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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과 축복, 배약에 대한 경고 (레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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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본문의 의미를 요약적으로 살펴보고 해석하는 순서로 강론하겠다.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은 공부하기 전에 읽어 와야 되고 또 공부하고 나서 읽어보고 그렇게 해서 성경 본문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복을 받아야 된다. 꼭 누구를 의지해서 배울려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점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문제가 1-2절까지 있고 그것을 지키는 복이 3-13절까지 말씀하시고 만일에 어기면은 벌주리라는 경고가 39절까지 있고 그 외에는 회개하면 고쳐 주리라 하는 회복의 약속이 있다.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제 먼저 1-2절을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목상이나 주상을 만들지 말고 땅에 조각한 신상을 세우고 거기에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이제 마지막 레위기는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하셔서 그들을 나라로 조직하는 언약 체결이 핵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약의 법과 친히 하나님이 동거하시는 언약의 성소를 짓는 것이 출애굽기의 내용이었다. 레위기는 그 성소에서 하나님이 내 앞에 예물을 드려라. 성소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것이 레위기의 핵심이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인데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교제의 삶 그것이 중심적인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을 25장까지 말씀하시고 나서 이제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고 듣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 하는 언약 체결을 마무리하고 있는 내용이 26장이다. 그리고 27장에 보면 십일조를 내고 서원 예물을 내고 많이 나와 있다. 지금 언약 체결에 대한 마무리를 짓고 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그 축복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덧붙여진 것이 마지막 27장이다.
언약의 내용은 1-2절에 있다. 즉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며 성소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다. 즉 이스라엘 땅밖에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는가? 성소에 계시면서 함께 하시고 특별히 안식일의 교제에서 함께 하신다. 그래서 모든 절기는 안식하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언약에 대한 문제를 핵심적으로 요약하기를 우상을 섬기지 말고 나를 섬겨라. 어떻게 내 안식일을 즐거워하고 지키고 성소를 공경하라. 즉 내가 그 성소에 잇기 때문에 나를 공경해라. 그런 말로 언약의 삶이 요약되어 있다.
그 다음에 이제 잘 지키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너희가 나의 규례를 지키면 비를 때를 따라 줄 것이고 일년 내내 수확이 그치지 아니하고 그런데 성경은 비를 때를 따라 줄 것이고 때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고 너희가 타작하는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고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한마디로 일년 내내 수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확을 타작하는 것과 포도 따는 것에 맞췄다. 그리고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땅에 완전히 거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항상 본문을 읽어야 한다.
때를 비를 주시고 연중 수확이 그치지 않도록 하시고 배불리 먹고 완전하리라 이것이 복이다. 그러니까 그 땅에 풍성한 산물을 주고 안식을 주겠다. 그 말이다. 그 다음에 그 땅에 평화를 주리니 사나운 짐승을 제거하고 너희들이 누우나 괴롭게 하는 자가 없고 칼이 없을 것이고 대적들이 너희들 앞에서 엎드러지게 하리라. 이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가나안 땅에 풍성한 산물을 준다는 말이었고 그 다음에는 모든 적들로부터 완전케 하리라 그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 풍성함과 안식을 주겠다.
또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며 창대케 하며 풍성케 하리라. 그리고 그 언약을 이행해서 그들을 번성케 하고 하나님은 그들 중에 장막을 세우시고 함께 행해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그들이 말을 잘 들으면 주는 복이다. 첫째 가나안 땅의 풍성함 모든 적들로부터 안식 그리고 모든 언약을 이루셔서 그들로 번성케 하고 또 하나님은 그들 중에 영원히 함께 계셔서 집을 짓고 함께 하시겠다. 그렇게 해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렇게 복을 주겠다 하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이전에는 애굽 땅에서는 바로를 섬겼다. 그 때는 바로를 섬기고 우상의 권세 아래 있었다. 지금은 여호와를 섬긴다. 왜 거기서 건져내서 여호와의 백성을 삼으셨으니까. 안식일 제사장이 성소에다가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그것을 먹는다. 내가 그렇게 했다. 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축복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면 언약의 축복이다. 가나안 땅의 풍성함 가나안 땅의 안식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히 그들의 성소가 되셔서 함께 하시고 그들을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신다. 다시는 애굽의 멍에를 메지 않고 나를 섬기도록 복을 주겠다. 그런 말이다. 이것이 이 문장안에 있는 내용이다. 일단을 그 문장안에 잇는 것을 풀고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됐는가를 이야기 해줘야 한다.
