가 되신다는 역사의 완성점이다.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교제를 누리고 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수고해도 나는 헛되이 수고했다 그런 말이 없다. 왜 우리를 사랑하사 몸을 주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사랑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나는 너에게 속했고 너는 나에게 속했고 한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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