만일에 나의 규례를 멸시하면 이 멸시한다는 말이 7배나 벌을 준다는 말이 다섯 번 나와 있어도 전체적으로 합치면 7번 나와 있는 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서는 문단이 나누어져 있지만 내용은 벌주겠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잇기 때문에 이렇게 풀었다. 그러나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놀라운 재앙을 내려 병으로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성경에서는 너희 눈이 쇠하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생명이 쇠약할 것이다. 그리고 파종한 것을 적이 먹기 때문에 너희 수고한 것이 헛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쳐서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실은 가나안 땅의 복 언약의 복을 다 잃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라운 재앙을 내려서 생명을 쇠약하고 하고 번성하고 번성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쇠약하고 또 파종한 것을 일년 내내 먹으리라고 그랬는데 적이 먹어 버리고 그들은 적군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치니까 안식이 없고 이렇게 해서 가나안 땅의 모든 복을 잃으리라. 이 말을 강조해서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그리하여도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이 칠배나 하는 것은 벌을 완전케 하리라 그런 말이다. 일곱 하는 것은 완성 수이니까 벌을 완전하게 주겠다. 내가 너희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하늘과 땅을 철과 놋같게 하리니 땅은 산물을 내지 아니하리라. 그 다음 벌은 칠배나 벌을 더 주실 것인데 왜 벌을 주느냐? 그들의 죄 때문에 벌을 주는데 그 죄는 세력을 인한 교만이다. 그들이 먹을 것이 풍성하고 살찌니까 발로 하나님을 찬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철과 놋처럼 해 버리니까 비가 내리지 않고 땅은 산물을 내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하늘도 땅도 그가 지으신 모든 세계가 놋처럼 되어서 아무것도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리라.
그래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또 칠 배나 벌을 내리는데 들짐승을 자녀와 육축을 멸하여 수가 적어 길이 황폐하리라. 들짐승을 보내서 자녀와 육축을 멸하기 때문에 땅이 완전히 황무지가 될 만큼 사람이 안 지나간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먹을 것을 다 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는 재앙을 내려 즉 사나운 짐승을 내려 너희를 죽이겠다. 그런 말이다. 그래도 대항할진대 여기서 이 말을 계속 쓰는 이유는 성경 본문이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나를 배반하고 하는 말은 같은 가치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이나 언약을 배반한단 말이나 하나님을 대항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이다.
죄 그러면 목표를 맞추지 못한 것 그런 단어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항한다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이다. 그래도 안 들으면 나곧 나도 너희를 대항하여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강조 시킨 것이다. 나 곧 나도 너희를 대항하여 칠 배나 더 칠지라 칼로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성읍에 모일지라도 열병을 보내고 대적에 손에 붙이며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라. 여기서는 양식을 끊는 것과 질병과 원수를 보내리라는 것을 한꺼번에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도 내게 대항하면 내가 진노로 너희를 대항하며 나 곧 나도 그 말이 아니라 진노로 너희를 대항하리니 점점 강조시키고 있다.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자식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내가 너희 산당을 헐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너희 성소와 성읍으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양치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열방중에 흩을 것이요 너희의 땅과 성읍이 황폐하리라. 대적이 이것을 보고 놀래리라. 여기서는 심판이 더 강화되어 있는데 어떤 심판을 말하냐면 이제는 배고픈 정도가 아니라 자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그 정도가 아니라 너와 너희 신이 함께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우상을 부서뜨리고 부서뜨린 우상에 그들의 시체를 던져 버리니까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그럴 뿐만 아니라 너희 성소까지 황폐하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던 성소까지 함께 파괴시켜 버리고 너희의 예물을 다시는 받지 않겠다. 완전히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 땅에서 배고픈 정도가 아니라 그 땅에서 적군의 칼에 죽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의 땅에 흩어 버리겠다. 대적들도 보고 놀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언약의 복들을 끊겠다는 것이 점점 강화되어 있다. 내용으로 묶으면 앞에 있는 축복을 없애겠다는 말과 똑 같다. 가나안 땅의 풍성함 가나안 땅의 안식 그리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어서 너희 중에 행하고 성소 중에 함께 하면서 너희들의 생명을 번성케 하리라. 이 약속을 없애겠다는 말을 점점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하는 동안에서 너의 안식시에 쉬지 못하던 땅에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너희 남은 자에게는 대적의 땅에서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릴 것이라. 그 앞에 다른 말이 더 있다. 바람에 나는 잎사귀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랠 것이고 또 신명기 같으면 밤이 되면 언제나 아침이 올까 아침이 되면 언제나 밤이 올까 쉴 틈이 없다. 너희 대적의 땅에 너희를 삼키리라. 남은 자가 대적의 땅에서 자기와 열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리라. 이것도 성경 표현법은 아주 강조되어 있다.
자기 죄 열조의 죄 그 말을 강조시키면서 쇠잔하리라 하는 말을 강조시키면서 하고 있다. 단지 저는 내용을 알게 하려고 줄여 버린 것이어서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표현법은 잘 살리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성경 자체를 읽도록 하시라.
그러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신 것만 만족하시냐? 그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수의 땅에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벌할 것이다. 남은 자들을 그런데 어떻게 벌하냐하면 그 땅은 그들을 토해 내버려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안식하고 즐거워해야 하는데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범죄 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동안에는 안식할 것이다. 다시는 죄인들을 먹이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땅은 쉴 것이고 그리고 너희들은 원수의 땅에서 쉬지 못할 것이다. 바람에 나는 잎사귀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래고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치다가 넘어질 것이다. 쉬지 못하고 너희 생명이 쇠잔한데 너희 죄와 조상들의 죄 때문에 쇠잔할 것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언약의 땅에서 쫓겨날 뿐만 아니라 언약 땅 밖에서 까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데 하나님의 땅은 그들을 토해 내버리고 이방 땅은 삼켜버리고 그렇게 그들이 열국에서 망하리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 때문에 그대로 끝내 버리는가? 이제 회개와 회복에 대한 약속이 그들이 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를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음으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대적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이 할례 받지 아니한다 그 말은 성경에서는 할례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 할례는 죽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출생을 의미한다. 그래서 할례 받지 아니한 그런 것은 아직 하나님의 것이 아닌 대항한 옛질서에 속한 마음이 될 것이다.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조상들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런데 끝까지 대항하냐면 이제 대적의 땅에서는 왜 우리가 이곳으로 끌려 왔던고 바벨론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 왜 버렸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냐? 그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 매를 순수히 맞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조상들과 맺은 언약 그렇게 하지 않고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이삭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일일이 따로 따로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것도 거꾸로 불러 나가고 있다. 아브라함까지 이것은 그 성경의 묘사법을 읽어야 되지 이런 이론으로 해 가지고는 이런 묘사하는 의미를 못 드러낸다. 저는 신학적으로 표현하니까 조상들과 맺은 언약 이렇게 되었지만 성경은 조상들의 이름을 아브라함까지 일일이 불러 나간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는 살뜰한 표현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읽으면 잘 모르고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하면 신학적으로는 빨리 알아듣고 그런데 어머니가 자식한테 편지를 쓰면 신학적인 말이 아닐 것이다. 일상적인 언어가 되기 쉽다. 그런데 그런 것은 별로 힘이 없다고 느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표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 자체를 열심히 읽어야 한다. 목사를 세운 것은 교회를 도울려는 것이지 목사를 통하지 않고는 모른다는 의미로 그렇게 하지 않게 때문에 여러분들이 목사직을 존중한 것은 좋지만 우리 목사님이 설명해 주기 전에는 모르겠다고 눈감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눈을 뜨고 열심히 읽어야 한다.
그들이 나의 법도를 멸시하였음으로 그 땅에 사람이 없을 때에 땅에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처음에는 회개를 언급하고 조상들의 언약을 말하고 다시 회개를 언급하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회복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동심원적인 물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열방의 목전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했는가 출애굽을 다시 말하고 있다.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열국에 권세에서 건져냈다.
다시 열국에서 모욕을 받지 않도록 건져 낼 것이다. 왜 나는 여호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끝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다. 그런 말로 끝맺고 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율법이다 하는 말은 26장 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27장 맨 끝에도 있다. 같은 말이 반복되어 있다. 시내산 말씀은 레위기에서 끝맺고 있는 것이다.
해석이다.
이제 이 전체를 해석하는 것이다. 언약 백성의 삶은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을 즐거워하며 성소에서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것이 레위기에서 삶이다. 하나님은 성소에서 모세야 나한테 예물을 드릴려면 이렇게 드려라. 너희 부정한 자들아 이렇게 이렇게 하고 내 성소에 들어와라. 그 모든 정결 예식을 주어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 25장까지 절기를 보면 그것은 안식의 절기다. 모든 절기는 성회 하나님의 전에 모여야 되고 안식해야 되고 특별히 안식일은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안식일에 교제에다 강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을 우상을 섬기지 말고 나를 섬기되 내 안식일을 즐거워하고 내 성소에서 나를 섬겨라. 그렇게 말씀했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면 바로 이 성소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을 따라 봉사하면 가나안 땅의 풍성함과 안식을 주시며 그들을 창대케 하시며 번성케 하신다. 하나님은 성소 중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행하신다. 성소에 함께 계시고 그들을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셔서 풍성히 먹게 하시고 안식을 주신다 그것이 언약의 내용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항하여 언약을 배반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듭 거듭 온전한 진노로 벌하신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번 벌주면 끝하면 모르겠는데 칠 배나 더하리라 하면서 그 벌이 여기 보니까 여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우리 같으면 삼세번 참으면 그만일까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칠 배나 벌을 주리라 하는 것은 완전한 진노로 쏟아 부으리라는 말인데도 그런데도 이것은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해서 그래도 안 들으면 하는 이런 오래 참으심이 있다. 구약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킬 때도 솔로몬 때부터 범죄가 시작되지만 마지막 멸망시킬 때도 3차로 망했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시야 근 20년 간격에 세 번에 걸쳐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옮기셨다. 오래 참으신 분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그래도 안 들으면 근 여섯 번에 유예가 있는데 그 때마다 일곱 배가 징치하리라. 그런 말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과 싸우신다. 특별히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 백성을 완전히 진멸하도록 싸울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대항하며 광야에서 몰살시킬 정도로 싸우신다. 언약을 배반하면 그런데도 거듭 거듭 많은 유예와 함께 하나님의 온전한 진노로 쏟아 붓는다.
그들은 언약의 모든 복을 잃을 것이다. 언약의 복은 풍성한 안식 번성함과 창대함이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파멸되고 신명기에서는 이 정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파괴하고 파괴된 우상에 그들의 시체를 던져 버린 정도가 아니라 너희들이 사모하는 우상의 종이 되리라. 그래서 바벨론에 가서 원없이 우상 섬기고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섬겼던 신과 함께 그들의 생명을 멸망시키고 더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며 대적에 땅에서도 안식이 없으며 조롱 거리가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다. 그러나 땅은 그들의 죄로부터 안식하고 백성은 이전의 교만을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의 땅에 황무지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황무할 동안에 쉰다. 다시는 죄인들을 먹일려고 경작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안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땅을 하나님의 안식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안식년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먹고 마심을 추구해서 쉬지 아니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을 쫓아내면 하나님의 땅은 70년 동안 안식하리라. 역대기 끝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때가 하나님의 땅에 안식의 해고 백성들은 원수의 땅에서 쉬지 못할 것이지만 거기서 그들이 자기들을 낮추어서 회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또 그 언약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싫어하지 않고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언약의 축복과 그리고 배교자에 대한 벌이었다. 이상의 기록된 사실은 이스라엘의 배교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듣지 않고 만일에 그들이 제 7년에 쉬면 먹을 것이 줄여들 줄 알지 않겠는가? 지금 50년이 되어서 땅을 백성에게 공짜로 나눠줘버리면 자기 소득이 줄어들 것이다. 실은 이런 식으로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하나님에 드린 자로서 백성과 함께 그 부요함을 나눠야 되는데 실은 그렇게 되지를 안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 땅에 포로 잡혀갔다. 그들이 사모했던 이방의 권세의 종이 되었고 그들이 사모했던 우상의 종이 되었고 그들은 세상에서도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합에게서 바알의 신전을 세우신 방식으로 완전히 바알화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고 남은 자를 위한 구원을 엘리야에게 약속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전을 지음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왕국이 되었던 것처럼 북 열지파가 아합 때 사마리아에다가 아합의 전을 지음으로 완전히 아합의 왕국이 된 것이다. 그 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고소했고 그들은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자들을 위한 구원 약속을 했다. 범죄한 이스라엘과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싸우시고 예후를 통해서 싸우시고 이방왕 베나다를 통해서 싸우실 것이다. 그러나 남은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것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약속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언약에 신실하셔서 70년이 차매 배교의 심판의 기간이 차니까 그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해 내셨다. 그리고 다시 성소를 짓고 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전 영광과는 달랐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따라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셨는데도 계속해서 그들은 배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순종하신 아들로 말미암아 하늘 처소에 영광으로 교회와 함께 하시고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먹이시고 만민 중에 함께 계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범죄 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마지막 왕으로 보내셨는데 이 왕은 기원이 혈통을 따라서는 다윗의 혈통이어서 고린도전에서는 기원이 하늘에 있는 둘째 아담이다. 그는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마지막 왕으로 자기 백성의 대표로 세우셨고 이 왕은 하나님 앞에 언약에 신실하게 걸었다. 네가 언약을 잘 지키면 이런 복을 주리라 했는데 구약의 백성들을 그렇게 신실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 아들은 어떻게 순종했는가? 자기 몸에 저주받은 죽음에 이르도록 까지 순종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40일 시험에서도 나타났고 죽음에 이르도록 어찌해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그 때도 자기 하나님으로 부른다. 그러면 왜 그랬는가? 그것은 백성들이 범죄한 단순한 벌을 받으라 그런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어서 죄인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반드시 죄는 죽음으로 끝나야 되고 새로운 생명만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구약에서 반복되는 제물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상에서 봉사했던 것이다. 그냥 가나안 땅의 생명은 안된다. 죽음을 통해서만 들어온다.
그러니까 그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된 생명인데 피가 뿌려지면 거기까지 제사장이 나가서 봉사하는 자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지막 왕을 세우셨는데 이 아들은 자기 몸에 죽음에서 하나님께서 죄의 세력을 정복하시는 그 일을 저주받은 죽음에 이르도록 까지 순종하심으로 함께 걸으셨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자기 백성과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이다. 아담은 역사의 처음에서 순종하지 못함으로 온 인류에게 사망의 권세 아래 매이게 했다. 그것은 모세 언어로 하면 아담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항상 모세 언어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새로운 대표자로 세우셨는데 항상 그 대표자가 이룬 것이 그 백성이 얻는 것이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끝내시기를 원했을 때에 아들은 그 저주의 잔을 그대로 받으신 것이다. 아담 같으면 먹지 말라고 한 것 한가지만 있어도 시험에 들었는데 예수님은 자기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때까지라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을 불렀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렇게 완전한 신뢰로 그 길을 걸었다. 그것이 마태와 누가복음의 시험 기사들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권세 아래서도 순종하신 아들 안에서 다시는 죽음은 사람을 미혹하는 권세를 상실했다. 왜냐하면 죽음이 그 아들을 유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러면 사탄의 권세는 죽음의 권세다.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이 사탄의 권세다. 그래서 모든 인생들은 아브라함의 후손까지라도 죽을까 무서워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저주받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가 그에게 맡기신 길 자기 몸의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죽음의 권세를 끝내는 그 일에 기꺼이 동참했고 예수님은 원해서 그의 생명을 드렸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들의 순종안에서 죽음의 시대를 끝내 버리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은 다시는 죽음이 손댈 수 없는 거처에 있는 아들이시다. 땅에 있는 아담처럼 무엇이 부족한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생명으로 거기 계신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교회는 새로운 대표자를 얻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끝에서 나타난 것이다. 왜 역사가 완성되니까. 여러분 요새 낳은 아이들은 휴대폰 가지고 전화 건다. 옛날 같으면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다. 왜 역사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 때는 모세를 통해서 말씀했으니까 모세도 휘장 밖에서 누리는데 이제는 보좌에 오르신 아들안에서 그의 백성을 대면하니까 이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에게 가리움이 없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교제로 계신 그분인 것처럼 교회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다. 완전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교제 가운데 있다.
지금은 아들은 통해서 하나님은 죽음의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셔서 자기 약속을 완성하셨다. 네가 순종하면 내가 가나안 땅의 복을 주고 풍성한 안식의 복을 주고 나는 영원히 너와 함께 하는 약속을 예수의 순종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과 교제와 영광을 준 것이다. 이제는 가나안 땅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양식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즉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인데 그런 영원한 복으로 교회를 인도하셨고 그리고 교회가 누리는 하늘 처소에 있는 안식은 음부에 권세가 이기 지 못하리라. 이방의 권세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가 손댈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의 자유다. 그리고 내가 너를 번성케 하고 창대케 하리라 했는데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생명을 얻고 온 우주에 충만하게 온 이방 세계에 교회가 확대될 뿐만 아니라 참으로 그 이름은 높아지고 높아져서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권세로 높은 그런 이름을 얻으셨다.
누가 그랬는가? 하나님이 순종하신 아들안에서 그에게 속한 교회를 하늘에 속한 처소의 영광과 함께 거기 있는 생명의 풍성함과 함께 거기 있는 안식과 함께 거기에 있는 존귀와 함께 완성케 하셨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복이다. 이제 교회는 이 복을 누리기 때문에 항상 대표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백성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구약 때는 아무리 백성이 거룩해도 모세는 휘장 밖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밖에 다른 능력이 없다. 그것이 최고의 능력이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교제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골로세서 말대로 하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기 때문에 이제 교회도 믿음의 신실한 백성으로 걸을 수가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깨어 있을 때 그렇다.
약혼 했을 때는 취소할 수 있다. 가짜로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약혼이란 관계가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은 혹시 부부 싸움을 날마다 할지라도 취소 될 수 없는 것이다. 관계가 그렇다. 그 말이다. 이제 교회는 그런 의미로 하늘에 속한 능력을 얻었다.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으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면 거기는 완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방인이 부요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의 신보다 큰가 의심도 되고 그들이 범죄해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비를 주지 않으면 아 이방신은 훨씬 좋은가 보다. 하고 그 신을 사모 할 수도 있다. 하늘에서 만나를 안주면 다음 날을 위해서 염려하고 근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가 죄인 되고 원수되었을때 자기 아들을 우리의 대표로 보내셔서 아들의 죽으심 안에서 영원히 생명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런 교회는 사탄이 죽음까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는가? 질문 할 수 없다.
왜 사랑의 확증이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영원히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교제의 영이시다.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에 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그렇게 질문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바울처럼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고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롭지 흔들리지 아니한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걷는 믿음의 능력이다. 우리가 이처럼 큰 복 애굽에서 건져내서 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봉사한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셔서 하늘 처소에 계신 주님을 봉사하도록 완전한 생명의 빛가운데 두셨기 때문에 교회는 어둠이 없고 그런 의미로 언약에 신실하게 걸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안식에서 동행하지 못하고 넘어진 것도 비참한 심판이지만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마지막에서 아들을 주심으로 하늘에 영광의 처소로 옮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빛과 교제를 주셨는데도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동행하지 못하고 조금만 이해 타산을 따라서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넘어 질 것 같으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셔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지만 만일에 그 판결이 완결되면 일곱 배를 더한 문제가 아니라 다시는 회개하는 제사가 없는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야 될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은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데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자유지 언제나 쫓겨날까 하는 불안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생명을 누리는 교제지 불안이 아니다. 이제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영원히 우리의 왕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의 교제와 능력과 빛을 주셨기 때문에 만일에 여기서 깨어 있지 못하고 넘어지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도 없고 이전에 있었던 일곱배 했던 바벨론 땅의 심판이 아니라 영원한 진노의 불못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레위기 2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가나안 땅의 언약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그러지요? 여호와란 이름은 이름 풀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부활하신 아들안에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그 아들 안에서 함께 하신다. 이전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함께 하셨던 것은 그림자 적인 교제인데 이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데 구약의 모세는 종이지 자유하는 아들이 아니다. 그는 휘장밖에 있는 어린아이요 쫓겨난 종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 세우신 중보자는 그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왜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교제하신 분이고 그분 안에는 자유함이 있지 가리움이 없다. 완전한 빛이시다.
이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부활하신 예수안에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주 하나님 구약이 여호와의 칭호를 그대로 예수님께 붙이는 것이 사도들의 증거다. 이것은 구원 역사에서 나타난 이야기다. 만일에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조그만 간격이 있으면 그것은 완전한 빛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고 잇는 구원이다.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구약이 안식일을 그대로 신약에 가져오지를 않는다. 어린 아이때 살았던 법을 어른이 되었을 때 그대로 옮기면 안된다. 휘장밖에서 종으로 섬겼던 것을 휘장안에 있는 자유하는 아들이 그것을 가져와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구약을 신약에 가져와서는 안된다. 그것은 성경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아닌 대로 섬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숙제 잘하고 심부름 잘하니까 아버지가 이뻐하셨다고 커서도 아버지 나 숙제 내주고 심부름 시켜 줘 하고 아빠 나 이뻐 하면 그것은 진짜 정신 나간 아들이다. 그것은 참으로 정신 나간 아들이다. 어렸을 때 살았던 방식을 절대로 가져와서는 안된다. 어렸을 때를 가져오면 가져올수록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새로운 관계로 사는데 그 새로운 관계로 이전에 일기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다 큰아들로서 일기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구약을 다시 읽을 때만 구약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예수의 책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되다. 우리가 성소에서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꼭 예배당에서만 섬긴다는 이런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일단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일을 즐거워하고 지키고 성소에서 하나님을 즐거워 할 것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주를 섬겨야 된다.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는 영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항상 주의 상에서 앉아서 먹고 마시는 교제가 여러분 밥상에서 먹는 식이 되어야 한다. 왜 우리는 그분 앞에 감사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살아야지 어떤 영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특별히 주일날을 교회가 주의 상의 교제에로 모이기 때문에 만일에 이 모임에 위배된 방식으로 하늘에 속한 새로운 교제의 방식에 위배된 방식으로 그 날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항상 교회가 주의 상에 하늘에 속한 교제로 모인다. 그리고 이제는 먹고 마심으로 염려하는 시대는 끝났다. 왜 부활의 시대가 왔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날에 이런 저런 일을 뒤로 미루고 주의 교회가 몸의 교제로 모이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을 형제를 부양하는 몸이 지체로 살고 그런 하늘에 속한 새로운 생명의 기쁨으로 누려야 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테으프 가져다가 예배하는 그런 시대는 없어지겠지요?
요새 아무리 신식 아들도 서울에서 나는 여기 식당에서 먹을 것이니까 아버지는 거기서 잡수세요 그런 식으로는 생일 잔치가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찬을 중심한 예배가 안되면 앞으로 비디오 예배고 녹음 예배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변적인 종교적인 교훈을 될란가 몰라도 주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구체적인 삶의 능력을 나누는 그런 예배는 안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모인 그 자리에서 주의 몸의 참여한 교제를 누려야 되지 그냥 얘기 없고 와서 아이 달래느라고 한참 정신없다가 아이구 오늘은 무슨 설교했는가 기억이 안 나니까 테이프 가져다 듣자. 아이 잠 잘 때 들으니까 이 말이구나. 은혜 받았구나 하고 그 때 찬송 부르고 은혜 받았다고 해서는 자기 아버지 생일날 가서 아이 보고 정신없다가 무엇을 좀 싸 주니까 이제 마음 차분히 밥 먹는구나 그것하고 똑 같은 식이 되어서 별로 좋은 일이 못된다.
예배는 모임으로 예배지 가서 설교 듣고 감동 받는 그 자체를 예배로 삼아서는 안된다. 여러분 식탁에서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는 것처럼 교회는 그런 식탁 교제로 모인 것이다. 그러니까 매주 성찬식을 행하고 그리고 예찬과 연결이 되고 그것이 구제와 연결이 되어서 마치 아버지의 기쁜 잔치에 가난한 자식들도 풍성히 먹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옳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즐거워하고 성소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 지켜도 벌을 칠 배나 더하는 이러 험악한 꼴을 본 사람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매를 실컷 맞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이 없다. 장성한 아들 취급하니까. 어렸을 때는 매 때려서 고친 식으로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데 그 진노가 마무리 될 때는 이전에 매 맞는 것하고는 다르다. 그것을 명심하고 부활의 빛가운데서 신실한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김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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